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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북샵에서의 깨달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영원히 써지지 않을 소설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려 애쓰는 책 사냥꾼이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좋다. 좋은 책을 찾을 수 있다면, 쓸 소설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뉴욕의 서점에 대해 써 보는 것도 좋은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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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전, 나는 뉴욕의 트라이베카에 있는 미스터리 북샵(The Mysterious Bookshop)에 들렀다. 문을 열자마자 육 미터는 될 법한 높은 천정 끝까지 쌓여 있는 책장이 나를 압도했다. 서가 곳곳에는 사인본을 알리는 쪽지가 책 곳곳에 있어서 많은 추리소설 작가들이 다녀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입구 쪽에 책을 정리하는 점원은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조용히 일을 하고 있다. 또 한 명, 안쪽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로, 나를 힐끗 쳐다보며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한다.


그렇다, 손님은 오로지 나 한 명뿐. 비 내리는 평일 오전에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한가한 사람들은 없는 것이다. 이런 거리에, 이런 날씨에, 이런 서점을 찾는 사람은 아침에 벌떡 일어나 읽고 싶은 추리소설을 생각해낸 사람이거나 나 같은 사람뿐일 것이다. 자료 수집에 지친 어설픈 소설가 말이다.

책을 구경하는 척 하며 두리번거리다 멋진 가죽 소파를 발견했다. 서점 한가운데 자리 잡은 소파는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흠이 없고, 푹신한 것 같으면서도 딱딱하게 보였다. 그 소파에 앉자마자 힘이 주욱 풀려버렸다. 피곤했던 다리와, 무거운 가방 때문에 뻐근했던 어깨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건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이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는 내가 찾는 책을 찾을 수도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그런 종류의 불길한 생각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손쓸 수 없게 번지는 암처럼 나를 짓누르고 있다.


뉴욕의 지하철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는지, 혹은 뉴욕 지하철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하철을 돌아다닌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3년 동안 뉴욕을 오가며 쓴 소설로 덜컥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뉴욕의 지하철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한국 남자의 이야기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를 쓰기 위해, 어둡고 지저분한 뉴욕 지하철을 매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나는 워낙 걱정이 많고 자신감이 없는 소심한 인간이라 그렇게라도 해놓지 않으면 지하철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써놓고 보니 과연 그렇게 지하철을 돌아다닌 고생이 도움이 됐을까 의문이 들었다. 지하철을 헤맨 건 자료 조사라기보다는 소설을 마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마치 교과서에 쓸데없이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했던 것처럼, 매일 알람시계를 끄고 한 시간을 더 자는 것처럼 말이다.

소파에 앉아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가져 본다. 두 번째 장편소설 『북 원더러(Book Wonderer)』에 너무 욕심을 많이 낸 것은 아닐까? 과연 자료 조사가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

“서진 씨, 아이디어는 좋지만 책에 관한 소설은 좀 고지식하지 않아요? 세상의 모든 이야기의 해결책이 들어 있는 신비한 책을 찾는 것까지도 봐 줄 수 있어요. 그런데 굳이 주인공이 뉴욕의 서점을 뒤질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나라에도 서점 많아요, 헌책방도 많고. 비밀의 책은 꼭 영어로 써져 있는가요? 뭐 무엇보다도 요즘 뉴욕 책이 너무 많이 나온 것도 아시죠? 첫 번째 장편소설도 뉴욕이 배경이니까, 두 번째는 좀 다른 곳을 배경으로 내용도 좀 밝고 톡톡 튀게 그런 걸로 한번 해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담당 편집자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차라리 뱀파이어나 좀비가 나오는 소설이면 훨씬 쓰기가 편했을 텐데 말이다.

“일 년에 백 명의 신인 작가가 나왔다 쳐요. 오 년 뒤에는 그중에 몇 명이 남는지 알아요? 열 명도 많은 편이지요. 그럼 십 년 뒤에는요? 서너 명도 남지 않아요. 그만큼 힘든 길이니까 작품 선택도 신중해야 하는 거라구요.”

마흔 살이 넘어버린 노처녀 편집자는 그런 식으로 나를 무척 걱정해주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원고 마감은 꼭 지켜요. 그것만 약속해 줘요.”

그렇다. 원고 마감이 언제였더라……. 계약을 한 지 일 년이 넘어갔으니 원고 마감 기간도 훌쩍 지나버렸다. 편집자에게 온 메일은 일부러 읽지 않는다. 마감은커녕 원고지 1,000매의 장편소설에 100매도 채우지 못하고 이렇게 서점을 돌아다니고 있다. 뉴욕에 온 지도 이제 최대한 머물 수 있는 육 개월이 다가온다.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지 않으면 정말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기획을 잡고 뉴욕으로 다시 날아온 것까지는 쉬웠다. 네 번째 뉴욕 방문이어서 지리도 익숙하고, 특색 있는 서점에 대한 짧은 기사도 써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일단은 그런 서점들을 돌아다녀보고, 가능하면 주인이나 손님과 이야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어보기로 했다. 내가 제일 애용하는 스트랜드(Strand) 중고 서점부터 시작해서, 대형 서점 체인 반즈 앤 노블(Barnes and Noble), 독특한 동네 서점인 쓰리 라이브즈 & 컴패니(Three Lives & Co.), 모닝 사이드 서점(Morning Side) 등등…… 발길 닿는 대로 서점을 방문하면서 보냈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저기…… 여기서 잠을 자면 안 되는데…….”

눈을 떠 보니 머리가 희끗한 점원이 안경테를 콧잔등까지 내려 나를 쳐다보고 있다. 여기는 미스터리 북샵이고 나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들어 버린 것 같다.

“아,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그만…….”

“이 소파에서 잠드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하하. 편하긴 편하지요. 혹시 찾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뇨. 그냥 어떤 서점인지 둘러보고 있어요. 소설을 쓰고 있는데 서점이 배경이라 말이죠.”

소설을 쓰고 있다는 말에 점원의 눈이 반짝거린다.

“아, 그래요? 어떤 소설인지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나는 『북 원더러』의 대충의 이야기를 해준다.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궁금한 것도 질문을 하는 통에 나는 신이 나서 생각하지 못한 디테일까지 섞어서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 ‘나’도 소설가이고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다가 우연히 세상 모든 이야기의 구조를 풀 수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책을 찾기 위해서 뉴욕의 모든 서점을 뒤지게 되고, 도중에 책 사냥꾼을 만나게 된다. 책 사냥꾼들의 말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책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그중에 인류가 꼭 남겨야만 하는 책들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고 있다. 그들은 그런 중요한 책들을 서점에서 훔쳐서 새로운 도서관을 만들고 있다. 주인공이 찾고 있는 책은 그들도 찾고 있는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모아 그 책을 찾으려고 하는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해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노트북 앞에 앉아 있고, 지난 저녁 남은 밥을 데워 먹고, 오후가 되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 서점을 배회하는 것이 나의 일과다.


“음,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Fahrenheit 451)』하고도 내용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나름대로 재밌을 것 같은데 왜 써지지 않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쓰려고 해도 도통 문장이 되지 않습니다. 첫 작품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한다는 기분으로 썼지만 두 번째 작품은 첫 번째보다 좋아야 하고,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심한 탓인지…… 쓰는 문장, 이야기가 다 어디서 읽어본 것 같아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아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저도 한때는 출판사에 근무했었답니다. 이십 년 정도를 일하다가 작은 미스터리 서점을 차렸죠. 한창 때는 매출이 꽤 되기도 했는데 삼 년 전에 처분했어요. 대형 서점도 생기고, 인터넷 서점도 생겨서 창고 같은 작은 서점에 일부러 들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늙어가니까 힘에 부친 것도 사실입니다만……. 아무튼 그 뒤부터는 이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수많은 작가들을 만날 수 있죠. 특히, 스릴러는 미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르고, 이곳은 제일 큰 스릴러 전문 서점이니까 작가들이 알아서 찾아오곤 해요. 조용히 자신의 책에 사인하고만 사라지는 작가들도 있어요.

이삼 년에 한 번 정도 좋은 작품을 낼까 말까 한 작가들이 대부분이에요. 그 정도 쓸 수 있다면 다행이죠. 모든 작가가 딘 쿤츠나 제임스 패터슨은 아니잖아요. 저기,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물론 매일 뭔가를 쓰는 것은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만, 쓰여지지 않는 이야기를 영원히 붙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네…….”

이야기를 듣고 낙담과 희망이 동시에 느껴진다.

“몇 개 정도의 서점을 둘러봤죠?”

“음…… 한 오십 개 정도입니다. 서너 번씩 둘러본 곳도 많고. 뉴욕에 있는 대부분의 서점은 가봤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서점은 가보셨나요?”

점원은 서너 개의 서점 이름을 댄다. 들어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서점이다.

“생각 외로 숨겨진 서점들이 많답니다. 계속 돌아다녀 봐요. 그런데 굳이 모든 서점을 돌아보려고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더 명쾌한 플롯 해결 방법이 나올 것도 같고……. 어떤 책을 읽으면 힌트도 얻을 것 같아서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서점을 돌아다닐수록 책은 쌓여만 가고, 읽을 것이 쌓일수록 쓸 수가 없습니다. 모든 걸 잊고 이렇게 서점을 돌아다니면 마음이 편해져요.”

점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차라리, 그냥 둘러보았던 서점에 대해서 써보는 건 어때요?”

“네? 그건…….”

“때로는 소설보다 논픽션이 더 픽션 같으니까. 어차피 소설을 쓰기 힘들다면 지금까지 돌아다닌 것을 바탕으로 편하게 써봐요. 어쩌면 그렇게 워밍업한다면 소설의 돌파구가 마련될지도 몰라요. 음, 어디 보자, 뉴욕의 서점에 대한 책이 나온 지도 십 년은 넘었으니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네요.”

콰광! 하고 갑자기 천둥이 쳐서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번쩍 하는 빛이 창 밖에서, 그리고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내가 아직도 가지 못한 서점 리스트를 받아 적는다. 다섯 개의 서점이다. 각각의 서점을 방문하면서 또 다른 서점을 추천 받으면 그 리스트가 늘어날지도 모른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서점을 나섰다. 비는 언제 그쳤는지 구름만 잔뜩 끼어 있다. 저 멀리서 한 줄기 빛이 구름을 뚫고 내려온다. 나는, 메모지에 첫 번째로 적혀 있는 서점을 향해 출발한다. R 지하철을 타고 서너 정거장만 가면 되는 곳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영원히 써지지 않을 소설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려 애쓰는 책 사냥꾼이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좋다. 좋은 책을 찾을 수 있다면, 쓸 소설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뉴욕의 서점에 대해 써 보는 것도 좋은 일일 테니까.


The Mysterious Bookshop
//www.mysteriousbookshop.com
58 Warren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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