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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와 자갈치를 연결하는 통통배의 조의치(65세) 선장. 백 년 세월 동안 두 개의 다리가 생겼음에도 이 배가 아직까지 운행되는 까닭은 순전히 시간 때문이다. 무슨 얘기인지 알고 싶으면 직접 타보시라. | |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던 가을 어느 날, 나는 부산 남포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신분이었지만, 그 무렵 내가 스스로에게 설정한 정체성은 세상의 뒷골목에 숨어 담배나 태우는 불량한 부랑아였다. 가을 하늘은 높았고 태극기를 가슴에 단 선수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제 기량을 뽐냈고 TV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며 조금씩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대한민국의 화려한 번창을 자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일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정박한 선박들에서 흘러나온 녹슨 쇳덩이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공감각적으로 뒤섞인 자갈치시장을 느릿느릿 배회하다가 대로를 건너 남포동 거리를 기웃거렸다. 문우당서점(지금은 길 건너 자갈치시장 초입으로 옮긴 것으로 안다)에 들러 시집 몇 권을 뒤적이다보면 어느덧 저녁. 커다란 천막 아래 순대와 김밥, 튀김 등을 늘어놓은 국제시장 먹자골목을 지나쳐 미국문화원 맞은편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팠고, 마음은 그보다 몇 숟갈 더 허기졌던 열여덟 살 무렵의 풍경. 내 기억에 입력된 부산이란 도시를 ‘플래시백’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다.
거칠고 투박하고 타인에 대한 애정과 간섭을 혼동하는 다혈질의 남자들이 부각되는 도시. 반도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크고 작은 산들을 흉골 삼아 바다로 흘러가는 그곳에서 나는 늘 외톨이의 심사였다. 내가 실제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나는 그곳이 고향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부산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남의 집에 놀러 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머쓱해하다가 머쓱함을 감추기 위해 공연히 이죽거리기나 하는 섣부른 사춘기 소년만 떠오를 뿐이다.
거두절미와 의뭉스런 무뚝뚝함으로 무장된 그 도시의 화법 자체가 내게는 왠지 부담스러웠다.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내성적인 소년에게 그들은 당사자의 의도 따위 무시한 채 속엣말을 강탈하려 드는 듯 보였다. 표준말을 쓰는 남자아이에 대해 또래의 아이들은 지나친 호기심 내지는 경멸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럴수록 난 더 오그라들었고, 그럴수록 더 나는 그들의 박력 넘치는 사투리에 맞서 또박또박한 표준말을 구사하려고 애썼다. 몇몇 친구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그들의 외곽으로 한 발짝 빠져나와 홀로 거리를 떠도는 게 좋았다. 사람은 무서웠지만, 거리는 반가웠던 시절. 모든 사람들을 불특정 다수의 풍경으로 치환시키며 오로지 나만의 발길을 또박또박 받아주던 거리. 만인에게 호화롭고 개인에게 소박했던 그 거리에서 나는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백하건대, 나는 부산의 숨은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하거나 그곳 사람들의 친밀감을 정겹게 윤색해 전달해줄 수 있는 적임자가 아니다.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그려져 있는 부산의 지도는 야트막한 산들에 닥지닥지 붙어 있는 특유의 주택가 풍경처럼 파편적이고 비 오는 저녁 텅 빈 용두산공원의 풍경처럼 스산하며 드센 고성과 주먹이 무시로 날아드는 영도구 남항동의 어느 술집처럼 처연하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바다를 끼고 있는 동네지만 가슴이 탁 트이는 태종대의 절경이나 해질녘 달맞이 고갯길의 운치에 대해선 도무지 말할 게 없다. 해운대나 태종대는 부산에 살던 내게도 관광엽서 속 풍경이나 다름없었다.
여름방학 때 가족들과 곧잘 갔던 해수욕장도 해운대나 광안리가 아닌 다대포였다. 사상공단을 거쳐야 갈 수 있는 그곳은 해운대보다 백사장이 넓지도 않았고 근거리에 공장들이 즐비한 탓에 주변 경관이 수려하지도 않았다. 그 척박한 갯벌에서 튜브를 타고 놀던 어린 시절이 아련하긴 하지만, 골수에 더 진하게 박혀 있는 것들은 웃통을 벗어젖힌 어른들의 취중 난동과 살벌한 욕설들뿐이다. 아마도 지금 내 나이 또래쯤 됐었음 직한 사내들이었을 것이다.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작렬하던 그들의 전면적인 폭력성이 어린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의 놀이터가 어른들의 난장판으로 표변하던 장면을 목격하며 나는 바다의 물결이 새파랗게 질려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 가슴 한가운데 고여 그 자체로 폐수가 되어버리는 반도의 끝, 검붉게 지쳐 가라앉는 바다.
그런 원체험들 탓일까. 중학생 시절을 서울에서 마치고 다시 돌아온 부산을 나는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어울리던 아이들에 비해 왠지 더 조숙해 보이고, 그만큼 거칠어 보이는 남자아이들 앞에서 나는 어린 시절 입에 붙어 있던 부산 사투리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나는 그 투박한 아이들이 하나같이 짐승처럼 보였다. 그래서 무서웠지만, 무서운 만큼 그들과 닮고 싶지 않다는 오기도 생겼다. 혼자 고고하려는 노력이었다기보다 일종의 보호막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짐승의 보호막이 그렇듯 어딜 가도 사람들의 귀를 붙드는(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부산 사람들은 외지 말투에 유독 민감한 편이다) 말투 탓에 되레 도드라지기 일쑤였다. 가리고 싶은 욕망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일란성쌍둥이라는 사실을 그 무렵 깨달았다.
그 이중의 욕망은 나를 고양시키기도 했고 상처받게도 했는데, 그 지난하고도 복합적인 심리가 오래 공전하는 가운데 조금씩 부산이 익숙해졌다. 처음엔 짐승 같았던 아이들이 서울에서 만났던 아이들보다 훨씬 솔직하고 속 깊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극렬한 말투와 몸짓들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오랫동안 입을 닫은 채 나는 거리를 떠돌았다. 하고 싶은 말들이 가슴속 울혈로 만져지던 그 시절, 나는 거리에서 몽상하는 실어증 환자였다.
국제시장 근처 광복문고(지금은 사라졌다고 들었다)에서 책들을 뒤적이다가 용두산공원을 지나 중앙동 쪽으로 쭉 걸어내려가면 사거리 한쪽에 허름한 건물(삼층이었는지 사층이었는지 잘 기억 안 난다)이 한 채 있었다. 연출가 이윤택이 설립한 ‘가마골 소극장’이 그곳에 있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찬 바람이 불면서 곧 고3이 될 내가 학교 도서관보다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지금은 한국연극계의 대부 격이 되었지만, 당시 이윤택은 『시민』『춤꾼 이야기』 등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이자 당시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이른바 해체시 열풍의 첨병에서 문명을 날리던 논쟁가였다. 그는 광복문고를 기웃거리며 알게 된 그 숱한 ‘80년대 시인들’ 중 한 명이었지만, 연극에 몰두한다는 특이성과 근거리에서 상면할 수 있다는 심정적 친연성 덕에 관심이 퍽 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연극실험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가마골 소극장’은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무슨 싸구려 흥신소 사무실 같은 그 좁은 극장에서 특유의 호쾌한 말투로 단원들 사이를 지나쳐가는 그를 먼발치에서 훔쳐보며 나는 숱한 연극들을 보았다. 그의 수작이자 한국연극사의 쾌거 중 하나로 기록된 <오구―죽음의 형식>을 실제로 본 것도 그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속 깊이 감춰진 나 자신의 숨은 욕망들과 대면했다. 그 이후 그곳은 나만의 은밀한 아지트가 되었다. 건성건성 학교 수업을 마치고 야간자율학습 따위 무시한 채 책가방을 메고 ‘가마골 소극장’으로 향하던 그때의 열망마저 없었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더 부산을 불편해했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 열망이 너무도 컸기에 그 외의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들을 애써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그 상극된 심정으로 배회하던 부산의 거리를 돌이키는 일은 나로선 곤혹스러운 일이다. 가장 사랑스러운 나와 가장 가증스러운 내가 여전히 부산의 거리를 떠돌기 때문이다.
부산을 떠나온 지 얼추 십구 년가량 되었다. 부모님이 남해의 한 시골로 거처를 옮긴 이후 부산은 이제 명절 때에도 찾지 않는, 사라진 고향처럼 되어버렸다. TV나 영화에서 가끔씩 보게 잵는 부산의 모습은, 그곳이 번화가든 변두리 주택가든, 여전히 살풍경한 느낌이다. 지겹도록 발에서 떠나지 않는 이 기묘한 반감과 공포가 때로는 애잔하기도 한데, 그건 오래 묵힌 젓갈 비린내 같은 게 끈질기게 입 안에 감도는 느낌과 비슷하다. 더불어 언제나 질척이기만 하는 자갈치시장통의 후텁지근한 바람 냄새와도 닮았다. 뭔가 끈적한 정분이나 막무가내의 사랑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한다.
어린 시절 막다른 골목에서 칼부림하던 동네 형들이나 피 흘리는 팔뚝에 매달려 울부짖던 그들 누이의 심사가 아련하게 겹쳐지는 것도 그닥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부산의 그 모든 것들이 내 몸에서 떨쳐지지 않는다. 나는 부산이 가지고 있는 여러 반감 어린 요소들―예컨대 에두름 없이 직설적인 화법과 즉흥적인 폭력성과 무언가에 대한 전폭적인 애정과 화통한 타협 등이 여지없이 내 안에서 발휘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시로 놀란다. 불손한 사춘기가 아버지에 대한 불만요소를 그대로 흡수하듯 고등학교 졸업 이후 떠나온 부산이 서른을 훨씬 넘긴 지금 내 안에서 여전히 비린내를 풍기며 나의 많은 걸 규정한다는 사실을 힘겹게 긍정하는 중이다.
그것은 감정적 호오나 선택과는 무관하다. 단지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막연한 염오가 내가 꿈꾸고자 했던 것들의 발원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자책만 재확인할 뿐이다. 나는 부산에 대한 이런 감정이 지긋지긋하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함은 지극함의 다른 이름이다. 부산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부산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나를 발견한다. 어린 시절 숱하게 들었던 누군가의 불행한 가족사와, 그것들을 한풀이 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때 전 사내들의 투박한 정념들과, 영악하게 사람의 마음을 훑고 생채기를 내던 악랄한 꼬마들이 여전히 뇌리에 맴돌지만, 나 역시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살아 있고 죽어간 무수한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나를 키운 부산은 어쩌면 그 누구의 부산과도 다를지 모른다. 부산이 나를 낳았다면 나는 나만의 지긋지긋한 부산을 낳았던 것일 테니까. 기억은, 그리고 기억 속의 한 도시는 이렇듯, 누군가의 삶의 중심에서 다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재건설되는 것인지 모른다. 똑같은 광복동 거리라 하더라도 내가 배회하던 그 거리의 의미와 다른 사람의 그것을 어떻게 똑같이 견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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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농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한 장 사진으로만 남았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 세상은 온통 비어 있다. 쉴새없이 공간을 헤집으며 존재하고자 애쓰는 것들의 세상. 존재란, 시간 위에 세워진 빈집이다. | |
몇 달 전 이틀 일정으로 부산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고향이 그리워서라기보다 오로지 자갈치시장의 꼼장어를 먹고 싶어서였다. KTX를 타고 저녁에 서울역을 출발해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자갈치시장으로 달려갔다. 특유의 꼬들꼬들하고 고소한 맛을 오래 음미하다가 둘러본 풍경들은 이십 년 전 가슴 먹먹한 열망만을 품은 채 음울하게 배회하던 한 소년의 인상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거리가 조금도 서먹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이십 년 만에 뭔가 다시 시작된다는 이 막연하지만 분명한 느낌. 산 채로 토막난 꼼장어의 꿈틀거림이 느낌표와 물음표를 번갈아 재연하고 있었다. 고향도 나도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자체로 충실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건 서울의 어떤 꼼장어집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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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느 동네인지는 기억에 없다. 내 기억은 여섯 살 이후부터 몇 개의 스냅으로 시작된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부산에 내려가 문학과 음악, 술과 담배를 독학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것들을 끊지 못한다. 서울에서 살면서 부산 사람을 만나면 반가움과 짜증이 교차한다는 걸 수차례 경험을 통해 알았다. 불편하지만 사랑하고 달아나? 싶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이라고 부산을 잠정적으로 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