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나의 철학수업] 니체도 틀릴 수 있다!
나를 사로잡은 이름, 니체
요즘 십대들과 달리, 당시 우리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이 사교육을 전면 금지시킨 덕분이었다. 물론 편법으로 과외를 받거나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밤늦도록 학교에 붙잡혀 있어야했지만, 그렇게 삶의 쳇바퀴가 빡빡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읽었던 책들은 다시 돌아온다. 니체도 마찬가지였다. 니체 따위를 읽은 나에게 현실의 교육체계 같은 것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래들과 어울려서 요즘으로 치자면 독서모임 같은 것을 하거나 함께 시나 글을 써서 책으로 묶기도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때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소식이 닿는 이가 지금 프리랜서 음악진행자로 일하고 있는데, 여전히 제 버릇 어디 주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십대들과 달리, 당시 우리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이 사교육을 전면 금지한 덕분이었다. 물론 편법으로 과외를 받거나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밤늦도록 학교에 붙잡혀 있어야 했지만, 그렇게 삶의 쳇바퀴가 빡빡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학에 왜 꼭 가야 하는지 회의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진학했지만, 1년을 지나도록 여전히 대학이라는 곳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니체였다. 나에게 니체는 허무주의를 이겨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솔직히 대학에 들어간 뒤에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 않은 까닭은 여럿이었지만, 그중에서 니체에 대한 기독교인 일반의 오해가 제일 컸다. “신은 죽었다”는 선정적인 주장 때문인지, 니체를 ‘사탄’이라고 불러대는 기독교인들도 수두룩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니체를 읽어본 나로서 정말 아니다 싶었다. 니체는 종교 일반을 문제 삼은 것이지, 기독교만을 걸고넘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덕의 계보』를 읽어보면, 니체가 기독교의 무력화 이후 유럽에 만연한 허무주의를 ‘불교’에 비유하면서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동정 본능, 자기 부정 본능, 자기희생 본능의 가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쇼펜하우어가 오랫동안 미화하고 신성시하고 저편 세계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며, 이러한 것들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가치 체계’로 남게 되었고, 그는 이러한 것들을 기반으로 삶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한테도 부정을 말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본능에 대하여 내 안에서 더욱 근본적인 의구심이, 더욱 깊이 파고드는 회의가 항의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인류의 커다란 위험을, 그 숭고한 유혹과 매혹을 보았다 - 그러나 무엇을 향한 유혹과 매혹인가? - 바로 여기에서 나는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정체되어 있음을, 회고하는 피로를, 삶에 반항하는 의지를, 연약하고 우울한 것을 예고하는 마지막 병을 보았다 : 나는 더욱 퍼져 나가 철학자들마저 휩쓸어 병들게 하는 동정의 도덕을 섬뜩하게 된 우리 유럽 문화의 가장 무서운 징후로, 새로운 불교와 유럽인의 불교, 허무주의에 이르는 우회로로 파악했다.1)
여기에서 니체는 허무주의의 원인으로 “동정의 도덕”을 지목하면서 이런 현상이 현대철학에 이르러 만연하게 되었다고 일갈한다. 당연히 이런 ‘정리’는 정석인 것이고, 내가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눈에 확 들어온 것은 현대판 유럽의 허무주의를 지칭해서 니체가 “유럽인의 불교”라고 싸잡아 불렀다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불교를 허무주의로 본 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문자 그대로 지리철학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비서양인, 다시 말해서 ‘동양인’으로서, 그리고 동양고전과 불교경전을 주마간산이나마 훑어본 경험을 가졌던 나에게 이런 니체의 진술은 코웃음을 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니체도 별것 없구먼,”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그렇다고 내가 니체를 완전히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니체 같은 철학자들도 ‘틀릴 수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내 사유를 지배하는 회의주의는 이런 니체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니체를 비롯한 서양철학자들이 동양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경우는 그 이후에도 숱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후일 유학을 갔을 때, 토론에 임하는 나의 태도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어떤 문제에 대해 논증을 하는 상대방 토론자에게 “서양의 타자인 나를 설득하지 않으면 너의 생각은 반쪽일 뿐이야”라고 딴죽을 거는 것이, 이를테면 나의 사술이었던 셈이다. 절반은 진담이고 절반은 농담이었지만, 여하튼 이런 방식으로 나의 존재를 그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니체가 불교를 오해한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문제는 니체를 읽지도 않고 비난하는 동양의 기독교인도 만만치 않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이, 대다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니체는 교회 나가지 말라고 선동하는 나쁜 사람쯤으로 비치는 것인데, 이렇게 황폐한 지성의 풍경이 내가 경험한 한국 교회의 실상이었다. 한 마디로 이 정도 ‘상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신의 말씀’을 운운한다는 사실에서 별로 신뢰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후일 이런 편견은 다양한 성서신학자들을 만난 뒤에야 일정하게 사라졌지만, 이렇게 각인된 허접한 한국 기독교의 이미지는 꽤 오랫동안 나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의 ‘말씀’보다 니체의 말에 훨씬 더 무게중심을 두게 만들었다. 나에게 기독교에 목을 맨 ‘종교적 인간’은 니체의 포효 앞에서 사라지는 지푸라기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니체가 나를 사로잡았던 까닭은 종교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그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도 문학도 나에게 구원을 주지 못할 때, 니체는 깊은 허무주의를 극복할 묘책을 던졌다. 니체를 달리 실존주의의 선구자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존주의는 궁극적으로 허무에 대한 대책이라고 볼 수 있다. 허무의 본질은 곧 신의 부재와 관련성을 맺는다. 지금 현존하는 삶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각성은 인간에게 공포를 준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초월자’를 발명해서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기탁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런 생각의 근본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문화비평이다. 니체의 철학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선구적인 문화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의 계보』는 아주 훌륭한 문화비평서이다.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은 니체의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비평’한다.
이 도덕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위세를 부리고 싶어 하는 선한 정령에게 경의를 표하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에게는 역사적 정신 자체가 결여되어 있으며, 그들이 바로 역사의 모든 선한 정령 자체에서 방치되어버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 모두는 낡은 철학자들의 관습이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으로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다루는 도덕 계보학의 미숙함은 ‘좋음’이라는 개념과 판단의 유래를 탐구하는 것이 문제될 때, 처음부터 드러난다.2)
이렇게 도덕사를 기술한 역사학자들을 비판한 뒤에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압권이다.
그러나 첫째로 나에게 분명한 것은, 이 이론에서 ‘좋음’이라는 개념의 본래적인 발상지를 잘못된 장소에서 찾고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았다고 표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즉 저급한 모든 사람, 저급한 뜻을 지니고 있는 사람, 비속한 사람, 천민적인 사람들에 대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다고, 즉 제일급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사람, 강한 사람, 드높은 사람들, 높은 뜻을 가진 사람들에 있었던 것이다.3)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니체는 도덕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바로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에서 찾고 있다. 『도덕의 계보』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나 원래부터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니라, “고귀함과 거리의 파토스, 좀 더 높은 지배종족이 좀 더 하위의 종족, 즉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 감정”에서 기인한 “‘좋음’과 ‘나쁨’의 대립”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통찰은 언제 읽어도 속 시원하다.4)
니체를 읽었기 때문에 나는 후일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여러 측면에서 니체의 철학과 만나면서도 헤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니체는 ‘해체주의자’ 다운 면모를 보이는 철학자였다. 그의 철학에서 모든 것은 뒤집어져서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그의 책들은 욕망의 에너지원 기계로 작동하는 무의식에 대한 진술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서 그는 도덕의 기원을 찾았고, 그 생각은 여전히 현대철학을 관통하는 이론적 고찰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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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니체> 저/<김정현> 역19,800원(10% + 5%)
니체 사거 100주년을 맞아 책세상 출판사에서 내고 있는 니체전집 중 한권이다. 책세상의 니체전집은, 니체 연구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는 독일 발터 데 그루이터 출판사의 《니체 비평 전집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KGW)중에서 서신과 주해서를 뺀 나머지를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