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고 싶은 상대가 나타난다면” - 심윤경 『사랑이 달리다』
“혜나는 제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일을 해치우죠”
“왕도는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분이 이런 얘길 해줬어요. 답은 내 안에 있다. 바깥에서 해결책이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무너지면 대가를 치를 사람도 나고, 헤쳐나갈 사람도 나인 거죠. 주체가 나라는 걸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인식하고 나면,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겠다는 투지가 생길 거에요.”
늘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겠다
남매는 사 인승 빨간색 오픈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속도계의 눈금이 꿈결같이 시속 백육십 킬로미터를 넘어섰다.(...) 나는 다시 한번 와인 잔을 채웠다. 빨간색 컨버터블은 여섯 대의 자동차를 단숨에 제치며 올림픽대로로 접어들었다. 곁에는 검은 한강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비가 툭툭 떨어지고 남매는, 머리가죽이 통째로 벗어져 날아갈 것 같은 바람에 맞서 오픈카의 뚜껑을 연다. (튜닝한 차량이라(!) 열린다.) 『사랑이 달리다』는 강렬한 첫 장면으로 달린다.
2002년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심윤경 작가는 『달의 제단』 『이현의 연애』 등의 소설과 『화해하기 보고서』 『슈퍼스타 우주 입학식』 등의 동화를 썼다.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성장 소설이다.
“엄마, 나 어떡해. 나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쓰나미에 휩쓸린 것 같아. 몸부림친다는 게 아무 의미도 없어. 너무 빠르고, 너무 거대해. 엄마, 그 사람만 보면 아무 생각도 안 나. 정말로 아무 생각도 안 나. 그 사람이 나를 보면서 웃기만 하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다른 건 어떻게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엄마, 어떡해. 나 어떡해.” | ||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2008년에 마지막 장편 『서라벌 사람들』을 내고 슬럼프를 겪었던 것 같아요. 아무리 자리에 앉아도 글이 써지지 않는 시간이 있더라고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겠다는 몸부림을 오랫동안 하다 『사랑이 달리다』가 나왔어요. 저에게 돌파구가 되어주고, 다시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을 준 고마운 작품입니다.
슬럼프라는 시간을 통과해 내셨는데요. 이제는 그때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뭔가 좀 우울했어요. 새 작품을 낼 때마다 독자들을 만나고 싶은 열망이 불타오르잖아요. 그게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남 탓을 하는 거라 부끄러운데요. 『서라벌 사람들』 같은 경우 제가 굉장히 아끼는 작품이었는데, 정확히 광우병 파동과 같은 시기에 세상에 나왔어요. 사회 문제에 파묻힌 신작이었는데, 이게 첫 경험이 아니었거든요. 제 등단작은 2002년 7월, 전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었을 때 나와서요. 그런 게 타격이 되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불운하다고 느꼈어요.
『사랑이 달리다』는 『이현의 연애』에 수록된 단편이 확장된 소설인데요. 어떻게 장편으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었어요. 끝내고 나서도 자꾸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 남매가 그날 밤, 미친 듯이 달리고 나서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다가 다른 요소들이 결합하면서, 쓰게 되었어요.
혜나 캐릭터가 읽으면서 참 즐거웠어요. 작가님에게도 특별히 의미 있는 인물이었을 텐데요. 혜나와 달리면서 기분이 어땠나요?
집시풍에 어디 얽매이기 싫어하고 철없는 자유로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사려 깊은. 그런 튀는 특성이 있는 아이에요. 혜나 자체가 굉장히 활력 넘치는 인물이라 작가의 말에 썼던 내용은 진심이에요. 혜나는 제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자기 뛰고 싶은 대로 뛰어다녀요. 혜나가 자기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계발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 그녀의 환경의 영향이었겠죠. 혜나가 성장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다스리고 긍정적으로 발휘하는 방법을 배워나갈 수 있기를 저도 기원하는 마음이에요.
해나랑 달리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했나요? 남편이 있는 혜나가 아내가 있는 의사 선생님과 사랑에 빠지는데, 일종의 금기를 넘는 데에는 어렵지 않았나요? 혜나와 달려서 닿은 종착역은 마음에 들었나요?
그 부분이 혜나와 제가 제일 대립했던 부분이에요. 제가 이 소설을 쓸 때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생각이 전혀 아니었어요. 혜나가 이 모든 플롯을 뽀개 버리고 달리기 시작했고, 거기에는 혜나와 저만이 공유할 수 있는 회한이 있어요. 저도 혜나를 말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혜나도 달려야 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 이유는 아마 이야기가 더 이어지면 좀 더 공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저지른 대가가 무엇인지도 아실 거고요. 지금 『사랑이 달리다』 2권을 쓰고 있어요.
“혜나는 제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일을 해치우죠”
혜나는 여행을 싫어하잖아요? 작가님도 여행을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그 부분을 읽으며, 혹시 혜나는 작가님의 분신일까 싶었어요.(웃음)
그럼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제 모습, 저의 하이드 씨에요.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는데, 그녀 스스로 개성을 갖춰 가더라고요. 그녀의 언어 습관이나 사고방식이 상당 부분 저를 닮았어요. 이 소설의 혜나는 거의 심윤경의 하이드 씨로 등장해서, 제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많은 일을 해치우죠. 저와 혜나와의 관계는 혈맹이에요. 제가 쏟아붓는 애정이라든지 교감하는 방식이 이전의 주인공들과 많이 달라요.
작가님과 혜나는 같은 나이죠? 작가님이 인물에게 가진 애정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10년 전, 스물아홉 때 작가님은 어땠나요?
저는 그때 아이를 낳았어요. 모성으로서의 자아가 작가로서의 자아보다 훨씬 먼저 자리를 잡은 거죠.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는 게 저에게는 급선무였어요. 서른아홉이 되면서, 아이도 앞가림할 수 있는 열 살이 되었고, 비로소 제 작가로서의 자아가 제일 앞에 서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미친 듯이 일하는 거 보면, 무언가 들린 것이 있는 거요.”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작가님은 글쓰기의 어떤 매력에 그렇게 들렸나요?(웃음)
들리도록 일 안 해봤어요.(웃음)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보지 못했다는 게 저의 회한일 거예요. 저는 언제나 안전한 선택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제가 혜나한테 배운 거에요. 이거 생각하고 저거 생각하면, 가장 안전한 길로 가봤자 쉽지 않다.(웃음)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나, 거기서 해결은 시작된다
대학 때 분자생물학을 전공하다 벤처 회사에서 일하셨죠. 그러다 글을 써야겠다고 일을 그만두시고 작가로 데뷔하셨는데, 이력을 보니 그다지 안정을 찾아 움직인 것 같지는 않은데요.(웃음)
생물학을 좋아했는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나 스스로에게나 생물학계에나 좋을 일이 없다는 정직한 자기 고백이었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더 잘할 수 있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어렵게 어렵게 방향 수정을 했어요. 이걸 해도 잘되고 저걸 해도 잘되는 케이스는 아니었어요.(웃음)
이과 공부를 하면서, 정말 글을 써야겠다 생각한 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나요?
제가 어릴 때부터 소설가의 꿈을 꿔본 적은 없었지만,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은 굉장히 좋아했어요. 저는 제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과생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이과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니까 저는 과학을 좋아하는 문과생이더라고요. 다만, 어떤 종류의 글을 쓸 것이냐. 무엇을 쓸 것이냐. 하는 것은 처음부터 명확했어요. 처음에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로 만족했어요. 10년 정도 글을 써보니까 이제야 알 것 같은 몇 가지 저의 컬러가 있더라고요. 재미있으면서 따뜻한 이야기. 그게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에요.
집에 돌아와서 씻고 늦은 밤에 다시 앉아 글을 쓰게 만든 동력은 뭐였을까요?
연애 기간이었다고 할까요? 힘들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퇴근을 빨리해야지 생각했어요. 내가 등단을 하고 싶다든지, 직업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내가 끝까지 쓸 수 있을까 없을까 궁금했어요. 이게 소설이 될까 안될까 반신반의하면서도 물음표 꼭대기에서 써내려 간 글이라, 한 줄 한 줄이 짜릿했어요. 한 페이지 쓸 때마다 ‘우와 내가 오늘도 한 페이지를! 이러다 끝도 내겠다. 이러다 소설 되겠다.’ 하면서 즐거워했어요.
자기의 기반이 무너졌을 때, 혜나의 식구들은 참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해결해나가는데요. 작가님은 어떻게 다시 일어서나요?
왕도는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분이 이런 얘길 해줬어요. 답은 내 안에 있다. 바깥에서 해결책이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무너지면 대가를 치를 사람도 나고, 헤쳐나갈 사람도 나인 거죠. 주체가 나라는 걸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인식하고 나면,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겠다는 투지가 생길 거에요.
달리기는 대가를 치룹니다
진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제대로 달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나?
사실은 환경이 제일 크다고 생각해요. 나는 멈추려고 해도, 주변에서 한번 밀고, 또 밀려서 몇 발짝 가고. 사람들은 그렇게 달리게 되는 게 보통인 것 같아요. 자신의 의지는 3분의 1 정도고 나머지는 자기 손이 닿지 않는 부분에서 이뤄지는 거죠.
소설가로 계속 달려서 무엇을 얻고 싶나요?
나의 독자들을 얻고 싶습니다. 지금도 좋은 독자들이 많이 있는데(웃음) 더 많은 독자를 만나고, 제 소설이 그들을 더 즐겁게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소설과 내가 함께 있는 것, 그거면 되요. 내가 계속 앞으로 쓸 수 있고, 내가 쓴 소설에 앞으로 만족할 수 있으면 그 이상 행복한 삶이 없을 것 같아요.
작가님.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요? 마음을 분별하는 방법이 있다면?
혜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보다 동경의 마음이 큰 거죠. 사람이 누군가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행동은 아니거든요. 자기의 의지나 능력 바깥의 일들이 혜나를 밀기 시작합니다. 원장님이 갑자기 비정규직 직원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혜나는 상상하지 못한 일에 휘말리게 되는 거죠. ‘이건 위험해’ 판단하기도 전에 일은 일어납니다.
혜나를 동경하는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혜나의 달리기가 달콤한 것, 재미있는 것만 따라서 달리는 건 아니에요. 모든 달리기는 대가를 치러요. 하지만 대가를 치를 게 무서워서 달리지도 않는 우리의 현재 모습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모든 걸 다 집어던지고서라도 달리고 싶은 상대가 나타나면, 그것은 불행이기도 하고 행복이기도 할 겁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제7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고 『달의 제단』으로 제6회 무영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아온 작가 심윤경의 새 장편소설. 부모의 황혼이혼으로 펑펑 써대던 아빠 카드도 사라지고, 난생처음 돈을 벌게 된 서른아홉 살의 혜나. 그녀의 미치광이 가족들과 그녀를 사랑하는 두 남자, 우리를 만만하고 시시하게 대할 뿐인 화려하고 도도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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