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사업의 허구를 시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다” - 안도현『북항』
삶이라는 길 위에서 이정표가 된 시(詩) 4년 만에 열 번째 시집 발표, 안도현 시인을 만나다 “오랜만에 현실 문제를 시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고민했다”
안도현 시인의 시는 함축의 언어로 시대를 투영해왔다. 등단 이후 28년, 오래전 치기 어렸던 문청(文靑)의 시는 1980년대 엄혹한 시대를 거치며 현실 문제를 고민했고, 다양한 시도와 진화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열 번째 시집인『북항』을 발표하기까지 4년의 고민과 지난 시절의 기억, 오늘날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안도현 시인(@ahndh61)의 시는 함축의 언어로 시대를 투영해왔다. 등단 이후 28년, 오래전 치기 어렸던 문청(文靑)의 시는 1980년대 엄혹한 시대를 거치며 현실 문제를 고민했고, 다양한 시도와 진화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열 번째 시집인『북항』을 발표하기까지 4년의 고민과 지난 시절의 기억, 오늘날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일까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특별한 사건이 있다기 보다는 매순간 만나는 것들, 아주 작은 경험들이 모두 크고 작은 사건이죠. 문학이라는 것은 작은 경험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인데, 제 경우는 어쩌면 큰 사건 없이 너무 평이하게 살아온 게 약점이라면 약점이 아닐까 싶네요(웃음).
등단 당시 시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 첫 시집은 스물 다섯 살 무렵에 나왔어요. 보통의 경우보다 빠른 셈인데, 1980년대 20대를 보내며 제가 했던 고민은 온통 ‘문학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사회 현실하고 어떻게 만날 수 있나’였어요. 가능한 현실 속으로 문학을 근접시키려고 했던 것이 30대까지 였죠. 그런데 그때까지 크게 관심을 가졌던 거대 담론들, 이를테면 민주화, 통일, 노동의 문제와 같이 우리사회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이 어느 순간에는 굳이 시로 쓰지 않아도 되는 시기를 맞이하더군요. 어느 정도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이뤄지던 시점과 맥을 같이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 현 정부 들어와서 잊고 지냈던 시인의 역할을 다시 고민하게 만들더군요. 그런 점에서는 MB정부한테 감사해야겠죠(웃음).
1980년대 젊은이들의 삶은 꽤 투쟁적인 경우가 많았는데,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셨나요.
1980년에 전 대학 1학년이었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대학 내에서도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어요.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됐죠. 저는 직접 학생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문학 속에서 현실을 어느 정도까지 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지냈죠. 1980년대 후반에는 교사로 있으면서 전교조가 창립됐고, 교직에서 해직되는 경험도 해보고……. 그랬죠.
기억에 남는 사건이 없다고 하시지만 그런 것들이 사건이네요.
그러네요(웃음). 좀 오래된 일이지만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직된 경험은 단지 교육 운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제가 아는 문학과 시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가를 경험해 본 시기이기도 했어요. 해직 당시를 떠올리면 우선 먹고 살 일이 막막해 힘들긴 했지만 한편으로 제게는 제일 뜨거운 시기였고 그래서 더 달콤했던 시기가 아닌가……. 돌아보면 그런 생각도 듭니다.
시인들은 ‘시가 온다’는 표현을 많이 쓰시는데요. 당시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셨나요.
그때 저는 ‘내가 살아가는 삶과 내 시가 일치하면 좋겠다’는 꿈을 꿨어요. 그렇게 꿈 꿨던 과정이 제 문학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인이 자신의 삶과 시를 완벽하게 일치시키긴 힘들겠죠. 단지 그 과정 속에서 시도 앞으로 갈 수 있었고, 제가 살아간 삶도 아주 속된 것으로 전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시와 인생이 서로 견제를 하는 관계였죠.
과거의 선생님의 작품과 행적을 두고 ‘민중시인’으로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회참여적인 태도로 살아오신 것은 맞지만 정작 선생님께서는 마뜩치 않아 하는 표현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20대에 누군가가 ‘민중시인’, ‘민족시인’이란 말을 농담 삼아 붙인 것을 보고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민중이나 민족을 위해 시를 쓴 것은 아니에요. 시인이라는 말 앞에는 다른 수식어가 붙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시인은 시인이라는 것에 족해야 하고 거기에 충실해야죠. 어떤 말이 붙게 되면 ‘시인 안도현’이라는 말 보다 훨씬 폭을 좁히는 것 같아요.
「북항」이라는 시가 포함 돼 있긴 하지만 시집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 취향상 제목을 길게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웃음). 북항이라는 항구는 실제 부산에도 있고 목포, 인천 등 여러 지역의 항구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그러나 한편으로 ‘북(北)’이라는 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 이상의 복잡한 느낌을 함유하고 있는 것 같아요. 북한을 떠올리는 경우도 있고, 달아난다. 패배한다, 배신한다와 같은 여러 가지 의미와 상징들……. 이런 것을 잘 비벼진 비빔밥같이 한편의 시집으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 중에는 유독 눈에 띄는 시가 있는데요. ‘명궁’이라는 시에서 ‘팔짱을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들’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지요.
방관자나 관찰자의 자세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현실에 대해 말해야할 것들이 아직 많은데, 그것을 보고도 방관하거나 멀리서 관찰하는 이들을 꼬집고 싶었죠.
명궁 천리 밖 허공을 날아가는 새의 심장을 맞춰 떨어뜨릴 줄 아는 名弓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해를 쏘아 서산 너머로 떨어뜨 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뜨는 보름 달을 쏘아 허공에 먹물을 칠하 고 한 달에 한 번씩 여자를 쏘아 피를 흘리게 하고 일 년에 한 번 씩 이 세상의 모든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쏘아 시간을 떨어 뜨릴 줄 알았다 별은 그의 화 살이 날아가 꽂힌 자국들이었 다 신은 뿔이 났다 허공에 송 송송 구멍을 내는 그가 괘씸하 여 신은 다시는 활을 쏘지 못 하게 그의 두 팔을 잘라버렸다 그때부터였다 팔짱을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들이 생 겨난 것은 그들이 한때 名弓이 었다는 말이 있다 | ||
‘강’과 같이 최근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듯 한 느낌의 시도 있었는데요. ‘4대강 사업’을 떠오르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4대강 사업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한 것이 사실이에요. 그 허구를 어떻게 시를 통해 드러낼 것인지 고민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구호가 아닌 미적형식,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스며드는 방식을 생각했는데 그게 잘 안됐네요(웃음). 결국 날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 거죠. 실패라기 보단 아쉽고 미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네요.
강 내가 강에 나갔을 때 강은 삐걱거렸다 허리가 시큰하다 하였다 나는 보았다, 강에 나갔을 때 통속한 굴삭기와 식탐 많은 덤프트럭이 오래오래 잘 늙은 강의 허리를 파먹기 시작하는 것을 강은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되었고 흐르지 않자, 엎드리게 되었고 엎드리자, 강의 뱃가죽에서 네 개의 발이 생겨났고 그리하여 개처럼 기어다니는 강이 되었다고 하였다 내가 강에 나갔을 때는 저녁이었고 강은 어스름 속에서 컹컹 짖었다 (후략) | ||
옛 선인들의 해학이 담긴 듯한 시도 종종 눈에 띄었는데요.
이번 시집은 화자의 말투를 바꿔보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요 몇 년 간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 중에 옛날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쓴 글들을 참고했죠. 정약용, 이덕무, 박지원 같은 분들이 써 놓은 글을 보면서 ‘번역투의 문체를 시에 활용해보자’ 생각했어요. 고전 번역투가 가지고 있는 약간은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깐깐한 선비의 목소리를 이런 고어체가 대신해 줄 수도 있겠다 싶었죠. 예를 들어 ‘설국’이라는 시가 그렇죠.
설국 1 첩첩산중이라 했다. 산비탈 참나무는 눈보라의 멱살을 잡 고 부르르 떨고, 대숲은 눈보라가 쓰고 온 푸른 관을 이마 로 들이받고, 으름넝쿨은 눈발을 거머잡고 울고 있다고 했 다. 호랑이 사냥에 나선 포수들이 급히 보내온 서찰은 눅눅 하였다. 눈보라는 한성부 북악 쪽을 폐허로 만들겠다는 듯 악을 써댔다. 야음을 틈타 남으로 도하하려는 백성들이 마 포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또 날아들었다. 2 서찰은 호랑이의 사살과 해체 과정, 향후 용도를 조목조 목 기록하고 있었다. 호랑이의 똥구멍에 정확하게 꽂힌 화 살촉이 몸을 관통해 주둥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했다. (중략) 4 그 다음날, 포수들이 하산하지 못했다는 전갈이 왔다. 아 침에 일어나보니 잡아놓은 호랑이는 온데간데없었고, 흰 고 양이 한 마리가 사지를 뻗고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통탄할 일이었다. 눈썹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보발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드는 칼로 눈 내리는 북악의 밑동을 싹 둑 잘라서 칼등 위에 올려서는 동해로 내던지라는 영을 내 렸다. 그리고 집안의 하인들에게 흰옷을 입고 모두 북악으 로 가서 거사를 거들라 일렀다. (하략) | ||
선생님이 시인의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은 어떠했나요.
저의 집은 면소재지에서 가게를 했어요. 방학 때면 외갓집이나 큰 집에 가서 살다시피 했죠. 그때의 자연과 마주한 체험은 은연중 몸속에 남아 있다가 시를 쓸 때 마다 툭툭 튀어나와 저 스스로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내가 촌놈으로 살 길 잘했구나’ 싶죠. 지금 제가 사는 전주는 큰 도시는 아니지만 그래도 문명이 준 혜택을 받고 살고 있어요. 그럼에도 제 시에서 도시를 쓴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자신 없는 일이죠.
고향이 경상도인데 현재 사시는 곳은 전라도입니다. 괴리감은 없나요.
그런 것은 없어요. 스무 살 즈음해서부터 전라도에서 살았는데, 어린 시절 경상도 고향의 원체험과 전라도에서 배운 현실감각이 저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에서 두 가지를 느끼기란 쉽지 않은데 시인으로서 복이 많은 것 같아요(웃음).
고교시절은 문예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때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죠. 문예반이 되면서 시를 즐겁게 많이 읽었고 학교 수업 빠지는 재미로 백일장에도 많이 나가 상도 탔죠. 그때 알게 돼서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분들이 많아요. 윤대녕 작가라든지, 고교 때 만나지 않았지만 전주에 남진우 시인 같은 분들은 문학을 같이 하는 비슷한 또래로 보이지 않은 경쟁관계였어요.
앞에서 잠깐 말씀 하셨지만, 고교시절을 거쳐 대학에 들어가면서 사회 현실을 대면했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나요.
1980년 5월 어느 날 부터는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어요.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휴교가 된 거죠. 저는 그때도 철없는 문청(文靑)이어서 밤에 친구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집을 놓고 소주에 새우깡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은 순찰을 돌던 계엄군에게 걸려 무릎 꿇린 채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죠. 온몸에 멍이 들고 피투성이가 됐죠. 하지만 그것도 제 문학에 괜찮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문학이라는 것이 나 혼자 하는 게 아니구나,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거구나’를 깨닫게 해준 경험이었죠.
요즘 강단에서 마주하는 제자들과 당시 선생님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어떠신가요.
제 세대는 문학이든 연애든,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시간들이었다고 봤을 때, 요즘 친구들은 자로 재면서 하는 것 같아요. 문학이나 연애나 현실적인 자로 재고 난 후에 하는 경향이 있죠. 물론 이런 소리 들으면 요즘 친구들은 싫어하겠죠(웃음).
요즘 세상이 겉으로는 많이 발달하고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하지만, 내적인 발전은 외면하고 있는 듯 한데요.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개개인의 성장이 없으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겠죠.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면 그런 내면적인 성장도 존재했기 때문이고요. 다만 개인의 내면적인 성장이 오롯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지 아니면 자기만이 아닌 외부로도 향해 있는 건지는 좀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에게 더 많이 투자하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인데, 더불어 함께 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게을렀던 것은 아닌가, 방치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네요.
과거에 비해 시가 대중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상황에서 시인의 한 분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원래부터 시는 일반 대중에게 많이 읽히는 양식은 아니었죠. 시보다는 게임이 더 재미있고, 영화가 더 끌리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문학의 한 장르이면서 예술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는 참 좋은 시인과 그들의 작품이 많은데, 독자들은 편식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하는 것처럼, 젊고 새로운 시인들의 다양한 시를 많이 접했으면 해요.
시를 통해 선생님께서 앞으로 이뤄내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제가 문학청년 시절부터 꿈이 하나 있어요. 누군가 제 시를 일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렸다’거나 ‘정신병원 신세가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거죠(웃음). 아직 없는 것을 보니 계속 써야 할 것 같아요.
올해로 등단 28년을 맞은 시인 안도현이 『간절하게 참 철없이』 이후 4년 만에 펴낸 열번째 시집. 총 63편의 시를 엮은 이번 시집은 안도현 시인의 시세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줄 뿐 아니라, 작금의 사회를 향한 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집을 여는 「시인의 말」에서 “~ 잘 되지 않았다” “~ 여의치 않았다” “~ 형편없다”는 말로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의 겸손함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일궈낸 것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관련태그: 안도현, 북항, 너에게 묻는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간절하게 참 철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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