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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타락과 순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인간 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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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같은 것을 읽은 날도 그런 비슷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나는 요조식의 타락에 충격을 받고 내 영혼은 단박에 늙어버린다.

흙과 꿈으로 이루어진 나는 종종 내 자신이 흙과 꿈과 나 아닌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비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어쩐지 자유가 싫고 구속당하고만 싶다. 수세기 전 사람들의 절망 때문에 기꺼이 타락하고 싶을 때도 있다. 수세기 전 사람들의 소원 때문에 기꺼이 정신 바짝 차리고 싶은 날도 있다. 수세기 전 사람들이 나에게 “너는 무척 오래된 사람이야.”라고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날도 있다. 그런 날 나는 그 어느 날보다 어찌할 수 없는 내 마음속의 사랑들과 그 어느 날보다도 깊은 내 마음속의 부끄러움 때문에 내 생각들이 나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고 느낀다. 그때의 사랑과 부끄러움은 저 멀리서 깊고 검푸른 파도를 타고 와 나에게 초경험적이고 아득하고 신비로운 밤을 선물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새로운 인간형이 아닌 게 조금도 부끄럽지는 않다. 오래된 입들은 언제나 고통과 부끄러움을 말한다. 그러면 나는 마치 해골의 눈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의 생생함에 놀라고 내가 그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것에 놀라게 되고, 또 하나의 비극을 배운다. 나는 내가 영영 새로워질 수는 없겠구나! 하고 한숨을 쉰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같은 것을 읽은 날도 그런 비슷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나는 요조식의 타락에 충격을 받고 내 영혼은 단박에 늙어버린다. 그 타락 위에 크리스마스 전날 밤 어느 교회 담장 너머로 들었던 세 번 아멘, 아멘, 아멘 소리가 경건하고 부드럽게, 마치 누군가의 한숨 섞인 위로처럼 흘러가는 것을 듣는다. 십자가는 지상으로 내려온다. 『인간 실격』은 세 장의 사진으로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아이, 청년, 그리고 몰라보게 늙은 얼굴. 모두 한 사람 요조의 얼굴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진들이 어리나 늙으나 웃거나 찡그리거나 늘 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슬픔 위에 꽃으로 된 관을 씌워주듯 『인간 실격』을 읽는다. 그런데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의 몰락해 버린 삶 앞에서 망연자실하면서도 또 뭔가를 기어이 생각해 내려고 하는 것은 물거품만 남기고 사라지는 파도 앞에서도 뭔가 붙잡으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가련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그런 자리에서 생겨날지도 모른다. 모든 신은 행복에서 창조되는 게 아니라 비참함과 부끄러움 위에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오직 나약하기만을 원하는 사람처럼 군다. 그는 매사에 저항을 포기한 사람이다. 그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빚어낸 결정적인 한방으로 무너진 사람이 아니다. 요조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처 위에 딱지가 굳고 또 그 위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내 눈엔 요조의 눈빛이 아기 예수를 내려다보는 성모 마리아의 슬픈 눈만큼이나 처연하고 슬프다. 요조의 타락은 시대의 죄악과 불안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고 속수무책이고 향수를 자극하고 어느 순간엔 그것만이 요조같이 좋은 사람에게 허용된 유일한 인간적인 출구였던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는 세상과 온갖 형태의 전투를 치르기 전부터 이미 패배자였다. 『인간 실격』은 큰 전쟁이 끝나자마자 또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는 시대에 바쳐진 글일지 모른다. 혹은 우리의 전 세대 부모들이 사랑했던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시대, 전 세대 부모처럼 살 수는 없는 시대에 바쳐진 글인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에 사람들은 어쩌면 이름 없고 꽃도 없는 새로운 십자가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는 이렇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신민들은 천황의 옥 같은 목소리를 처음으로 라디오로 듣는다. 그 내용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했음을 알리는 것이고 그 패망 선언은 보석 같은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있었다. 전멸시켜야 했던 적 미군이 점령군으로 일본 땅에 들어온 이후로 일본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 모습은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분석되어 있다. 당시 일본 대중에게 가장 충격적인 인상을 준 하위문화 세 가지 중 첫째는 판판 매춘부들, 둘째는 암시장. 셋째는 방종을 찬미하는 술 취한 자들이었다. 이 중 판판이란 말의 유래는 애매모호했지만 그 시대는 판판으로 상징되었다.

거칠면서도 섬약한 성격, 밝은 색 립스틱과 매니큐어, 세련된 의상, 때로는 일반인들의 부러움을 사는 액세서리 등으로 대변되는 매춘부들. 전후 일본의 밤거리 풍경과 전후 일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에서 판판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녀들을 포착한 사진은 전후 일본을 기록한 사진 중에서도 가장 우울하고 향수 어린 부류에 속한다. 어둑어둑한 도시를 배경으로 벽에 기대선 실루엣, 목에 두른 스카프, 손에 든 핸드백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쥐고 있는 손, 밤의 여인 거리의 여인, 어둠의 여인 등 그들을 묘사하는 표현은 많았지만 판판이 가장 널리 쓰였다. (…) 미군 병사들에게 이 용어는 비웃음과 동정심, 이국적 취미, 그리고 적나라한 에로티시즘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 대부분 여성들은 매춘을 하면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유행하던 은어들은 판판을 미묘하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낭만적으로 표현했다. 이리저리 손님을 갈아 치우는 매춘부는 영어를 그대로 빌려와 바타후라이(버터플라이, 나비)라 불렸다. 바타후라이는 ‘사랑을 사랑한 여자’의 현대판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 미군 병사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거나 미군 지프차에 개선장군처럼 올라타 질주하는 판판은 민족적 자존심뿐만 아니라 특히 남성의 자존심을 송곳처럼 후벼 팠다. 하지만 동시에 이 여성들은 모든 일본인이 어떤 식으로든 연루될 수밖에 없던 미국화라는 격랑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사람의 이목을 모으는 상징이기도 했다. 판판은 공공연하고도 당당하게 정복자에게 몸을 팔았다.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과 나란히 특권 엘리트층으로 자리를 점하고 있던 선량한 일본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몸을 팔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또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는 그 시기를 묘사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온나와 판판, 오토코와 까쓰기야(여자는 창녀가 되고 남자는 암시장의 짐꾼이 되었다)’였다. 벚꽃처럼 장렬하게 산화하려던 가미가제들이 암시장에서 단검과 권총을 허벅지에 감춰두고 일하는 길거리의 저편에선 ‘누가 나를 이런 인간으로 만들었나’란 창녀의 구슬픈 노랫가락이 흘러다니고 있었다. 어린 동생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암시장에서 일하는 선량한 형들처럼 용감한 암시장의 조폭이 되고 싶어 했고 상인들은 양심을 속이고 용기를 얻기 위해 가스토리 소주를 마셨다. 심약한 자를 대담하게 만들고 엄격한 자를 느슨하게 한다는 가스토리 소주는 그 시절의 예술가와 작가들이 선택한 술이 되기도 했다. 판판과 암시장의 시대는 술집 인텔리겐치아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의 양심적이고도 새로운 덕목은 타락이었다. 『패배를 껴안고』에는 유혹으로 가득 찬 사카구치의 타락론이 인용되어 있다.

타락이라는 이 놀라운 평범함. 그 평범의 당연함에 비하면 저 처절하게 위대한 파괴의 애정이나 운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도 물거품처럼 헛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 특공대의 용사는 그저 환영에 지나지 않았고 인간의 역사는 그가 암시장 장사꾼이 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 그리고 천황도 그저 환영에 지나지 않았고 그가 보통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진실된 천황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일본은 패하고 무사도는 멸망했지만 타락이란 진실된 모태에 의해 비로소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그저 인간으로 되돌아온 것뿐이다. 인간은 타락한다. 사람은 살아가고 또한 타락한다. 이 외에 사람을 구할 편리한 지름길이란 없다.

-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중에서


사회가 어떤 병적 상태에 있다면, 타락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하고 실제적인 시대라면, 새로운 도덕은 타락한 자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될지 모른다. 모든 낡은 도덕은 차라리 악에 가깝다. 그 시대에 『인간 실격』의 지은이 다자이 오사무는 정부와 함께 연못에 투신자살해 버렸고 이후 전 일본 열도를 휩쓴 퇴폐적 매혹의 한 전형이 되었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에게 바치는 모든 말들 중에서 존 다우어가 한 이 말 “글에 대한 재능과 삶에 대한 고뇌를 갖고 있던 그는 타락한 삶을 살면서 가끔씩 천사처럼 글을 썼다.”처럼 마음을 끄는 말을 찾지 못했다. 몰락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어릿광대에서 품위를 보고 수치심에서 노스탤지어를 느낄 줄 알던 다자이 오사무가 만든 타락한 삶과 천사 같은 영혼의 표상, 바로 『인간 실격』의 요조다.

명문가 부잣집 막내 도련님 요조는 인간의 삶을 통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익살꾼이 된다. 요조의 눈에 가장 난해한 것은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이었다. 요조의 눈에 사람들은 서로 속이면서도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요조는 인간에게 진실을 호소하는 게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요조는 어릿광대나 되자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익살이란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가족에 대해서도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고 그저 두렵고 거북해서 그 어색함을 못 이긴 나머지 일찍부터 숙달된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저는 어느 틈에 단 한마디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남을 속이기 힘들어서 단 한마디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된다는 것. 나는 이 말이 주는 당혹감에서 한동안 잘 헤어나지 못했다. 이 말은 마치 속으로는 무척 아픈 아이가 결국 아무에게도 진심으로 위로를 받지 못할 걸 알기 때문에 가족들 모두 앞에서 건강한 척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 말은 남을 속이기 힘들어서 나만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려 했다는 것보다 훨씬 정직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않는 어릿광대는 언제나 이중의 존재이고 자기만의 고통스러운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어릿광대의 마음의 중심에 들어간다는 것은 절규를 듣는 것과도 같다.

요조는 도쿄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본격적으로 술, 담배, 창녀에 빠져 타락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좌익 단체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이 아닌 묘한 괴담 비슷한 것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한다. 그저 그는 자신은 합법보다 비합법을 즐기는 것 같다고 느낀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져서)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저 자신도 황홀해 질 정도로 다정한 마음.

황홀해지도록 다정한 마음. 음지의 인간들을 향하는 황홀할 정도로 다정한 마음. 나는 이 문장을 볼 때마다 코로 뭔가 냄새를 맡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마치 어떤 비참한 향기가 코끝을 건드리고 잔향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 같은 순간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요조식의 다정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이미 낡은 도덕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에게 황홀할 정도로 다정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을 모르고 살 수밖에 없게 되지 않을까? 비합법적 세계에 있을 때 오히려 건강하게 행동할 수 있었고 창녀들과 음지의 존재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함을 느끼는 요조는 단 하루뿐인 행복한 밤에도 상처를 입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남자였기 때문에 어떤 한 여인을 사랑하진 못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미약하나마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사건이 생긴다. 그건 여자에 굶주려 있기 때문에 아무 여자나 붙잡고 키스하겠다고 다짐하던 그의 가증스러울 정도로(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불쾌하고 형편없는 속물 친구 호리키가 “아무리 나라도 저런 궁상맞은 여자에게 키스를 할 순 없지.”라고 한 여급을 두고 불쾌하게 말한 뒤였다.

속물들의 눈으로 보면 쓰네코는 취한의 키스를 받을 가치조차도 없는 초라하고 궁상맞은 여자였던 겁니다. 없는 사람끼리의 동질감이 치밀어 올라와서 쓰네코가 사랑스럽고 불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그렇게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허리띠는 가게 친구한테 빌린 거니까 하면서 허리띠를 풀어서는 개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고. 저도 망토를 벗어서 같은 곳에 두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요조는 아버지와 완전히 관계를 끊게 되고 그 이후로 그는 여자들의 정부로 살아가게 된다. 그중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두 장면이 있다. 이 두 장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요조는 무능력과 무기력의 천사란 생각을 한다. 타락과 순수가 두 갈래 길로 여행을 떠났다가 그 영원한 여행을 마치고 요조의 몸 안에서 만나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타락은 작고 어리고 고귀한 희생자의 넘치는, 듣기에 불편한 속죄처럼도 느껴진다. 그의 인생은 결코 대답을 얻지 못한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요조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세상은 그를 더 큰 치욕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의 삶을 보면 무엇이 건강한 것이고 무엇이 병든 것인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첫 번째는 삼류 잡지사 여기자와 그의 딸과 함께 살던 집에서 나올 때이다.

저는 또 시즈코의 허리띠랑 속옷 따위를 살그머니 들고 나가 전당포에 가서 돈을 만들어서는 긴자에서 술을 마시고 이틀 밤을 연달아 외박했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 밤, 아무리 뻔뻔스러운 저라도 겸연쩍은 마음에 무의식 중에 발소리를 죽이고 시즈코네 방 앞에 다다랐더니 안에서 시즈코와 시게코의 얘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왜 술을 마시는 거야?”
“아빠는 말이야.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예요. 너무 착한 사람이라 그래서.”
“착한 사람은 술 마시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
행복한 듯한 시즈코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을 조금 열고 들여다봤더니 하얀 새끼 토끼가 보였습니다. 깡충깡충 온 방 안을 뛰어다니는 새끼 토끼를 모녀가 쫓고 있었습니다. 행복한 거야 이 사람들은 나 같은 멍청이가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 이제 곧 두 사람을 망쳐놓을 거야. 조촐한 행복. 착한 모녀에게 행복을. 아아 만일 하느님께서 나 같은 놈의 기도라도 들어주신다면 한 번만이라도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아. 기도하겠어. 저는 살그머니 문을 닫고 다시 긴자로 자서 다시는 그 아파트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교바시 근처의 스탠드바에 정부 같은 처지로 지내면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마다 인간이란 것이 무서워서 술을 한 컵 벌컥 마시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꼭 술을 끊으라고 권하는 처녀를 만나게 되어 결혼하고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이다.

“요시코 미안. 마셔버렸어.”
“어머 장난치지 마세요. 술 취한 척하고.”
이런 했습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니 정말이야. 정말 마셨다고 취한 척하는게 아니야.”
“놀리지 말아요. 못됐어.”
전혀 의심하려고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보면 알 텐데 말이야. 오늘도 대낮부터 마셨어. 용서해줘.”
“연기도 잘하시네.”
“연기가 아니라니까 바보 키스할 테야.”
“해봐요.”
“아니야 내게는 자격이 없어. 각시가 되어달라던 것도 단념하는 수밖에. 얼굴을 봐, 빨갛지? 정말로 마셨다니까.”
“그야 석양이 비치니까 그렇죠. 날 속이려 해도 안 될걸요? 어제 약속했는데 마실 리가 없잖아요? 손가락 걸고 약속한걸요. 술을 마셨다니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요조는 하얀 얼굴의 더러움을 모르는 처녀의 숭고함 앞에서 결혼하자고 결심을 한다. 결혼해서 봄이 되면 둘이서 자전거 타고 아오바 폭포를 보러 가야지 꿈을 꾸고는 바로 그날 단칼 승부로 처녀성이라는 요시코의 꽃을 훔쳐 결혼한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 생활은 끔찍한 비극으로 끝난다. 남편인 요조의 눈앞에서 아내가 강간을 당한 것이다.

어느 새 등 뒤에 요시코가 삶은 콩을 수북하게 담은 접시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하고는.”
“알았어. 아무 말도 하지마. 너는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니까. 앉아. 콩 먹자.”
나란히 앉아서 콩을 먹었습니다. 아아 신뢰는 죄인가요? 상대방 남자는 저한테 만화를 그리게 하고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거드름을 피우며 놓고 가는 삼십 세 전후의 무지하고 몸집이 작은 상인이었습니다. (…)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비루하게 쭈볏쭈볏 나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 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버렸습니다. (…) 아내는 그녀가 지녔던 귀한 장점 때문에 능욕 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장점이라는 것은 남편이 예전부터 동경하던 순결 무구한 신뢰심이라는 한없이 애잔한 것이었습니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를 묻던 요조의 삶은 알코올 중독에서 모르핀중독으로, 정신병원으로, 어느 바닷가 오두막으로 흘러간다. 나는 요조를 늘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무 좋은 사람들은 패배를 선택한다. 너무 좋은 사람들은 비정상적 인간들이 되어간다. 너무 좋은 사람들은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보지 못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너무 좋은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다 바치고서야 간신히 희미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너무 좋은 인간들은 패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 안에 영원히 순수하게 의문에 가득 찬 인간을 담고 있다. 우리들은 너무 좋은 사람들의 아픔과 질병을 앞에 두고 가끔 아주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마치 정신병원으로 들어가는 요조를 앞에 두고 호리키가 아름다운 미소를 짓듯이) 나는 궁금하다. 신은 육 일을 보내고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좋은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휴식을 취하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 아니다. 신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라고 선언하며 우리가 새로운 십자군이 되어 분연히 떨쳐 일어날 때 나는 불현듯 요조의 모습에서 신의 모습을 본다. 요조의 가슴 떨리는 호소력은 어딘가 성스러운 데가 있다. 우리 시대의 신은 요조처럼 슬프고도 그렇게 핏기 없이 연민에 가득 차 우리 옆에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삶 역시 병들어 있다는 것을, 실은 고뇌 없이 타락해 있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요조를 구하러 뛰어가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어찌할 수가 없다. 큰 진실 앞에 눈이 멀어 버린 오이디푸스 왕의 그 비극처럼 이미 요조는 아주 오래전부터 비극 속에 있다. 우리는 또 비극 하나를 배운다. 우리의 황량한 삶 위에 어떤 빛이 흔들리며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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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

사양 ·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저/<송숙경> 역9,0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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