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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야 한다

아카쿠치바 전설, 아카쿠치바 가문의 세 여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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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현재까지, 아카쿠치바 가문의 세 여인들은 각자의 시대를 살아간다. 아카쿠치바 만요의 1953년부터 1975년까지는 ‘최후의 신화시대’란 제목이 붙어 있다. 산에서 살아가는 ‘변경 사람들’이 마을에 내려왔다가 두고 간 아이 만요가 아카쿠치바 가문의 며느리가 되고, 전후의 부흥을 일궈내던 시기의 이야기다. 아카쿠치바 게마리의 1979년부터 1998년까지는 ‘거(巨)와 허(虛)의 시대’라고 칭해진다.

흘러가는 시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다가오는 미래도 막을 수 없다. 현세의 인간이란, 한정된 시간에 얽매인 존재다.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 타인이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아무리 후회스러워도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다른 시간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불공평하다고도, 무자비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나에게 행복의 시간, 평화의 시간은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냐고. 그러나 한 개인의 시간에서 벗어나 무한한 시간 속에서 바라본다면 달라진다. 시간은, 세계는 단지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오로지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문제일 뿐이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아카쿠치바 전설』에는 아카쿠치바 가문의 여성 3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쿠라바 카즈키는 라이트노벨로 출발하여 『아카쿠치바 전설』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내 남자』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특이한 이력의 작가다. 철저한 허구의 세계로 시작하여 점점 현실로 발을 딛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카쿠치바 전설』은 허구와 현실의 세계를 접합한 사쿠라바 카즈키 소설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려주는 작품이다.

1953년 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현재까지, 아카쿠치바 가문의 세 여인들은 각자의 시대를 살아간다. 아카쿠치바 만요의 1953년부터 1975년까지는 ‘최후의 신화시대’란 제목이 붙어 있다. 산에서 살아가는 ‘변경 사람들’이 마을에 내려왔다가 두고 간 아이 만요가 아카쿠치바 가문의 며느리가 되고, 전후의 부흥을 일궈내던 시기의 이야기다. 아카쿠치바 게마리의 1979년부터 1998년까지는 ‘거(巨)와 허(虛)의 시대’라고 칭해진다. 폭주족 리더였던 게마리가 인기 만화가로 변신하고,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시대를 통칭하는 제목은 따로 없는, 아카쿠치바 도코의 시대인 2000년대. 도코는 만요와 게마리의 시대를 반추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본질을 찾아가려 한다. 『아카쿠치바 전설』은 아카쿠치바 여성들의 연대기인 동시에 그들이 살아간 시대의 신화 이야기다.

만요는 가끔 미래를 봤다. 대부분 높은 곳에 있을 때였던 것 같다. 번쩍하면서 산산조각 나는 시체를 본 것도 젊은 부부의 남편이 목말을 태워줬을 때였다. 산에 오르거나 마을 부자들이 사는 언덕 위로 올라갈 때면 문득문득 만요의 눈앞에 미래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이 죽고, 태어나고, 큰 사고가 일어났다. 성도 없이 이름만 있는 만요는 그것을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만요는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본다. 본다고 한들, 닥쳐올 미래를 막을 방법은 없다. 만요에게 주어진 인생은 그런 것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홀로 마을에 남고, 운명처럼 제철소를 경영하는 아카쿠치바 가문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리고 시대는 요동쳤다. ‘전쟁이 끝난 후는 남자의 시대였다. 노동이라는, 남자들의 힘의 시대였다.’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건설해야만 전진할 수 있었던 시대. 하지만 남자들의 시대는 해악도 가져왔다.‘층층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람들은 앞 다투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의 목표는 오로지 성공이 되었고, 배금주의에 물들기 시작했다. 공해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오일 쇼크도 닥쳤다. 그러다가 60년대 말에는‘국가와 가족을 부정하는 시대’ 가 도래했다. 시골 마을에서 자라난 만요에게는 그 모든 것이 격동이었다. 아니 만요만이 아니다. ‘맨주먹 하나로 싸워온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 경치는 모두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신화는 끝났다. 열심히 달려가기만 하면 모든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만요의 딸 게마리는 폭주족 리더가 된다. 아이들과 함께 바이크를 타고 맹렬하게 질주한다, 싸운다. 싸움의 짱이 되기 위하여, 가식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또래의 즐거움만이 모든 것이었다. 미래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폭주야말로 청춘의 모든 것, 청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게마리 또래 소녀들에게는 사상도 없고, 사회라는 의식 또한 없었다. 그 또래 아이들은 재미없는 실제 사회를 보지 못하는 대신, 자신들만의 허구의 세상을 만들어 실제 세상 위에 덧칠했다. 불량문화는 젊은이들 공동의 환상이었다. 거기엔 막연한 천하 통일과 싸움의 지존이란 사상만 있었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그 중심 부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불타올랐다. 아무 것도 없으니까 더욱 열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마리는 거칠고, 열정적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만화가가 되고, 미친 듯이 만화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게마리가 살아가는 법은 오로지 싸우는 것뿐이었다. 청춘 시절에는 폭주족으로서, 성인이 되어서는 만화가로서. ‘게마리에게는 시대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 특유의 두 가지 오라가 뒤엉키며 뿜어져 나왔다. 그건 화려함과 동시에 그에 상반되는 죽음의 기색이기도 했다.’ 그러나 게마리는 현실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폭주족 리더를 그만두고 만화가가 된 것 역시, 또 다른 허구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게마리는 성공했고, 치열했지만 그것은 허(虛)의 세계였다.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비극.

엄마, 게마리는 결국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아이들의 픽션의 세계에서 쫓겨났지만 어른이 되지도 못한 중유(中有,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를 떠도는 혼…거인의 환영처럼 만화가 게마리는 아카쿠치바 가문에 군림했지만, 현실의 게마리는 허(虛)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치열하게 비록 허구의 세계와 싸우더라도, 싸울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게마리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게마리의 만화 편집자였다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아카쿠치바 가문에 객식구로 기거하는 남자를 보며 도코는 생각한다. ‘그의 지식은 지금보다 나은 삶과 지금보다 만족할만한 문화에 자신이라는 열차를 반드시 도착시키고 말겠다는 신념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우리 세대에는 없는 성질이었다. 우린 그런 감각을 전혀 몰랐다. 모든 것이 이미 종료된 이 나라에서 그냥 떠돌듯이 자랐다.’ 그 남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태연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이상이 있었고, 버블의 경험도 있었다. 도코의 세대는 다르다. 미래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세계의 어딘가가 이미 고장나버린 느낌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언제나 같은 곳에서만 멈춰 서 있을 것 같은 기분. 그 남자처럼 가만히 있다 해도, 결코 그 남자처럼 태평할 수는 없었다. 에너지가 멈춰버린 사회에서, 그들의 에너지는 내부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들끓고만 있었다.

많은 것을 견디며, 사회 모순과 체념을 받아들이며 떠돌 듯이 어른이 되어간다. 맑은 것과 탁한 것을 함께 마시며 어른이 되어간다. 세상에 나가면 시시한 매일매일과 영원히 싸워야 한다. 그런 일은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부모로부터 사회에서 살아나갈 힘과 각오를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힘든 일이야 어디 가나 있겠지만 그것에 상처받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자신감도 없어서, 그래서 도망치는 것이다.

채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인데 만요와 게마리와 도코의 시대는 너무나도 다르다. 하지만 어떤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도코는, 만요와 게마리의 시대를 되짚어본다. 그 시간들이 무엇이었는지, 그 시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하게 짐작하며 파고들어가 본다. 그리고 알게 된다. 만요와 게마리의 인생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들이 무엇을 얻었고 또 잃어버렸는지를. 시간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 동시에 얼마나 다정하고 풍요로운 것인지를.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이 세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공평하다.

환영해.
나는 울면서 속삭여보았다.
환영해. 환영해. 뷰티풀 월드에 온 것을. 고민 많은 이 세상에. 우리는 같이 앞으로도 계속 살아나갈 것이다. 세상은, 그렇다,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야 한다.




◆ 작가의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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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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