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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남녀가 만나자 마자 댓바람에 합방 하냐고요?

조선 노는 남녀의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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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술잔에 술 따르는 소리와 옥 같은 미녀의 치마 벗는 소리 중에 어느 소리가 더 좋은지 묻고 있습니다. 당연히 달빛 어둑한 삼경에 치마 고름 푸는 소리겠지요.

미인을 그려도 웃는 표정이 없다면 그 미인도는 속없는 송편이요, 초콜릿 빠진 브라우니입니다. 우리 옛 그림에 나오는 미인이 꼭 그 짝입니다. 혜원 신윤복이나 혜원을 흉내 낸 후대 화가들의 미인도를 떠올려 보세요. 이상하게도 웃음기 머금은 얼굴이 드뭅니다. 유명한 혜원의 「미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세히 보면 변비나 치질에 시달리는 안색이에요. 참 희한한 일이지요. 미인이랍시고 그려놓은 그림들이 무표정하거나 수심 그득한 낯빛이 대다수이니 말입니다. 웃음이 헤픈 것을 경계해서일까요, 아니면 애조 띤 모습이 더 어여뻐서일까요. 눈살을 찌푸려도 서시(西施)는 서시겠지만 미색의 너그러움은 미소에서 나오는 게 분명합니다. 이 선생의 웃는 얼굴을 보면 알지요.

웃고 있는 「미인도」 하나를 찾았습니다. 혜원 풍으로 그렸지만 혜원의 작품은 아니고, 조선 그림이지만 아쉽게도 도쿄국립박물관의 소장품입니다.

작자 미상, 「미인도」, 종이에 담채, 1825년 무렵,
114.2x56.5cm, 도쿄국립박물관

어떤가요, 얹은머리가 칠흑처럼 윤기 나고 배시시 웃는 입술이 남자 마음을 녹일 듯하지요. 희디흰 손에 꽃송이를 든 포즈는 더욱 고혹적입니다. 어깨는 가냘프고 소맷부리는 꽉 조여드는데, 쪽빛 오른치마에 감아 올린 주름선 사이로 안감이 비쳐 아찔하네요. 저 항아리 같은 치마 펼치면 굽이굽이 열 폭입니다. 삼회장 노랑저고리 좀 보세요, 고작 한 뼘이나 될까요. 도련 아래로 고름이 팽팽할 만큼 젖가슴이 부풀었는데, 사이즈로 따져 70에 C컵입니다. 서양화 많이 본 이 선생은 어떨지 몰라도 이 여성이야말로 조선의 팜므 파탈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가 아닐까요. 신분이야 당연히 기생이죠. 반가 규수를 그려놓고 시시덕댈 수는 없던 시절이니까요.

그림 속에 시가 있네요. 시 제목 역시 ‘미인도’입니다. 16세기 무렵 관노(官奴) 출신으로 시 잘 짓던 어무적의 칠언시를 베꼈습니다.

잠깨어 문 나서니 찬 기운 감돌고
치렁한 머리에 홑적삼이 얇은데
정은 눌러도 봄이 늦을까 걱정이라
꽃가지 꺾어들고 혼자서 본다네.


싸늘한 날씨에 봄이 늦장 부리자 여인은 한 송이 꽃을 꺾어 봄을 불러냅니다. 어디 봄만 유혹할까요. 저 기생이라면 능준히 아양을 떨어 남정네를 호릴 만하지요. 기생을 속된 표현으로 ‘노는 계집’이라 하는데, 노는 사내가 그녀와 더불어 벌이는 수작이 옛글에 아주 흔해요. 표정이 요사스럽지 않아도 저 기생의 자태는 색정이 물씬 풍깁니다. 영조 시절 노래꾼인 김수장은 이런 여인에게 된통 당한 모양입니다. 그의 시조가 있어요.

속저고리 고은 때치마 민머리에 분때 민 각시
엊그제 날 속이고 어디가 또 눌을 속이려 하고
석양에 꽃가지 꺾어 쥐고 가는 허리를 자늑자늑 하느냐.


교태에 녹아난 사내의 씩씩거리는 푸념이 들리는 시조입니다. 그런가 하면 목소리를 낮추며 숙덕질하는 사내들도 있었지요. 그들은 기생의 옷차림을 곁눈질하며 농지거리합니다.

금준(金樽)에 주적성(酒滴聲)과 옥녀(玉女) 해군성(解裙聲)이
차양성지중(此兩聲之中)에 어느 소리 더욱 좋으리
아마도 월침삼경(月沈三更)에 해군성(解裙聲)인가 하노라.


금 술잔에 술 따르는 소리와 옥 같은 미녀의 치마 벗는 소리 중에 어느 소리가 더 좋은지 묻고 있습니다. 당연히 달빛 어둑한 삼경에 치마 고름 푸는 소리겠지요. 이 선생, 몰랐지요? 노는 사내들의 작태가 무릇 저렇습니다.

오늘 제 글의 소재가 ‘노는 남녀들의 수작’입니다. 수작은 ‘대거리’인데, 시쳇말로 ‘작업’이라지요. 이 선생 인품에 흠이 될까 두렵습니다만, 운을 뗀 참에 옛적 놀아본 남녀들이 무슨 농탕한 짓거리를 했는지 들어보실래요? 작자 미상의 「선비와 기녀」를 봅니다. 모티프나 필세(筆勢)가 신윤복을 빼닮은 그림입니다.

작자 미상, 「선비와 기녀」, 종이에 담채, 19세기, 19.5x33cm, 개인 소장

엄격한 전문가들이 그래도 신윤복 작품은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등장인물들의 자태는 신윤복의 다른 그림에 그대로 나옵니다. 아마 후대 화가가 판박이 했겠지요. 얼른 보면 전통무용이나 뮤지컬 장면 같습니다. 두 남녀의 맵시가 그렇지요.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의 포즈가 떠오릅니다. 선비의 날리는 두루마기 자락은 멋이 넘칩니다.

‘영웅본색’ 따위의 홍콩 느와르에 나오는 주인공을 닮았지요. 부채를 든 손으로 갓을 바로잡는 사내는 주머니를 두 개나 찼습니다. 하나는 향을 넣은 주머니인데, 멋쟁이에 한량 기질이 다분한 차림입니다. 여인은 전모를 썼지요. 전모는 지삿갓을 말하는데 삿갓 모양의 대나무 테두리에 기름 먹인 종이를 바른 나들이용 모자입니다. 갓끈과 전모끈, 두루마기와 치마가 한 방향으로 나부낍니다. 교차하는 남녀의 시선에서 사랑의 인력(引力)이 문득 생각납니다.

여기까지 별일 없습니다. 그저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지 노골적인 ‘작업’으로 나아가진 않지요. 그 다음 벌어질 장면이 궁금한가요. 선조대의 문인 임제와 기생 한우(寒雨)의 대거리를 슬쩍 빌려 올게요. 한우의 이름 뜻이 ‘찬 비’라서 임제는 이렇게 눙칩니다.

북천(北天)이 맑다 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 비 온다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얼어 자다’에 진한 속뜻이 있지요. 바로 ‘남녀 교합’입니다. 한우가 어이쿠, 한 술 더 올립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원앙침은 부부가 베는 베개요, 비취금은 비취를 수놓은 이부자리입니다. 이불이 따뜻해서 몸이 녹는 건 아니겠지요. 놀아도 이리 놀아야 잘 논다는 소리 듣습니다. 밤새 운우지정을 나눈 남녀가 헤어질 때는 또 무슨 수창을 벌이는지 아십니까. 여자가 말을 타고 돌아가고 남자가 문밖에서 배웅한다 칩시다. 남자는 섭섭한 마음을 담아 한 수 내뱉지요.

혼이 그대를 따라가 버리니
텅 빈 몸만 대문에 기대네.
魂逐行人去
身空獨倚門


여자는 말 위에서 돌아봅니다. 그리곤 나직이 되받습니다.

나귀가 더뎌 내 몸 무거운 줄 알았더니
하나가 더 실려 있었구려, 그대의 혼
驪遲疑我重
添載一人魂


아니, 무슨 남녀가 만나자 마자 댓바람에 합방 하냐고요? 그러고 보니 좀 점잖지 못한 ‘원 나잇 스탠드’로군요.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이제 나이 하나만으로도 축복받은 청춘들의 야유회로 떠납니다.

‘놉세다 놉세다 젊어만 놉세다~ 나이 많아 백수(白鬚)가지면 못 놀리라~ 인생 한번 돌아가면 만수장림(萬樹長林)에 운무(雲霧)로다~ 청춘홍안을 아끼지 말고 마음대로 놉세다~.’ 서도잡가 중에 수심가 첫 대목이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것과 딱 맞는 그림이 신윤복의 「연소답청(年少踏靑)」입니다.

신윤복, 「연소답청」, 종이에 채색, 18세기, 28.2x35.6cm, 간송미술관

‘젊은이가 푸른 풀을 밟는다’는 제목이 퍽 목가적이지요. ‘답청’은 봄날의 나들이를 말합니다. 말 시중을 드는 하인을 빼고 세 쌍의 남녀가 주인공입니다.

뒤편 행렬부터 볼까요. 왼쪽 끝에 온 상을 찌푸린 채 채찍을 든 맨상투의 사내는 말구종입니다. 말고삐를 잡고 길잡이 해야 할 치가 어인 일로 남의 갓을 들고 있네요. 오른쪽 끝에 선 사내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갓을 맡기고 말구종의 벙거지를 빌려 썼지요. 알 만하네요. 세 한량들 오늘 기생들에게 선심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자기들이 탈 말을 기생에게 내주고 고삐 잡이를 자청하는가 하면 담뱃대까지 가져다 바칩니다. 기생들 신이 났습니다. 머리에 진달래를 꽂고 담배를 피우는 기생, 사내가 바치는 담뱃대를 미안한 듯 머리 긁적이며 받아드는 기생, 오늘만큼은 번듯한 가문의 아씨가 부럽지 않은 표정입니다.

사내들은 서울 장안의 귀족 집안이 분명합니다. 입은 옷들이 최첨단입니다. 푸르고 붉은 주머니에 또 푸르고 붉게 누빈 속옷, 긴 띠를 드리우고 짧게 행전을 친 입성에서 놀아본 한량의 감각이 엿보입니다. 바깥에 걸친 창옷으로 또 다른 멋까지 부리네요. 앞 두 폭을 뒤로 돌려 묶어 꼬리처럼 매달았어요. 한 가닥 하는 패션 리더가 틀림없습니다. 기생의 차림새도 모던하지요. 버들 같이 가는 허리에 동여맨 긴 치마 말기 고름, 등자에 살짝 얹은 외씨 버선과 신발이 들뜬 봄날의 호사 넘치는 행장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앞쪽의 세 사람은 어떻습니까. 말 모는 아이가 너무 달렸는지 따라오는 사내의 갓이 벗겨지고 기생의 장옷이 펄럭입니다. 뒤늦게 아차 싶은지 아이가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네요. 포르쉐 오픈카에 올라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한 한시절의 야타족이 결코 부럽지 않은 조선 남녀의 황홀한 데이트입니다.

놀기 좋아하는 남녀들의 수작, 보고 듣기에는 다 호기롭습니다. 하여도 마냥 그렇지는 못하지요. 메뚜기는 한철이고 열흘 붉은 꽃도 없습니다. 시끌벅적한 놀음놀이판이 끝나고 돌아서면 가득 찬 것은 회한이요, 텅 빈 것은 주머니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조선 한량에게는 마마 호환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지요. 바로 정실입니다. 귀가한 남편의 행색을 두 눈 부릅뜨고 살피지요. 정조 연간의 시인 이옥은 정실의 눈썰미를 기막히게 표현했습니다.

술만 마시고 왔다지만
기생과 논 줄 나는 알아요
어찌하여 두루마기 소맷자락에
꽃처럼 연지가 물들었나요.







이 선생에게도 진작 밝혔듯이 저는 일생일업(一生一業)이 음풍농월입니다. 누가 묻더군요. 어찌하면 오래토록 풍월을 즐길 수 있냐고 말입니다. 제가 답했지요. 정실을 두지 않는 게 아니라 연지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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