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을 때가 언제인지 아니?”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을 때?”
“아니.”
“불치병에 걸렸을 때?”
“아니.”
“독버섯이 든 수프를 마셨을 때?”
“아니. 바로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
이야기는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의 남편은 중학교 영어교사였다. 동시에 그는 아마추어 레슬러였는데, 학교에 레슬링부를 만들어 지도 교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방과 후 레슬링 연습 시간 때였다. 지도하던 학생과 파트너가 되어 스파링을 하던 중, 아이가 건 기술이 적중하면서 그의 몸이 허공에 떴다가 매트 밖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머리가 바닥에 제법 세게 부딪혔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곧 툭툭 털고 일어났고, 그렇게 그날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며칠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 선생은 부인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네?”
“아, 그런 의심이 아니구요. 부인이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친구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진짜 아내는 어딘가로 가버렸고 다른 가짜 아내가 진짜 아내 흉내를 내며 집에 있다는 겁니다.”
“미쳤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업이나 뭐 다른 일은 아무 이상 없이 잘 하고 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야 문제의 원인이 밝혀졌다. 그는 ‘카푸그라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뇌질환을 앓고 있었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가벼운 뇌출혈이 일어났고, 그 부분이 하필이면 친밀감에 대한 정보를 관장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미친 게 아닙니다. 진짜 부모라면 응당 느껴야 할 친밀감이 전해지질 않기 때문에 자기 부모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부인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말해 아주 가까운 사람을 낯선 사람처럼 느끼는 거죠.”
그들은 이혼하지 않았다. 언젠가 ‘진짜 아내’가 돌아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 믿는 남편과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녀는 그렇게 시간을 견딘다. 그러다가 부부는 이민을 결심한다. 어차피 그에게 낯선 환경이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면서 그들은 새로운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친밀감에 굶주려 있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밀회를 갖는다. 1년에 한 번씩,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비밀스러운 만남. 그것은 깊은 죄책감을 동반한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알아보지도 못하는 남편에게 웬 죄책감이냐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죄책감은 좀 복잡한 성질의 것입니다.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녀가 죄를 고백해도 남편은 무심할 겁니다. 진짜 아내가 아니니까요. ‘그럴 줄 알았어. 넌 가짜니까. 내 진짜 마누라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바람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를 잘 모르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뇌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에 부딪치면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결단을 내린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친근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엄마와 꼭 닮은 사람을 봤을 때,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저 여자는 가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병을 카푸그라 증후군(Capgras' Syndrome)이라 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카푸그라 증후군’이라는 병을 처음 알게 되었다. 신체의 극히 작은 부분이 마비되었을 뿐?데, 한 사람의 인생이 극적으로 뒤바뀔 수 있다니.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함께 교감했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릴 수 있다니. 과연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억이 사라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뇌 과학자 이케가야 유지 박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뇌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 때문이었다고.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할머니 때문에 슬프면서도, 할머니의 뇌 속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노라고.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또 다른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나의 외할머니는 올해로 아흔 살. 사람마다 유독 각별한 사이가 있기 마련인데, 외할머니와 나의 관계도 그러했다. 많은 손자, 손녀들 가운데 유독 나를 예뻐하셨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분이었다. 덕분에 비교적 신식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그 연세로는 드물게 스포츠를 좋아하셨다. 지금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던 기억이며, 함께 배드민턴을 쳤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랬던 할머니가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신다. 간신히 걸음을 떼는 모습보다 더 슬픈 건, 기억의 소멸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쩌다 한 번씩 찾아뵐 때면, 손녀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등을 반복해서 물어보곤 하신다. 외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문득 쓸쓸해진다. 언젠가는 내가 누구인지도 못 알아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
누군가와 사별했을 때, 사람들은 죽은 이의 꿈을 꾸는 일이 거의 없다. (…) 칼킨스는 최근에 사망한 사랑하는 이들과 관련된 감정들은 너무나 압도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 노력들(꿈속에서나마 만나려고 하는)은 무용지물이라고 믿었다. 나도 동의한다. 마치 비탄에 잠긴 몸이 쉴 수 있도록 꿈이 마음을 보호해 주는 것만 같다. (…) 하지만 나중에, 훨씬 시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꿈을 꿀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장 생생한 기억들이 흐려지고, 깊은 슬픔이 지나간 후에만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난 알게 됐다.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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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주인공 조제는 사랑하는 츠네오의 잠든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면 나는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굴러다니겠지.” 그들은 츠네오의 부모님 댁에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여행은 결국 이별 여행이 되고 만다. 다리가 불편한 조제를 남기고 츠네오는 떠난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서럽게 펑펑 울면서. 그의 눈물은 가짜가 아니었다. 조제를 사랑했지만, 현실을 감당하기에 그는 너무 어렸고 또 비겁했다.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떨구며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제는 혼자 남겨진다. 그리고 츠네오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는 서서히 잊혀진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당장 죽을 것처럼 아프던 순간도,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아물고 흔적마저 희미해지니 말이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격한 슬픔도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그뿐.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불현듯, 꿈으로 스쳐가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은 세월이 주는 치유의 힘일까. 그런데, 왜 이렇게 쓸쓸한 걸까.
소설
「밀회」는 이별과 고독에 대한 짧은 스케치다. 잊힌다는 것, 그 참을 수 없는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다. 해마다 10월이면, 그녀는 하이델베르크로 달려간다. 그리고 낡은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작고 오래된 호텔에서 상대방의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껴안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녀의 고독은 오롯이 상처로 남아있다.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타인이 되어버린 남자.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며, 두 사람에게 같이 산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바람 부는 계절, 하이델베르크에서의 금지된 만남은 낭만이라는 외피를 걸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그대로 연민이 된다.
모든 이별은 필연적이다.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 묻히고, 또 그렇게 잊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각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그래도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한 삶은 계속된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이따금씩 떠올리기. 무관심이, 무심한 세월이, 바쁜 일상이 그 자리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도록. 그것이 한때나마 깊이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소중했던 한 순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그것마저 없다면 인생은 사막처럼 황폐하고 견딜 수 없이 쓸쓸해질 테니까.
…… 푸치니는, 푸치니는 토스카의 연인 카바라도시에게 애절한 노래를 부르게 한다. …… 아아, 별은 빛나건만 그 빛남은 그대로 돌아오지 않네. 잊힘이 나를 위로하지만 또 나를 아프게 하네.
- 신경숙, 「별은 빛나건만」(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