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안국동을 빠져나갔다. 낮 동안 뭉쳐있던 빗방울이 낱개로 툭툭 떨어졌다. 수많은 빗방울은 제각각 사연을 가지고 창문을 두드렸다. 마치 다음날 사형을 선고 받은 것처럼,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나를 두.드.려. 깨.웠.다. 지난 7월 22일 정독 도서관에서 ‘신경숙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다.
이 도시를 알기 위해 걷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걷는 일은 스쳐간 생각을 불러오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게 했다. 두 발로 땅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책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숲길이 나오고 비좁은 시장통 길이 등장하고 거기에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걸고 도움을 청하고 소리쳐 부르기도 한다. 타인과 풍경이 동시에 있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p.86)
등장하는 것은 타인과 풍경이지만, 퇴장하는 것은 ‘나’ 이다. 만약 인간에게 아흔 아홉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청춘은 개중 두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 두 시간은 나머지 아흔 일곱의 시간보다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일곱 번째 장편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문학동네. 2010)은 눈이 부시도록 선명한 청춘의 열망을 그렸다.
나도 이 도시를 알기 위해 무작정 걷기로 했다. 걷는 것은 발의 통각을 자극하고, 아픔을 생생하게 뇌에 전달한다. 그런 맥락에서 아픔은 각인 된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말 할 수 있게 해주는 문장이었다. 따라서 신경숙 작가와의 만남은 독자로 하여금 동시대의 문장을 소통하게 해주는 자리였다. 텍스트 속에 있던 흑백의 내밀한 몽상이
‘정윤’(p.95)아! 하고 부르는 순간, 나는
‘색을 더하여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p.95) 할 수 있었다. 신경숙 작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결핍과 모순을 넘어서기
“제가 여러분에게 문학 강연 한다고 해서 써온 것이 ‘결핍과 모순을 넘어서기’ 예요.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어느 정도의 시골이냐면 제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어요. 어둠과 빛의 차이를 선명하게 느끼면서 성장했지요. 해가 지면 어두워지잖아요. 이것은 사실이에요. 시골에서 해가 져서 어두워지는 것은 그냥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캄캄해지는 거잖아요.
해가 저문 세상과 아침 새벽빛이 스며들면서 낮의 세상은 색으로써 선명하게 구분되잖아요. 저는 그러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어느 날 기억이 맞는다면 오학년 말쯤, 전깃불이 들어왔어요. 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서두에 꺼내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전깃불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했어요.
| 강연회가 열린 정독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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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마당에 빨랫줄이 있는데 제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전구를 매달았어요. 너무나 놀라웠지요. 그 전구 하나가 켜져 있었는데 대청 헛간 등에. 당시에 남폿불을 켰는데. 그런 불을 스무 개 켜놓은 것보다 집이 더 밝았어요. 엎드려서 해가 지기 전에 숙제를 할 필요도 없었고. 재래식으로 지내야 했던 것이 급격하게 달라졌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세상이 변화 됐다고 해도 전기불이 들어오기 전과 후가 구분되는 것은 충격적이었어요.
그러면서 모든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손수 밥을 짓는다는 것 등등. 하여튼 그것들이 뒤로 물러나고 편리한 일상이 전깃불과 함께 시작되었지요.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재래식 집 구조. 예를 들어 아궁이, 헛간, 화장실, 장독대등은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어요. 전깃불이 들어오고 나서 가장 많이 하던 말이 ‘저기 뭐가 있었는데.’와 같은 말이었지요. 그리고 더 이상 어두워진다는 것에 관한 생각은 안하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항상 밝으니까. 처음에는 굉장히 좋았는데…….
저는 문학이라는 것을 가끔 생각할 때. 전기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일들이……. 거기가 시작이었던 것처럼 시간, 경계에 서서 사라져 버린 것들. 이제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은 것들. 그리고 뭔가 발전되고 반면에 소멸하는 것도 있고 그러한 것에 따른 수많은 죽음들이 있겠죠. 거기에 빛을 주고, 생명을 주고, 복원시키기도 하고. 죽은 것을 살게 하기도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쓰는 작품에 이러한 것이 어느 정도 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없어진 것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 언제 작품으로 탄생되어서 어떤 시간을 뚫고 이겨 나가서 생명을 제대로 가져나가는지 아닌지 아직 증명할 수는 없지만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겠지요.
수학 문제를 풀 때 희열을 느끼는 이유는 답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지요. 문학이 그런 것 같아요. 답이 없어요. 해결되지 않는 것들에 시선을 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이러한 성찰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 그런 정서. 거기에 대한 질문. 이러한 것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 소설 쓰기의 근원이에요.
그래서 특히, 소설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제 경험으로 볼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다른 세상이 있다.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해요. 일차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답 같지만, 답이 없는 더 어수선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양하게 열려 있는 내면을 가지게 되면, 가장 고통스러울 때, 뭔가 일이 해결되지 않을 때,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틈을 가질 수 있어요. 왜? 내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이 전부는 아니니까. 또 다른 시간이 밀려오고 내가 보고 있지 않는 곳에서 다른 일들이 진행되고. 그것으로 꿈을 꾸게 되지요.
시골마을에서 성장했는데도 책 읽는 것을 좋아 했어요. 책이 많지 않아서 읽었던 책을 또 읽기도 했지요. 남자 형제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책을 빌려왔어요. 마루에 책을 쌓아뒀지요. 그런데 그들은 할 일이 많았어요. 축구도 해야 했고 배드민턴도 쳐야했고. 그때 그들은 국군놀이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들이 빌려온 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여기 말고 다른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타인을 향한 연민
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질문할 때, 언젠가는 큰 제목을 내세워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해결되지 않는 것, 이긴자 보다 진사람, 빛난 사람 보다는 빛이 나지 않는 사람을 응시하고 조명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라는 거친 잣대가 제거해버린 사람들의 숨결을 다시 복원시키고. 언어 속에서 영원불멸 시키는 작업, 그것이 소설이고 더 넓게는 문학이라고 생각했어요.
최근에 쓴 소설에서 윤교수가 남긴 문장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p.354) 우리들의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해결되는 지점이 있다면 빨리 거기로 가야하겠지만. 그냥 한발, 한발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기억하고 살며 내일을 맞이하고 그렇게 자기 마음 안에 겹겹에 문과 층을 이뤄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 삶을 문학이라는 것은 앞서갈 수 없어요. 따라가는 것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 기억하게 하고, 패배자의 시선이긴 하지만, 패배한 이유, 좌절한 이유, 그것에 더 많은 의미를 두고, 영웅보다는 익명의 존재에게 정서적으로 더 가까이 가고, 70년대 60년대 50년대 80년대 문학이 해왔던. 뭔가 변화를 한다던가. 그것이 진보해 와서 일상성까지 미비하게나마 함께 나누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책은
누군가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특수한 삶이기도 하다. 전화기가 귀한 시절, 도시에서 일하는 딸의 전화를 받기 위해, 일하던 손을 멈추고, 부랴부랴 마을 이장님 집으로 향하던 엄마의 모습과 서툴지만 느리게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작성해 아들에게 보내는 엄마의 모습은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가 변했다는 것만 다를 뿐, 공통의 정서는 같지 않을까? 1963년에 태어난 신경숙 작가와 1984년에 태어난 필자를 사이에 두고 ‘청춘’ 이란 소재로 쓰인 소설이 거미줄처럼 연결됐다.
광주의 피를 등에 업고 등장한 신 군사정부. 그네들의 청춘은 거친 역사가 재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순응하거나, 반목하거나. 그네들의 일상에 ‘국풍’ 이 있었다면, 지금 세대의 일상에 ‘월드컵’ 이 있다는 것만 다를까? 그네들이 늘 듣던 말 중에 ‘독재 타도’가 대학가의 주요 화제였다면, 지금은……. 어쨌든 그네들은 살아왔고, 지금의 나는 살아가고 있는 청춘의 풍경이 낱말 본연의 의미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크리스토프는 그런 예수를 짊어졌다. 뒤집어본다면 십자가가 예수를 실어 날랐고, 예수가 크리스토프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다. 그들에겐 온 존재를 다 바쳐 수행해야 할 소명이 있었고 그 소명이 이루어지게끔 한 운명적 만남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소명도 있을까? 내 인생이 짊어져야 할 운명의 과업이란 것도? 그 소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언젠가는 나에게도 찾아올 것인가. 스물을 훌쩍 넘긴 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나아가고 있는 기분이다. (p.126)
청춘에 관한 소설 하면 아무래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가 먼저 떠오른다. 특히, 하루키의 소설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소설 자체에도 있었지만 당시 TV 광고에도 있었다. 아마 현대 전자의 광고였던 것 같다. 기차를 배경으로 긴 머리의 여자가 책을 펼치고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차창 너머로 들판이 보이고, 한가롭게 책을 읽는 여자에게서 자유로운 감정이 묘하게 어울렸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 와서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라는 기형도의 「오래된 서적」을 읽고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어쩌면 신작가의 소설의 윤교수가 소장했을 시인 목록에 그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서른넷이 되기 전에 요절한 시인이므로.
청춘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흘러간 인연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성장통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마냥 섭섭해 할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언급한 본문에도 나와 있듯,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크리스토프도 되고 예수도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있지만 엄연히 없는 것, 그것을 작가는
“앞 못 보는 동료를 위해 스스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개의 존재”(P.52)로 비추어 말한다. 세상에 이럴 수가에 나올 법한 이야기. 어쩌면 삶은 소설이나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
소설은, 네 명의 주 인물을 통해 서사를 이끈다. 정윤과 명서가 주 화자이고, 그들의 말 틈에 단이와 미라의 목소리를 실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상실’과 ‘애증’이 뒤범벅되어 있다. 정윤과 단이는 한 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다른 곳에서 명서와 미라도 유년시절을 함께 했다. 엄마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운 시절, 정윤에게 단이는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그러다 윤교수의 수업을 수강하는 중에 명서와 미라를 알게 된다. 단이는 정윤을 사랑했지만 정윤은 명서에게 더 깊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군에서 단이의 죽음. 얼마 후, 거식증에 의한 미라의 죽음까지. 남겨진 정윤과 명서에게 있어서 이 둘의 죽음은 무슨 의미일까? 게다가 그 둘의 인연을 맺게 해준 윤교수의 죽음이 목전에 이른 지금. 그 둘은 헤어졌다 이것으로 인해 다시 만난다. 그 둘이 들려주는 그 때 그 시절의 상흔을 산책 하듯 독자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산책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며, 풍경에는 신발을 잃고 무릎이 헤져 울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강연회, 독자가 물었다
신작가의 전작
『엄마를 부탁해』가 100쇄를 넘었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작가 강연회가 열린 세미나실이 꽉 차고도 모자라, 서서 듣는 사람들까지. 그만큼 신작가가 내뿜는 독자 파워는 세대를 막론하고 그 층위가 두꺼웠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가진 못했지만, 텍스트가 아닌 육성으로 오가는 대화인 만큼 열기는 뜨거웠다.
아까 강연을 하실 때 대게 어린 나이에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성장하면서 흔들림이 없었는지.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 해주세요. 개인적으로 저도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요.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것 중에 작가처럼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은 없더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것처럼 작가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합니다.
“뒷부분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기도 하겠죠. 그 사람이 작가여서 게으르고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원래 좀 게으르고 무책임한 부분이 있었는데 작가였겠죠. 그런 생각이 들어요. 편견이나 이런 것, 저는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었어요. 가족들에게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신기해했던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가족이 제 소설을 열심히 읽는다면, 전 참 싫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다행히 그들은 문학에 대한 깊은 외경심이 있지 않아요. 그래서 편안하게 제 길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타인들 중에 ‘작가니까 어쩔 것이다’는 것이 있을 거예요. 그걸 신경 쓰고 있었다면 일단 제가 부자연스럽고 편치 않았을 거예요. 저는 일찍부터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러웠어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내가 하는 일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행스럽게 그냥 슬리퍼 싣고……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작가답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가끔 옷 수선집 가면 빨리 해주기도 하고. 우편 배달부 아저씨가 어느날부터 제가 신경숙 작가라는 것을 알고 잘 챙겨주고, 그렇답니다. 별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글을 쓰는 것에 집중하듯이 여러분은 여러분 일을 집중하잖아요. 서로 다른 것 뿐이예요.
작가가 된 과정은, 저는 열 다섯살 때 기차를 타고 이 도시로 왔어요. 밤이었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 도시로 가면 뭔가 마음에 품고 있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저 도시로 가면 작가가 돼야겠다!’ 생각했어요. 그게 아마 두려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부모 곁을 떠나서, 두렵고 무슨 일 있을지도 모르고, 그 이후로 수많은 일들이 많았죠. 그 생각을 어째 그 밤에 할 수 있었을까? 감사하게 여기기도 해요. 특이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대학도 순탄하게 보내지 않았어요. 그럴 때마다 작가가가 되어야겠다! 소설가가 되어야겠다! 이런 생각이 살면서 순간순간 고비를 넘어가게 해주는 튼튼한 역할을 해주지 않았나. 저 자신을 두고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했어요.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심정에 있었어요. 어려울 때 이게 다가가 아니고 난 작가가 될 테니까. 이렇게 하면서 통과해 나갈 수 있었어요. 그것으로부터 멀어진 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다시 태어나면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작가로 태어나고 싶진 않아요. 여기서 다 하고 갈 거예요. 어깨가 아파요. 다음에는 몸을 쓰는 사람. 마음이나 정신 말고 몸을 쓰는 사람. 목수라든지. 다시 태어날 기회가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을 가끔 해요.
결정적으로 넌 소설가가 되어보면 어떻겠냐고 말해준 사람이 고등학교 선생님이에요. 제가 쓴 반성문을 보고. 저는 그 말을 듣고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고, 뭔지 모르고 있다가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너는 소설을 써 보는게 어떻겠냐 말씀했고 그래서 소설로 정했어요.
말이라는 것은 때때로 어떤 말은…… 사람에게 크게 작용해요. 말은 신중해야 해요.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또한 귀찮아 하지 말아야해요. 필요한 말은 해줘야 하거든요.”
정윤이 에밀리 디킨스의 시집을 중요하게 여긴 것 같아요. 작가님을 일으켜 줬던 책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청년들에게 메시지를 남겨주신다면?
“책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은 굉장히 어려워요. 눈치 채셨겠지만 어디에서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라면 똑같은 책은 안 해요. 그쯤에 읽었던 책으로 하죠. 꼭 추천을 하라하면 한국문학 전집을 섭렵해보라고.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저는 작가가 되기 전에 이광수부터 윤흥길 까지 엮어 있는 책을 섭렵했어요. 내 작품의 텃밭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역사가 기록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그들의 책을 통해서 느꼈어요. 다 읽었을 때 최종적으로 나온 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권하고 싶어요.
나를 일깨우는 문구라고 하면, 나는 이 세상에 너무나 하잘 것 없는 인간이고, 이렇게 평범하고 이렇게 불충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프랑시스 잠의 시집에 ‘자 여기 내가 있나이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었어요. 서문이었어요. 그 말이 별말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저는 굉장히 충격 받았어요.
서문의 글은 이런 것이었어요. ‘내 마지막 문장은 당신이 나를 부를 때에 나는 언제든지 그곳으로 가겠나이다’ 그것이 이십대를 통과할 때 너무나 혼란스러운 시기에 제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언젠가는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의지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문구였어요. 큰 영혼의 목소리처럼 들렸고. 세월이 많이 지났고, 제 작품의 윤교수가 손바닥에 쓴 문구이기도 해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별 빛이…… 그 문구가 있다. 제자들에게 남기는 문구죠.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는 문구가 제 마음속에 많은 시간을 지나오면서 뭔지 모르게 남아 있었고 소설에서 윤교수의 마지막 말로 변형 되었던 거죠. 오래전 이십대 길거리에서 읽었던 그 문구가요.”
강연이 끝나고, 전화벨이 부르는 것은
타인들과 한 공간에서 숨을 부대끼고 나오는 이 순간, 밤은 한층 더 두꺼워졌다. 수 없이 지내온 밤인데, 유난히 두꺼워 보이는 이유는 신 작가가 말한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는 프랑시스 잠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그 때 그러지 못했나’(p.336) 는 생각이 얼핏 들었고,
‘정민을 바꿔 달라고 흐느껴 우는’(p.365) 청년의 이후가 궁금해 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건 시간이 해결 해 줄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저 많은 사람이 잠시 동안 한 공간을 메웠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함께 였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지만, 함께 웃, 었,다 와 함께 말, 해, 다 가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설
『외딴 방』에서 한계숙이 ‘너는 왜 우리 이야기를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신의 공장 노동자 시절을 돌아보고,
『엄마를 부탁해』에서 엄마가 사라진 다음에 엄마의 빈 공간을 느끼는 것처럼, 사라지고, 지나고 나서야 문득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아마도 신작가의 문체는 사라진 무엇에 색을 더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시간이든, 인물이든, 공간이든 간에 말이다.
사라지는 것이 있기에 생은 유한할 수밖에 없고, 또 무한하다는 역설을 지닌다. 신 작가에게 있어 문학이라는 것, 그것은 사람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 끈질긴 연민이 이 땅을 든든하게 버틸 수 있는 근육이지 않을까?
사방에서 사람빛이 툭툭, 터진다. 눈이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