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북살롱] 예술은 항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 『서양미술사』의 저자 진중권
날카롭고 재치있는 미학자 진중권과 함께 모더니즘 서양미술 읽기!
강연회 날, 그는 전날 뒤풀이로 새벽까지 깨어 있다가 ‘향긋한 북살롱’의 강연을 올 때까지 세 번의 강의를 하고 오던 길이었단다. 지치지 않았을까? 지쳤을 게 분명함에도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번 북살롱에서 ‘서양미술사’에 대해 듣는 것도 좋았지만 그의 다른 모습도 보고 싶었다. 미학자가 아니고, 남들이 말하는 독설가가 아닌 인간 진.중.권의 모습 말이다.
다들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를 진보성향이 강한 독설가로 말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진중권 교수는 진보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미학자로서의 이미지를 먼저 가지고 있다. 정치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터라 진중권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이『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의 저자로서 먼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마저도 내겐 쉬운 책이 아니어서 진중권 교수의 미학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이번 북살롱 강연을 통해서였다. 그동안 그가 펴낸 책은 십여 권이 넘었고 『미학 오디세이』를 비롯하여 예술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호모 코레아니쿠스』와 같은 한국사회를 비평한 책이나 『폭력과 상스러움』처럼 정치를 비평한 책들도 펴낸 미학자이며 문화평론가, 행동하는 실천가이다.
강연을 듣기 전 『서양미술사』를 읽었다. 미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 아님에도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는 꽤 재미있었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 놓은 글과 그에 알맞은 그림들이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 한권으로 고전예술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서양미술사’보다 이해가 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그는 책을 펴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여기저기 강연회가 많이 잡혀 있었던 것 같고 그의 인터뷰 모음을 검색해보니 책과 관련한 질문들보다는 정치적인 질문들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면모가 보인 블로그에서는 경비행기를 조정하는 또 다른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과 매체에 회자되고 있는 터라 그의 강연을 들으러 가겠다고 한 독자가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단다. 나 역시 진중권 교수의 강연회에 간다하니 따라가겠다는 친구가 한두 명이 아니었음으로 그의 인기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강연회 날, 그는 전날 뒤풀이로 새벽까지 깨어 있다가 ‘향긋한 북살롱’의 강연을 올 때까지 세 번의 강의를 하고 오던 길이었단다. 지치지 않았을까? 지쳤을 게 분명함에도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번 북살롱에서 ‘서양미술사’에 대해 듣는 것도 좋았지만 그의 다른 모습도 보고 싶었다. 미학자가 아니고, 남들이 말하는 독설가가 아닌 인간 진.중.권의 모습 말이다. 살짝 아쉬운 점 있었으나 워낙 멋진 강의였기에 그 아쉬움을 뒤로 한다. 언젠가는 그와 또 마주할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한 시간에 걸친 강의를 모두 다 적기엔 무척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알려줘야겠기에 열심히 요약을 했다. 그의 멋진 강연에 누를 끼치지만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효과를 내야 한다?
진중권 교수가 이번 시간에 강연한 내용은 ‘이미지의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강연에 앞서 시리즈로 4권까지 나올 예정인『서양미술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강연을 시작했다. 그 4권의 책이 다 나오려면 한 권씩 일 년을 잡아도 3년은 기다려야 하니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고 책이 닳도록 읽는다면 ‘서양미술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박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예술에서 19세기이전 현대예술 전까지의 미술사를 담고 있는 1권을 비롯하여 현대예술인 모더니즘(Modernism)을 중심으로 유럽의 모더니즘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모더니즘까지 정리한 2권, 앤디 워홀(Andrew Warhola) 이후에 구상회화가 부활한 1960년 이후의 팝아트(Pop art)에서 지금까지를 다룬 3권 그리고 컴퓨터, 디지털 기술과 결합한 형태의 예술을 다룬 미디어아트(Media art)를 다룬 4권까지 ‘미학의 눈으로 읽는’ 서양미술사는 진중권이라는 이름을 떠나 이해하기 쉽고 알찬 서양미술사 관련 책으로 독자의 사랑을 꽤 많이 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고전예술의 주류는 재현예술이다. 책에서도 얘기했듯이 알베르티는 “회화는 자연을 내다보는 창”이라고 불렀다. 그림은 벽과 캔버스 그리고 물감, 삼중으로 막혀 있음에도 우리는 그림을 볼 때 벽이 뚫고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것이 서구예술의 대 이론이다. 이에 대해 반동이 있었지만 크게 보면 서구예술은 고대 그리스 예술을 모범으로 해서 르네상스의 이념을 부활시키고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를 통해 19세기까지 이어지는 고전주의적 라인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예술을 들여다보면 대상성이 사라지면서 재현 또한 사라지고 비구상 회화가 시작된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추상이라고 부르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풍경을 그리고 정물을 그리던 예전과 달리 이미지는 있는데 이미지의 대상이 없는 것과 같다. 그저 그 모든 것을 ‘회화’라는 말로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다. 이게 모더니스트의 특성이라고 한다. 대상성 측면이 아니라 배타적인 측면! 미국의 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을 있게 한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그걸 ‘자기지시성’이라고 불렀다. 즉 대상이 없는, 대상성이 사라진 것이야말로 모던회화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형과 색이라는 회화를 가지고 자연을 탐구하고 습작하며 인물을 그리거나 역사를 그리기 전에 회화부터 탐구해야 한다. 회화의 요소가 형과 색, 그 자유로운 유희가 되는 것이야말로 회화의 모더니티(modernity)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림 속 삼차 공간을 확인할 수 있거나 식별 가능한 대상을 볼 수 있는 것을 프리모던(pre-modern)하다고 그린버그는 생각했다. 2차 대전 이전 유럽 모더니즘은 칸딘스키, 몬드리안, 피카소와 같은 비구상회화를 한 화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아메리카 모더니즘을 보면 아무것도 없다. 잭슨 폴락의 그림을 보면 물감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게 모던한 태도라는 거다.
이후 1960년 앤디 워홀이 등장하면서 그림에서 다시 구상, 재현이 도입되었는데 그린버그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모더니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대상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이고 그건 보수와 프리모던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0년대 어는 평론가가 “1960년 이후에 미국 미술계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당연히 앤디 워홀의 등장이었음에도 그린버그는 “1960년대 이후 미국의 미술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단다.
하지만 팝아티스트들이 볼 때 모더니즘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추상이든 구상이든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모더니스트들은 항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엘리트적인 예술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에 대중들에게 난해한 그림을 보여주더라도 과거로의 회귀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회화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현실에 존재하게 된 허구의 이미지!
우리가 아는 예술은 마술의 힘을 믿지 않았을 때 탄생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림이 실물과 구별되지 않고 착각할 정도로 생생함을 가진 그림들이 존재해왔다. 그래서 포도 넝쿨인 줄 알고 새가 날아와 쪼아 먹으려다 떨어지는 것과 같은 눈속임(Trompe L'oeil)을 보여주었는데 현실과 똑같이 보이게 하는 것, 이것이 고전회화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눈속임은 알타미르 벽화나 라스코 동굴벽화 같은 주술과 다른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면 백인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버펄로를 그렸다고 치자 이런 경우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당신들이 버펄로를 자꾸 그리니까 버펄로가 점점 줄어든다고 말한다. 이건 이미지를 대하는 백인과 인디언의 태도가 다른 것이다. 백인에게는 그 이미지가 그림에 불과한 예술이지만 인디언들에겐 그림을 그리게 되면 인과관계를 설정하여 가상의 원인이 현실의 결과를 낫는 것이므로 주술인 것이다. 이런 방법은 마법이고 마술이다.
진중권 교수가 이 강연회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미지는 디지털시대의 이미지이다. 자신이 그린 무릉도원을 바라보다가 그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화가 이야기나 화공에게 침대 옆에 걸어놓을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여 그림을 건네주자 다음날 그림 속 폭포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말하는 중국황제, 용을 그렸는데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가 눈동자를 그리자마자 하늘로 승천해버린 용 이야기 같은 것은 다 마법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림이 살아서 현실이 되는 것,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것, 이런 것은 위에서 말한 눈속임보다도 더 오래된 마법의 시대에 반영된 이미지들에 대한 전설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보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들어가는 이미지, 즉 ‘가상현실’이다. 사각형 공간인 케이브(Cave)에 들어가면 벽과 바닥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사방으로 영상이 나온다. 몸을 움직이면 적외선 센서가 감지해 영상이 따라 움직인다. 나는 지금 방에 있지만 사실은 영상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으로 도시를 탐험한다. 이게 바로 무릉도원인 줄 알고 그림 속으로 들어간 화가와 비슷한 것이다. 이렇듯 과거 주술적 이미지와 현재의 이미지는 꽤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이미지가 주술적이라면 현재의 이미지는 기술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옛날엔 주관적이었지만 현재는 객관적으로 현실을 만들어 내는 거다. 즉 테크놀로지가 마법을 만들어 낸 셈이다.
그 외 ‘인공생명아트’ 같은 그림이(바이러스가 생성 증식하는 장면을 모니터링하여 애니메이션화 시키는 것) 생명을 갖고 살아 움직이거나 화상으로 강의를 진행하며 아바타를 이용해 출석을 하는 ‘원격가상’ 같은 것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이 잊었던 마법적인 그림이 오늘날 테크놀로지로 부활하여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정말 그림 안으로 들어가는, 살아 있으며 현실화 되는 이미지까지 발전되어 온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재미있다. 역사적으로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가지고 있었어도 마법의 시대에나 존재했을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전설 속 허구의 이미지로 존재하던 것이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현실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예술은 항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독자와의 질문 시간이 주어졌다. YES24 신청 댓글에 올린 질문과 즉석에서 받은 질문까지 정말 많았다. 책에 대한 강연에 살짝 아쉬웠던 나는 책과는 다른 질문들을 하는 독자들로 인해 조금 즐거웠었다는 사실.
그는 대학 때 확실한 공산주의자였으며 데모란 데모는 다 쫓아다녔다고 한다. 학교 수업인 미학보다는 철학 수업을 즐겼으며 두 과목 이상은 꼭 들었다고 한다. 맑스주의 철학과 영미의 언어철학을 들었고 책을 많이 읽었다. 공부보다 책을 사서 읽었는데 헤겔 철학부터 사상서까지 모두 읽었다. 당시 사상서는 번역된 게 없어서 일본어로 된 책을 복사의 복사를 해서 그 글자가 흐려진 것들을 읽었다. 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공산당 선언』, 레닌,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은 물론이고 영어원서로 『자본론』을 읽었고 철학서적도 읽었다. 즉 학교공부는 안하고 책 읽고 데모하고 자기의식화 공부만 했단다. 그런 터라 연애는 할 생각도 못했고 여자들 역시 술 마실 때만 그를 불렀고 연애는 선배들하고 하는 식이었다. 과에서나 운동권에서도 눈에 뛸 만큼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감옥 가는 게 싫었기 때문에 감옥에 안 갈 만큼 데모했던 것 같단다.
서양미술사를 보면 시대와 사조마다 미적 기준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미학적인 측면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본질은 그대로인데 외적 아름다움이 변화한 것인지 궁금하다는 독자에게 미적기준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대적이며 절대불변은 아니라고 한다. 문화와 시기마다 미의 기준이 다를 뿐 사조가 바뀌었다면 아름다움도 바뀌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능한 아름답게 그리려한다.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면 무엇을 아름답게 보고 아름다운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관념들이 다른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신체가 아름답다고 했고 중세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에 불변하는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예술은 항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듯이 기준에 따라서는 추함을 추구한 적도 있는 거다. 살바도르 달리나 뒤샹의 변기 같은 것은 예쁘지 않다. 그렇듯 어떨 때는 그로데스크한 것을 추구하고 또 어떨 때는 추함을 추구했으며 현대예술에서는 새로움을 추구하기도 했다.
디지털이 나오면서 많은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이미지들은 과연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 진중권 교수는 말한다. 포스터모던 이후 그런 것은 없다. 옛날 이미지들을 모두 차용한 것이다. 포토샵으로 장난친 것들을 보면 인상파는 뽀샤시 효과이고 고전주의는 잡티제거 같은 거다. 합성은 예전에 예술가들이 하던 것을 이젠 대중들이 다 하고 있다. 이건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개인화로 인한 것이며 전문 디자이너들이 하던 것을 대중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에도 기준이 있는데 그 이미지가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영화가 있다. 타이타닉에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느 순간 살아난다. 그러고선 도망을 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알고 보니 이 영화는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종합하여 새로운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런 것은 대중이 만들었어도 예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누구나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나 이러한 방식의 기계를 사용하여 시도하는 것을 미디어아티스트라고 한다.
그는 좋아하는 예술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런 질문을 많이 받기는 하는 데 늘 “없다.”라고 대답을 한단다. 직업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는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지 작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 것이란다. 시대에 있어서도 고전주의는 고전주의대로 맛이 있고 현대예술은 현대예술대로, 팝아트는 팝아트대로 맛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화가가 한 명 있기는 한데 바로 ‘고야’이다. 고야는 굉장히 모던하면서도 동시에 포스트모던하고 굉장히 복잡하다. 그래서 시간이 되어 예술가에 대해 쓰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야에 과한 글일 것이라고 한다.
비평가가 예술에 끼치는 영향
나도 그렇지만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현대예술 같은 것은 사실 뚫어져라 쳐다봐도 의미를 모른다. 그래서 고흐의 전시회를 보고 느꼈던 만족감을 현대예술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위해 현대예술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감동을 받으려면 풀어봐야 한다고 한다. 대체로 정서적, 지각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이 네 가지 측면을 다 만족해야하는데 그렇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현대예술을 보면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해하려고 했을 때만 지적 영역이 확장이 되고 그게 현대예술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예술을 이해하려면 공부를 해야만 한다. 뒤샹의 변기를 보며 그걸 가지고 나온 이론은 모른 채 변기만 쳐다보면서 “너는 왜 나한테 감동을 안 주냐?”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란다. 현대예술은 맥락을 알아야 하고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해체시켜 나오므로 어떤 관습을 무너뜨리고 나온 건지를 알아야 한다.
예술에는 비평가가 있다. 그 비평가가 예술에 끼치는 영향을 굉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 진중권 교수는 비평의 역사부터 설명해주었다. 비평가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17세기 이후 프랑스에서 등장하였다. 그전에 비평이라는 것은 예술가들끼리 서로의 작품을 보고 평가를 해주는 형식이었다. 소위 예술가 비평이다. 그것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이 비평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비평은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비평이다. 소인(素人) 비평, 이게 진짜 비평이다. 18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시작한 비평 문화는 르 브랭(Le Brun)에 맞섰던 로제 드 필르로 프랑스의 로코코를 만들어냈다. 고전주의와 싸우고 고전주의 이념에선 ‘형’이 중요하다는데 ‘색’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비평가가 싸워 나중에 프랑스의 로코코라는 관능적 양식이 실현되었다. 예술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독일 신고전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은 완전 바로크적인 독일의 예술계를 고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신고전주의로 흐름을 바꾸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비평가이다.
이렇듯 비평가는 많은 경우 예술의 흐름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현대에 들어서 더 심해졌다. 예전엔 작품이 끝난 후 잘되었는지 비평을 하였지만 뒤샹 이후엔 비평이 작품과 함께 성립되었다. 뒤샹이 변기를 들고 나왔을 때 평론을 겸한 것이다. 평론을 하지 않았다면 한낱 변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잭슨 폴락의 경우는 어떤가? 그린버그가 없었다면 과연 아메리카의 모더니즘이 있었을까? 또한 잭슨 폴락이 유명해졌을까? 최근엔 비평이 큐레이트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의 가장 큰 문제는 작품평이 아니라 큐레이트가 선정한 작품들의 전시평에 있다. 큐레이트가 받아주면 성공하는 것이고 안 받아주면 실패한 것이다. 작가로선 황당하지만 큐레이트의 권력이 강해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다. 즉 요즘은 완성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성립하는 것이고 큐레이팅까지 평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외 질문이 많았지만 모두 옮기지 못해 아쉽다. 다만 언제든지 진중권 교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헷갈리는 미술사가 조금이나마 머릿속에서 정리가 될 것이고 그림을 이해하는데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독설가로 유명한 그, 연일 매체에 등장하며 눈도장을 찍어주는 행동하는 실천가, 그보다는 역시 미술을 사랑하고 미학을 연구하는 미학자로서의 그가 더 멋있어 보이는 시간이었다.
<진중권> 저15,300원(10% + 5%)
《미학 오디세이》(전3권)로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이 읽어주는 서양미술사. 미학과 미술사를 접목한 매우 특별한 구성과 서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대가들의 논문이나 저서를, 선택적으로 재구성한 점이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