“차기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영혼 심어줘야” - 안광복 『철학자의 설득법』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 철학자에게 묻다 철학자가 바라 본 이 시대의 자화상
『철학자의 설득법』의 안광복 저자는 교사이면서 철학자이기도 하다. 복잡한 현대사회에 철학을 좀 더 쉽게 대중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그의 집필활동은 그간 다양하게 이어져 왔다. 철학의 필요성이 더해지는 복잡한 세상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기술은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서울 중동고등학교 독서실의 오전 햇살은 가을의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수업 시작 종소리가 들려오자 학생들은 삼삼오오 다시 교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윽고 도서실의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잠시 짬을 낸 안광복 선생과 마주할 수 있었다.
고교교육을 흔히 입시위주교육이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선생님 말씀처럼 용기와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철학에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현장에서 중시되지 못하고 있는데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나라 교육은 하우(How)에는 상당히 강해요. 와이(Why)에는 답이 없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학생들이 경쟁을 해야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경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막연합니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어떤 학교 선생님도 개인적인 출세를 위해서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고 하면 요즘에는 파시스트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결국 무엇을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가에서 ‘무엇’을 공란으로 하고 ‘일단 뛰어라 답은 나중에 찾을 것이다’처럼 선문ㆍ답 같은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죠. 바로 이것이 우리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고교교육이 입시위주에서 바뀌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어젠다(Agenda)를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에 바람직한 모습이 뭐고 어떻게 바뀌어야한다는 방향이 정해진다면 경쟁도 좀 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쪽으로 나갈 것 같아요. 적어도 지금같이 소모적으로 이뤄지진 않겠죠.
왕따와 학교폭력 등 10대 청소년들의 문제 역시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처벌 중심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해법은 무엇인지요.
사랑받는 사람은 절대 폭력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내가 인정받고 필요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절대 극한의 방법,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아요. 학교폭력이 만연한 이유, 오히려 선진국으로 갈수록 심각해지는 이유는 사회가 안정되면서 학생들에게 되레 너는 이제 없어도 되는 사람, 잉여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산업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네가 뭘 해야 할지는 스스로 찾아라’는 식으로 자기 존재의 의미를 학생들 개개인에게 떠넘기면서 생기는 문제죠. 즉, 학교폭력에 진정한 해법은 학생 하나하나에게 ‘너는 사회에서 필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다’, ‘이렇게 우리사회가 나아갈 테니 이런 식의 기여를 바란다’와 같이 삶의 목적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왕따의 경우는 희생양을 정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앞서 질문 드린 국제사회, 우리사회에서 빈번하게 이뤄지는 그릇된 모습이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축소, 이입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른들이 잘못된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를 ‘분노의 트리클다운(Trickle Down)’이라 표현하는데요. 분노가 가득한 상황에서는 이것을 표출해야 되죠. 그런데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터트릴 수 없잖아요. 그러니 자꾸 약자에게 내려가는 것이죠. 화가 잔뜩 난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자녀들에게 그 분노를 표출합니다. 자녀는 그 분노를 어디다 표출할까요. 쌓고 쌓다가 가장 만만한 대상, 내가 분노를 표출해도 저항을 못하는 대상에게 터트리거든요. 이런 분노가 내려가다 보면 아이들에게 압축이 될 수 있어요. 왕따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전반에 만연한 분노와 좌절이 먼저 다독거려지고 치료 돼야 할 것 같아요.
요즘 40~50대 중ㆍ고교자녀를 둔 가장들이 주로 회사에서 동료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아이 왕따 걱정이라고 합니다. 대응을 고민하는 부모세대에게는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약간 다른 각도의 이야기인데, 청소년기에 갈등은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장통이기도 해요.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아픔도 필요하고요. 물론 왕따 문제 같은 경우에는 좀 섬세하게 바라 봐야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나 피해자나 ‘이게 고통이고 얼마나 힘들었다’와 같은 기억을 청소년기에 한번 충분히 품어볼 필요는 있어요. 아무 고통 없이 청소년기를 넘긴 사람은 오히려 성인이 됐을 때 위험합니다.
청소년기에 다양한 갈등상황을 경험하되 중요한 것은 각각의 상황에서 충분히 반성하고 성찰을 해야 된다는 거죠. ‘왜 고통스러웠나’, ‘나는 왜 이겨내지 못했나’, ‘이겨냈으면 어떻게 이겨냈나’와 같은 성찰을 충분히 자기의 영혼에 데이터베이스로 갖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비로소 성인이 됐을 때도 다른 이의 힘든 상황을 역지사지하고 똑같이 힘든 상황이 자기에게 닥칠 때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거든요. 부모세대는 왕따나 폭력 자체를 보는 대신 한걸음 물러서서 시련을 경험한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이를 성장의 경험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심도 깊게 고민을 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적인 자녀 사랑으로 인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부모도 있는데요. 최근 그에 따른 교권침해 등 심각한 장면이 많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전 좀 달리 보는데요. 세상에 이해 못할 문제는 없어요. 예를 들어 ‘자녀가 맞고 온 것 같다, 학교생활을 힘들어 한다’고 했을 때 감정이 앞서지 않을 부모는 없습니다. 그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거고요. 그것은 이해를 해드려야합니다. 물론 이해를 하는 것과 그 행동이 옳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죠. 그래서 감정은 이해하지만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생각할 수 있는 성찰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 내가 속상하고 분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이라면 필요하다고 봐요.
다만 문제해결까지 생각을 하고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하다는 거죠. 문제를 반드시 분노의 꼭짓점에 다다랐을 때 해결할 필요는 없거든요. 한걸음 물러서서 하루가 지난 다음, 객관적인 사실을 다 확인해 봐도 문제가 있다면 그때 제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분노가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가장 이성이 살아날 수 있는 시간에 문제를 바라보는 성찰의 여유가 필요할 것 같아요.
요즘 부모는 교육 수준이나 능력이 여러모로 과거 부모에 비해 월등하지만 오히려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서툰 느낌이 드는데요.
지식인이 많은 사회가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에요. 지식인들은 걱정을 사서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생기지도 않은 문제를 자꾸 생산해내는 거죠. 우리사회의 지적 수준이 올라가면서 오히려 너무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대비책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해야 우리 아이가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식으로 미리 예단하고 생기지도 않은 걱정 때문에 필요하지도 않은 스펙을 부모 스스로 상상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 사실, 교육이 없는 사회에서도 인류는 건강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발전을 지향하게 돼 있죠. 앞서 한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유를 갖고 삶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성찰입니다. 인류의 미래는 근본적으로 밝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철학을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알게 해 주는 학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식의 삶을 제안하시는지요.
단 사람은 사랑받아야 되요. 사랑받지 못한 영혼은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은 최대한 따뜻하게 이야기하고 들어 주려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따뜻한 사람은 잔인할 수도 있어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는 환자 비명에 개의치 않고 질병만을 바라보며 고쳐야 유능한 의사지 환자의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면 상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수도 있거든요.
철학자이자 교사로서 제 역할은 학생,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직면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욱 ‘이런 문제가 있다. 이것을 극복해야 인생에 성장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냉철하게 이야기해줍니다. 소크라테스도 사회가 직면하기 싫어하는 문제를 직면하게 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았죠. 누구든 자기의 단점을 지적하는 사람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한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은 그의 단점을 지적하는 사람이에요. 철학자의 역할이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현 정부의 지난 5년을 되짚어보면 4대강이나 용산참사, 언론통제 논란 등 갈등상황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이 참 많았는데요. 그런 상황 속에서 가장 크게 결여 돼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치료 중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것이 대증요법이에요. 팔이 쑤실 때 파스를 붙이고 다친 곳에 그저 약을 바르는 것이죠. 병을 치료하려면 원인을 해결해야 합니다. 통증이 어디서부터 근원하는지를 찾아내야 해요. 그런데 우리 사회 과거 5년간의 문제를 보면 이슈가 터질 때마다 그것에 대응하는데 급급했던 것 같아요. 제가 볼 때 지난 오년 동안 한번도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모습은 무엇인가’, ‘우리가 건설해야할 건강한 대한민국은 무엇인가’를 논의한 적은 없었건 것 같아요.
국민들은 오래전부터 정치인들의 투쟁적이고 이분법적인 화법, 말과 행동이 다른 사례 등을 보면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불편함을 느끼는 듯 한데요. 우리나라 정치권에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철학의 부재입니다. 국가적인 어젠다가 없다는 것이죠. 정치라는 것은 대개 깨끗하지 못한 과정이에요. 이해를 조정하고 시끌벅적한 여러 가지 갈등의 목소리를 잠재워야하기에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좋은 정치가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칸트의 이야기를 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지사지하는 사람, 내가 바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법칙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일하는 사람, 다수를 생각하며 합리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고려한다면 최고의 지도자를 가려 낼 수 있을 겁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문제 중 하나는 성폭력이나 묻지마 범죄 등의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 원인은 뭘까요.
사람들이 왜 말초적인 것에 매달릴까요. 왜 자신의 분노를 무조건 어느 대상에 표출하려고 할까요. 예를 들자면,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됐을 때 역설적이게도 유럽의 젊은이들은 열광했어요. ‘사회가 이제야 뭔가 심장 뛰는 변화가 시작됐구나’란 분위기였죠.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위축될 것 같지만 오히려 눈동자가 불타올라요. 이를 묻지마 범죄나 말초적 쾌락을 쫓는 범죄가 늘어나는 상황에 대입해보면 우리시대가 지향해야할 열망이 무엇인지, 역사적 과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거죠. 즉, 국민들의 역사철학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 같아요. 차세대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 그것이죠. 경제문제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리가 나갈 길은 어디인지를 제시해야 합니다. 국민들에게 영혼을 심어주는 일이어야 할 거예요.
우리나라의 오명 중 하나가 자살률 1위, 자살공화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부나 사회에서는 자살률을 낮추려는 노력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게 현실인데요. 과거보다 세상은 더 좋아졌다고 하는데, 자살률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요.
이미 에밀 뒤르켐이 1백년도 전에 ‘자살론’을 통해 자살의 원인을 명쾌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한가지 뿐 이예요. 외롭고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죠. 공동체가 없어지고 모든 것을 자기 혼자 책임져야하는 상황에서 자살의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면 거짓말이에요. 영장류, 인간은 공동체가 필요하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 의지할 곳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전부다 주변에 있어야 해요. 그러나 우리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깨지고 있기 때문에 자살도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
점점 더 외로운 사회가 되어가는 게 문제군요.
그렇죠. 그래서 우리 시대에 가장 큰 과제는 커뮤니티의 재건인 것 같아요. 산업화사회가 공동체를 와해시켰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다시 회복시키는가가 우리시대에 가장 큰 과제에요.
최근 뉴스를 보면 국민 10명중 1명이 소송이 휘말리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소송공화국’이라는 자조적 표현까지 등장했는데요. 법치국가에서 법리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사소한 소송이 많아지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회는 세단계로 발전한다고 봅니다. 가장 밑바닥은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회, 그 위 단계가 이성과 합리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죠. 마지막 세 번째는 공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라고 봐요. 우리 사회는 이제 폭력에서 벗어나서 이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계까지는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이성이 과연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에요. 제가 봤을 때는 이것은 말로 하는 검투사 시합일 뿐이거든요. 승자와 패자가 있고 패자는 다시 원한을 품고 갈등이 반복됩니다. 정말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공감의 사회,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봐요. 우리사회는 이해의 사회에서 공감의 사회로 나가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도기라고 말씀하시지만 굉장히 많은 걸림돌이 존재하고 있고, 그 중에 권위주의나 기득권 문제도 심각한데요. 이에 대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문학자로서 저도 문학과 역사, 철학을 모두 공부하는데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에요. 한 사회에서 기득권의 벽이 강고해지고 신분의 벽이 고착되는 순간에 희망의 길도 열리거든요. 그게 반복돼요. 조선조가 600년 동안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의 임금들이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역사를 공부하고 과거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 덕분이었죠.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일상의 노력이 사회에 건강함을 이끌었다고 봐요. 우리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이미 정답은 주어진 것 같아요.
이제까지 말씀을 종합하면 사회가 복잡해지고 갈등이 많을수록 생활 속에 철학이 흐르는 사회가 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삶의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
삶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괴롭습니다(웃음). 잠깐의 쾌락이 있지만 90%는 힘들고 외로운 과정이에요. 또한 쾌락의 순간을 만끽하려면 고통의 순간도 거쳐야하죠. 삶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다 지나가게 돼 있어요. 삶이 힘들다고 하는데 역사상 세상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내가 내 인생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삶의 여러 가지 도전을 즐기는 자세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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