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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처럼 살던 ‘앙드레브루통’, 불현듯 낯선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일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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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잘 즐길 줄 알고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할 줄 아는 사람에게 일탈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일상탈출에 불과할 뿐이지요.

평소에 잘 즐길 줄 알고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할 줄 아는 사람에게 일탈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일상탈출에 불과할 뿐이지요. 제대로 된 일탈은 공부밖에 모르던 학자가, 규칙을 철칙으로 알던 회사원이, 가정의 완전한 일부로 살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겪게 되는 것이지요. 저라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손 선생님. 저는 제법 생각이 유연하고 탄성이 있다고요!

아무래도 그림으로 보여드리는 게 좋겠군요. 바로 이런 사람 말이에요. 이탈리아의 화가 아르킴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93)가 그린 「사서」라는 작품입니다.

주세페 아르킴볼도, 「사서」, 캔버스에 유채,
1566, 97x71cm,스웨덴 스코콜로스터 성

아르킴볼도는 초상을 그릴 때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재료를 가지고 피부의 조직과 뼈를 구성하였지요. 사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생을 책만 보고 책만 만지는 직업이니까, 책이 곧 인생인 사람이겠지요. “당신은 책입니다”라고 ‘말’로 들으면 지식이 풍부하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그림’으로 보니 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직된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지네요. 같은 환유법이라도 말과 그림이 좀 다르지요?

책처럼 살던 사람이 갑작스레 무언가에 홀린 듯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그게 바로 일탈이 아닐까 싶은데요.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Andr? Breton)이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일기를 쓰듯 진술한 소설 『나자(Nadja)』(1928)가 좋은 예일 겁니다.

10월의 어느 음울한 오후, 정처 없이 걷고 있던 브르통은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낯선 젊은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것을 봅니다. ‘저런 눈빛은 본 적이 없어…’ 이상한 힘에 이끌리듯 브르통은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키스하고 하룻밤 사랑을 나누지요. ‘지금 나 맞아?’ 그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욕을 채울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거리로 나오기 직전까지 자신은 분명 트로츠키의 책을 읽던 지식인이었고, 혁명에 대한 생각에 몰입한 채 걷고 있었거든요.

「갑자기」를 보세요. 로코코 시대의 프랑스의 화가 와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가 그린 충동적인 입맞춤 장면인데, 찰나의 엄청난 속도감을 포착해냈습니다.

장-앙투안 와토, 「갑자기」, 나무에 유채, 년도미상,
35.6x34.3cm, 개인소장.

숲속의 벤치에 남녀 둘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남자가 순식간에 여자를 낚아채 180도 회전시킨 모양새입니다. 옆에서 대화 분위기에 맞춰 기타를 쳐주던 연주가는 다급히 화음을 격정 모드로 바꾸느라 줄을 조이고 있네요.

연극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이 연주가가 누구인지 알아보실 텐데요. 이탈리아 전통극(commedia dell'arte)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하나인데, 이름이 메제티노(mezzetino)입니다. 할리퀸, 피에로, 스카라무슈는 많이 들어보셨지요? 메제티노도 그들 멤버 중 하나이고, 이 넷은 모두 고정된 성격을 지니고 있어요. 할리퀸은 주로 교활한 얼간이 역할을 맡는데, 몸에 딱 붙는 다이아몬드 체크무늬 옷을 입고 나오지요. 어리벙벙해서 속임을 잘 당하는 피에로는 우주복처럼 생긴 헐렁한 흰 의상으로 분장하고, 계략을 잘 꾸미는 스카라무슈는 까만색에 흰 주름칼라가 달린 옷을 입습니다.

메제티노는 지금 와토의 그림에서 보듯 붉은색에 흰 주름 칼라가 달린 옷을 입거나, 간혹 줄무늬를 입는 경우도 있어요. 그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예요. 음악을 기막히게 연주해서 극중 남녀의 혼을 완전히 빼놓고, 둘을 욕정의 분위기로 몰고 가니까요. 하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에 대해 무척이나 냉소적이랍니다. 지? 자기답지 않게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혔다면, 휘익 고개를 돌려 옆을 보세요. 아마 메제티노가 씨익 웃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결코 놓칠 수 없는 세부가 있어요. 갸우뚱하고 있는 개의 모습입니다. 본능에 충실하다는 개마저도 열렬한 두 사람을 보고 졌다는 듯 두 무릎을 꿇고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네요. 재미있지 않나요?

동물적 본능으로 돌아간 인간을 아름답게 묘사한 영화가 생각납니다.<레이디 채털리>(Lady Chatterley, 2007)인데, 원작은 잘 알려진 로렌스(D.H. Lawrence)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 1928)이에요. 그러고 보니 우연히 아까 소개한 『나자(Nadja)』와 같은 해인 1928년에 출간된 소설이네요. 그 무렵의 유럽이 충동이나 본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살아 있음이 온몸에 철철 흐르는 레이디 채털리에게는 관습과 규범으로 똘똘 뭉친, 마치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것 같은 남편이 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 정신은 더욱 피폐해지고 생식마저 불구가 되었지요. 대조적으로 숲속 오두막에 사는 남자는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자연 속의 날것 그자체입니다. 여자는 그 숲속의 남자에게서 자연의 무한한 에너지를 몸으로 흠뻑 받아들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자와 숲속의 남자가 빗속에서 흠씬 젖어 뒹구는 모습이었어요. 마구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여자는 불현듯 벌거벗은 채 그 속으로 뛰어듭니다. 남자도 그녀를 뒤따라 알몸으로 함께 달리지요. 황홀하고 신비로운 나체들이 아니라 실제로 있을 법한, 어딘가 모르게 엉성하고 둔탁한 몸들이었어요. 어릴 적 책으로 읽을 때에는 적나라한 관능적 묘사에 침만 꼴깍 삼켰었는데, 영상으로 보니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자유로워 보이더군요. 한 쌍의 동물이 자연에 어우러져 맘껏 뛰어노는 것 같았습니다.

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작품이 있군요. 작년 여름 러시아에 갔을 때 본 「이렇게 넓다니!」라는 그림인데, 두고두고 기분 좋은 느낌이 남았었지요.

일리야 레핀, 「이렇게 넓다니!」, 캔버스에 유채,
1903, 생트페테르부르그 러시아 미술관

러시아 리얼리즘의 대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 1844-1930)의 작품입니다. 원래는 마티스가 그린 「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고 있었지요. 파란 바탕에 벌거벗은 사람 다섯이서 둥글게 손을 잡고 원시 춤을 추는 그 유명한 그림말이에요. 문명의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자연의 본능에 내맡긴 사람들을 예찬하는 그림인데, 이야기의 전개상 지금쯤 보여드리면 딱 좋았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속수무책의 자유로움을 전달하기에는 레핀의 그림이 더 제격인 것 같아요.

보세요.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 흙탕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는데, 멀쩡하게 제대로 차려입은 남자와 여자가 뛰어들어 즐거워하고 있네요. 어떻게 추스를지 대책이 없기는 해도, 옷이 젖을까 하는 염려를 포기하고 나니 차라리 시원하고 후련해졌습니다. 겹겹이 입은 옷은 벗어버려야 할 구체제를 상징하고, 세찬 물결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혁명의 추세를 암시하지요. 이 그림이 그려졌던 1903년은 이미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이니까요. ‘자, 급류는 막을 수 없는 거야. 옷이라면 잊어버려. 세상은 이렇게 넓잖아.’ 남자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군요.

비오는 날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상상을 한 적 있어요. 우산 없이요. 옷이나 책 젖는 일에 상관없이 비를 맞습니다. 차갑고 세찬 빗줄기는 뺨에, 눈에, 입속에, 목에, 팔뚝에,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마구 따갑게 온 몸에 떨어지겠지요. 그리곤 내친 김에 너른 잔디밭 위를 물을 튀기며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야, 이주은, 너 제정신이냐?’ 라고 마음속의 목소리가 말하겠지요. 그 소리에 잠시 멈칫했다가 확 무시해버리는 그 기분이 바로 일탈 아닐까 생각됩니다.

손 선생님은 그러시겠지요. 뭐 별것도 아닌데 한 번 상상대로 해보지 그러냐고요.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하답니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라고 했던가요? 무작정 물가에 철퍽 주저앉는 그 작은 일탈에도 옷이 젖으면 어쩌지, 속옷이 젖으면 어쩌지 걱정부터 앞서는 우리에게, 일부러 일탈을 저지르지 못하는 우리에게는요, 차라리 속수무책이라는 네 글자가 해답이 아닐까요.

일탈이든 무엇이든 인간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엔 더 많지요. 그렇게 이미 벌어져서 되돌릴 수 없다면, 그냥 속수무책으로 우연에 내맡기는 것 말입니다. 계획에서 어긋나면 바로 잡으려 애쓰는 대신, 그냥 두는 거예요. 에디트 피아프가 구성지게 부르는 노래,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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