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해설의 달인
프란츠 부케티츠
부케티츠가 생물학을 전공했든 하지 않았든 그의 생물학 지식은 엄청나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쌓은 지식을 쉽게 풀어 설명할 줄도 안다. 『진화는 진화한다』(이은희 옮김, 도솔출판사, 2007)는 이를 잘 말해주는 좋은 보기다.
프란츠 부케티츠(Franz M. Wuketits, 1955~)의 책은 다섯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이 다섯 권의 한국어판에 딸린 부속텍스트를 근거로 부케티츠의 신원부터 파악해보자. 우선 부케티츠가 오스트리아 출신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의 전공에 대해선 번역서의 곁 텍스트마다 약간씩 차이가 난다.
가장 최근에 번역된 책의 표지 날개 지은이 소개 글은 부케티츠를 “진화 이론가이자 과학이론가”라고 한다. 번역서 출간 시 부케티츠의 저서 숫자가 다소 크게 차이지는 책 두 권은 그의 철학적 면모에 주목한다.
“그동안 27권의 저서를 펴냈”다는 책에선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 반면, 14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집이 있다는 책은 “대학교에서 과학철학 및 생물철학을 강의하고 있다”고 한다. 나머지 두 권은 “생물학자”라는 직함을 공유한다.
부케티츠가 생물학을 전공했든 하지 않았든 그의 생물학 지식은 엄청나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쌓은 지식을 쉽게 풀어 설명할 줄도 안다. 『진화는 진화한다』(이은희 옮김, 도솔출판사, 2007)는 이를 잘 말해주는 좋은 보기다. 이 책은 간단명료하면서도 거의 완벽하게 진화를 설명한다.
어떻게 이런 재주가 있는지 궁금증이 일 정도다. 사실 나는 부케티츠의 다른 책은 약간 시큰둥하다. 이 책이 보여주는 높은 가독력은 번역자의 역량에 힘입은 바 크다. 물론 다른 책들도 다 잘 읽힌다. 이 책의 번역자는 과학고전 카페 주인장 ‘하리하라’와 동명이인이다.
부케티츠가 말하는 『진화는 진화한다(Evolution)』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진화’라는 주제와, 생물학에서 현대 진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성과와 문제점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정신사의 몇 가지 흥미로운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고 덧붙인다. 부케티츠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진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진화는 어떠한 정적인 개념이 아니며 모든 종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변화하거나 멸종되고 다른 종에 자리를 내준다는 사고”다.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에 대한 설명이 다양하다고 해서 사실, 즉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이른바 ‘창조과학’에 심한 거부감을 갖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자연선택의 결과는 다음 세대에서 특정 유전자 빈도의 증가 혹은 감소로 나타난다. 즉 이것은 연속된 다음 세대에서 유전자 빈도의 변화를 조정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화이다.” 다시 말해 “진화는 돌연변이와 유전자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 유전적 변종의 우연한 생산과 다윈의 눈먼 시계 수리공처럼” 의도하지 않게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에 기인한다.”
다른 개념들에 대한 정의 역시 깔끔하다. 고생물학은 “멸종된 생물에 대한 연구”이고, 생태학은 “생명체와 그들 환경의 상호작용에 대한 학문”이며, “유전적 구조란 어떤 식물군이나 동물군에서 공통된, 계통적으로 동일한 유전형질의 총합을 말한다.”
한편, 부케티츠는 진화론의 ‘저작권’에 관해 약간의 시각 교정을 유도하기도 한다. “어떤 이론이 계통사적 종의 변화 과정과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면 인식론적, 과학이론적 관점에서 이러한 이론을 비로소 진화론이라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최초의 진정한 진화론자는 라마르크라는 것이다. 다윈은 “진화를 다시 한 번 새롭게 발견한 것일 뿐이다.”
다양성은 진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양함은 진화의 본질로 볼 수도 있다. 먼저 진화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점진주의와 단속평형설은 서로 배타적인 대안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완적이다. 왜냐하면 진화는 한 번은 이렇게, 한 번은 저렇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물의 엄청난 유전적 다양성은 암수의 결합으로 후손을 낳는 방식인 유성생식에 의해 보장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유전자 재조합의 과정이 진화에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양성은 자연선택을 위한 ‘기본 자원’을 제공하기도 한다. “진화의 원동력은 바로 이러한 유전적 다양성이다.”
이제 진화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순서다. 진화에서 과거의 형태가 현재 상태를 준비하는 단계라고 해석하는 경향은 “단적으로 틀렸다.” 진화에서 어떠한 미래의 계획은 없으며 단지 ‘순간적인 결정’이 있을 뿐이다. “진화의 경향은 특정 진화 유형으로 추정해 볼 수 있지만 미리 결정되어 있는 과정은 아니며 그때그때 특정 환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화 과정은 “복잡한 계통사적 변화를 역행할 수 없다는” ‘불가역성의 원리’를 따른다. 종의 사멸은 진화의 근본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는데, 부케티츠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어마어마한 대멸종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인간을 지목한다. “어떠한 개별 종도 그렇게 많은 다른 종에게 이처럼 큰 위협이었던 적이 예전에는 결코 없었다.”
이와 함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만물의 영장’이자 ‘진화의 정점’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진화생물학의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구 중심적 낡은 세계관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이미 반증된 것이다.”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고정관념도 사실에서 어긋난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진화론자는 진화가 일방적으로 진보한다는 사상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사실 진화에는 의도도 목표도 없다. 진화에서 자동적으로 진보를 강요하는 법칙도 알아낼 수 없다. 결국 생명체 종을 ‘더 좋은’ 또는 ‘더 나쁜’ 것으로 평가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잘못일 것이다.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적 생존이다.”
『멸종 사라진 것들(Ausgerottet-ausgestorben)』(두행숙 옮김, 들녘, 2005)에서 부케티츠가 “다루려는 주제는 ‘거대한 죽음’, 다시 말해서 생물의 종(種)과 (인류) 문화의 사멸에 관한 것이다.” 인용구의 다섯 줄 위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독일의 작가”라고 한 것은 오류다. 베른하르트는 부케티츠처럼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내 눈길은 종의 사멸에 머문다. 모든 유기체는 시간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멸망이란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공감한다. 인간들이 찢트리고 까부는 거 다 한때의 일이다. 지질학의 시간으로 봤을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책은 실용 서적”이라는 부케티츠의 판단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
“인간은 선사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동물을 원래는 그것들이 살지 않았던 지역, 즉 그것들이 서식하지 않던 지역으로 들여옴으로써 생태계의 재앙을 일으키곤 했다. 특히 그런 피해를 많이 입었고 지금도 입고 있는 지역은 바로 섬이다.”
뿐만 아니라 부케티츠는 선사시대의 인간들이 매머드를 멸종시켰을지도 모른다는 관련 연구자들의 추측에 동의한다. ‘고상한 야만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은 어째 좀 거북하다. 그럴 수도 있지만 서구문명과 백인들의 잔학상을 면피하려는 의도는 없는지 의구심이 들어서다. 그렇다 해도 부케티츠의 ‘야만인 책임론’은 온건한 편이다.
“현재 벌어지는 멸종은 다분히 인간의 조직적인 행위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 근래 이후 최근까지 이처럼 종들이 사멸하는 것은 인간의 기술 및 팽창하는 경제 발전과 직접적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사건은 진화의 긴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과학의 희생자들의 생애와 비극적 최후를 간추린 『이타적 과학자-과학사를 뒤바꾼 28가지 죽음의 비밀(Der Tod der Madame Curie)』(도복선 옮김, 서해문집, 2004)을, 부케티츠는 “과학을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그런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런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가 말하는 과학에 필요한 것과 과학자들의 속성은 귀 기울일 만하다.
과학에도 다양성이 긴요하다. “노련한 실험자만큼이나 훌륭한 이론가도 필요하다. 과학에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빠트리는 법이 없는 관찰자는 물론 커다란 맥락들을 짚어 내며 전체적인 방향을 세우는 사상가들도 있어야 한다. 개별 사실들을 부지런히 모으는 수집가도 필요하지만 마찬가지로 완전하지 않은 부분적인 지식들만으로도 포괄적인 이론의 틀을 세울 줄 아는 공상가도 필요한 것이다.”
과학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거나 발견하고, 이론을 만들어 그것을 입증함으로써 평범한 일상생활의 범위를 넘어서서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외엔 과학자들도 갑남을녀와 다를 게 없다.
과학의 희생자에 마젤란, 제임스 쿡, 로버트 팰턴 스콧이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다. 우리 눈에는 다가올 제국주의 시대의 첨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마젤란과 제임스 쿡 선장이 들어간 것은 유감스러울 정도다. 부케티츠 또한 이런 점이 걸렸는지 모험가를 다루면서 약간 쭈뼛하다. 독자에게 애써 동의를 구한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제임스 쿡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긍정적인’ 면들을 발견하여 인정해 주었다. 영국의 특권적인 왕족 및 귀족 사회에서 그를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특별히 금으로 된 메달을 만들었다는 것만 보아도 그의 사람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여기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다소 선한 제국주의의 첨병은 고상치 못한 야만인보다 낫다. 둘째, 영국 특권층의 잣대가 어떤 사람의 인품을 판단하는 척도다. 영국 특권층은 아마도 제임스 쿡 선장이 그들의 배를 불려준 탐험에 대해 간단한 사례를 한 건 아닐는지. 나는 마젤란과 제임스 쿡의 “탐험욕”을 ‘탐욕’으로 읽는다.
부케티츠는 사회생물학에 대해서도 다분히 ‘온정적이다.’ 『사회생물학 논쟁(Gene, Kultur und Moral)』(김영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1999)의 집필 의도가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논쟁을 다소나마 ‘사실에 맞게 객관화’시키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나는 사실 논쟁의 개요보다는 “생각이 짧을수록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같은 수사적 표현에 솔깃하다.
물론 과학적 “이론이 불쾌감을 자아낸다는 이유 때문에 결코 틀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이유만으로 옳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양자택일은 사실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연)’과 ‘환경(문화)’은 둘 다 인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문화주의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내가 사회생물학을 약간 더 ‘의심’하는 이유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사회생물학은 지배층의 논리로 보인다. 생물학과 사회학을 통합한다는 명분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적어도 우리나라 대학에서, 학부에 법대가 없어진 몇몇 대학이나 법대가 여전히 있는 대학이나, 문과 계통의 학과별 변별성은 사라진 것 같다.
『자연의 재앙, 인간(Naturkatastrophe Mensch. Evolution ohne Fortschritt)』(박종대 옮김, 시아출판사, 2004)은 “오랫동안 인간의 머릿속을 지배해 온 한 견고한 환상의 발전 과정과 종말을 기술하고 있다.” 부케티츠는 “이 책에서 진보라는 이념을 생물의 진화와 사회문화적 진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룬다.
아무튼 나는 에드워드 윌슨의 낙관적 전망에 대해 뾰로통하다는 점에서 프란츠 부케티츠와 견해가 일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인간이 이룬 이 문명에 대해 보다 더 신뢰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멸종 사라진 것들』,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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