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책 人터뷰] “인문학과 공학이 만나는 작품 쓰겠다” -『열하광인』의 저자 김탁환
넘어야 할 산맥, 연암 박지원
박지원은 당시 젊은 지식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실학파의 거두였다. 그의 『열하일기』는 대체 어떤 책이기에 개혁군주이자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정조가 문체반정이라는 사건을 일으켰던 것일까? 지난 26일(금) 신간 『열하광인』의 저자 김탁환의 강연회에서 그 실마리가 풀렸다. 그는 트레이드 마크인 구레나룻을 기른 채 무대에 올랐다. 수염을 기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작가의 취향 때문일까, 아니면 매일 하는 면도가 귀찮아서일까?
최근 드라마 <이산>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찾아온 정조. 그는 누구인가? 지식인 세종과 더불어 그는 18세기 문예 중흥기를 구가하던 성군이었다. 그와 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연암 박지원이다.
박지원은 당시 젊은 지식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실학파의 거두였다. 그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대체 어떤 책이기에 개혁군주이자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정조가 문체반정이라는 사건을 일으켰던 것일까?
지난 26일(금) 신간 『열하광인』의 저자 김탁환의 강연회에서 그 실마리가 풀렸다. 그는 트레이드 마크인 구레나룻을 기른 채 무대에 올랐다. 수염을 기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작가의 취향 때문일까, 아니면 매일 하는 면도가 귀찮아서일까?
객쩍은 상상도 잠시, 그가 강연장에 들어섰다.
그는 『열하광인』의 출간을 끝내고 고비사막을 다녀온 길이었다. 작품을 써낼 때마다 허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다. 하지만 이번엔 그 공허함이 더욱 컸다. 가슴에 간직해둔 그 무엇인가가 ‘쑥’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왜 바다나 사막을 좋아하고 동경할까? 그것은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한계상황 때문이다. 글쓰기라는 것은 초원의 끝보다 더 까마득한, 육지의 끝보다 더 들어가게 하는 작업이다. 절벽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된 이유는 순전히 책 때문이었다.
강연회에서 풀어놓을 이야기보따리를 ‘중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준비했다’는 그는 소설가가 되게 만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권혁은 시인은 ‘최고의 이론은 도서관과 사막이다’라고 했는데, 그게 맞는 같아요.” 그가 굳이 다른 곳을 마다하고 사막을 다녀온 이유이기도 하다.
역시 일가(家)를 이룬 작가답게 그의 생각과 말은 분명하고 명쾌했다.
그의 소설 습작은 스물서너 살 때 시작됐다. 그러다 1995년 가을, 소설가로 늙어 죽을 것을 예감한 그의 인생에 큰 전환기를 만들어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계속 미루기만 하던 군 입대였다.
스물여덟의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해군 소위로 입대, 진해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서 국어 교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결혼을 했다. 그는 군대가 ‘참 좋았다’고 했다. 오전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부와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있을 때만 해도 주로 밤에만 공부하고 습작 활동을 했는데, 입대하고는 아침 7시 반이면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업무라야 생도들에게 일주일에 9시간의 국어 수업을 하고, 나머지는 줄곧 연구실을 ‘사수’하는 게 주어진 일이었다.
일과가 끝나는 저녁 무렵 해변으로 나가면, 생도들이 날치 떼를 낚시로 잡아 올리는 광경을 구경했다. 자신도 하고 싶었지만 복무규정에 장교는 낚시를 할 수 없어 옆에서 ‘눈낚시’만 하고 있었다. 진해 인근 해역은 군사보호지역이어서 인근 어부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고기잡이배가 없으니 바다는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 고기로 넘쳐났다.
노을이 지는 때 수천 마리의 날치 떼가 흰 배를 뒤집으며 물 위를 날았다. 그 눈부신 장관이란 형언할 수 없었다. 그 날치 떼 때문에 문학을 해야겠단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또 하나. 아침 7시 반이면 어김없이 출근해 ‘불충하게도’ 연병장에 있는 거북선 모형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 놀았다. 그 꿀 같은 담배 맛을 잊을 수 없었다. 결국 날치 떼와 거북선에서 논 기억은 『불멸의 이순신』을 탄생시켰다.
“생도들에게 ‘우리는 충무공의 후예들인 만큼 『난중일기』를 수없이 읽어야 한다.’며 졸업할 때까지 6번을 읽혔어요. 처음엔 지루해하던 생도들이 나중에는 그 매력에 빠졌어요.” 그때 수업받은 생도들 중에 지난 서해교전으로 부상을 입은 이희완 대령도 있었다.
“해군에는 15분 태도가 있어요. 일과 시작하기 15분 전부터 모든 걸 준비하고, 15분 후에야 마치는 거죠. 출항할 때도, 예를 들어 2시가 예정 시간이면 15분 전에 닻을 올려요. 닻을 올리기 전에 도착하지 못하면 승선하지 못하는 거죠.” 그는 왜 이 얘기를 했을까? 그냥 해군이란 조직의 한 특성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일까. 일단 화제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내 인생의 책, 『완월회맹연』
고전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이 시절 읽은 책이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이란 고전소설이다. 1,800권 180질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은 지금의 기준으로 따져도 180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대하소설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소설이다.
이 대장정의 길을 시작했다. 아침마다 한 권씩 읽었다. 끝까지 읽는 데 180일, 6개월이 걸렸다. 45권까지 읽는데 주인공이 결혼하면서 결말이 지어지는 분위기였다. ‘왜 이래?’ 하고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그간 읽은 것이 아까워 그만두지 못했다. 계속 읽었더니 173권 째인가에서 천상계가 펼쳐졌다.
“정말 대단한 작가예요. 한 번 읽기에도 벅찰 이 작품을 최소 15년은 걸렸을 텐데 흔들림 없이 끝까지 밀고 간 게 믿기지 않죠. 작가들은 보통 귀가 얇아서 빨리 결론을 내려고 하거든요. 결과를 보고 싶은 거죠.”
그는 이 작품을 천상계와 지상계가 변증법적 조화를 이룬, 통일성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했다. 처음에 지상계만 체크하고 읽었는데, 나중에 생각지도 않은 천상계가 나와서 또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 계급이 소위였는데, 그새 중위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원래는 1,800권인데, 줄인 게 180권이라고 하니, 정말 입을 다물 수가 없는 상황이죠.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의 속도보다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른 작품,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많이 닮은 책이 아닌가 싶었어요.”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모두 다섯 명. 한 명이 논문을 쓰면, 나머지 네 명이 논문을 심사해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심사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이 기억하는 줄거리가 다를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작품이라 심사하는 것도 아주 조심스럽다.
“저는 또래의 다른 작가와 다르게 출발한 것 같아요. 『대망』이나 『대지』『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대하소설, 장편소설이 좋았어요. 그래서 『압록강』『불멸의 이순신』 같은 소설을 쓸 수 있었죠.”
장편소설 『불멸의 이순신』이 나오게 된 과정을 소개했다.
“이순신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에요. 당시 100명이 있으면 99명은 저쪽으로 가자고 하는데도 다른 쪽으로 갔거든요. 전투방법에서도 당시 관행으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 병법이었죠.” 광고의 카피처럼 모두가 ‘YES’ 할 때, 혼자서 ‘NO’ 한 인물이다.
“이순신이 싸움만 하면 무조건 백전백승이잖아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생각했어요. 『난중일기』를 보면 단순명료한 게 특징이거든요. 말과 행동이 정확히 일치해요. 글 쓰는 사람은 대부분 과장하게 마련인데, 『난중일기』는 그렇지 않거든요. ‘병사 2명의 목을 베었다. 그 이름은 무엇과 무엇이다.’ 이런 식이에요.”
마침 이 날 작가의 40번째 생일을 맞아 독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일기는 통상 다른 사람의 험담도 하고, 감정이 많이 들어가기 쉬운 형식인데도 엄청난 완벽주의와 자학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말 한 마디에 1만이 넘는 부하들의 목숨이 달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압박 때문이었다.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그렇게 몇십 번을 심사숙고해요. 그때만 해도 해전에서는 적이 오면 일단 무조건 나가서 싸워요. 그런데 이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자신들이 전투하기 좋은 곳을 찍어놓고 거기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요. 육지에 들어온 적들이 조선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이 풀어져서 있는 모습을 봐도 또 기다려요. 보다 못해 부하들이 빨리 가서 싸우자고 하면, 이제 점을 쳐요. 흉한 결과가 나오면 안 나가요. 또 점을 쳐서 좋다는 결과가 나오면 그때야 나가요. 말하자면 하늘의 운세까지 보고 전투를 치렀어요.”
이순신, 미칠 것만 같았던 5천5백 매의 원고
이순신은 너무나 외로운 존재였다. 부산에 있는 왜군에 총력전으로 맞서기 위해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는 한산도에 군사 만 명을 배치해 놓고 전략을 짜고 있는데, 돌림병이 돌았다. 7년 전쟁에서, 전투에서는 100명이 안 되는 부하들이 죽었는데, 이때 돌림병으로 1천 명 이상이 희생당했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과장하지 않고 정확하게 쓰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주로 답사를 통해 해결한다. 24박 일정으로 목포에서 부산까지 답사를 하고, 이순신이 오줌을 눴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도 가보았다.
생도들의 교육 일정인 ‘충무공 전적지 답사’를 매번 지원해서 함께 다녔다. ‘답사만이 살길이다. 발바닥으로 글 쓴다.’는 말이 이렇게 해서 나왔다.
그는 ‘나의 치부’란 말로 원고가 하염없이 길어지는 습관을 고백하기도 했다. 애초 『불멸의 이순신』은 1천 매 분량으로 예상했는데, 답사를 통해 계속 추가되는 바람에 5천5백 매로 늘어났다. 이 소설이 그의 첫 번째 작품이다. 보통 첫 소설로 1백 매 정도 쓰는 게 상례인데 비추어 엄청난 분량이다. 그것도 쓰기가 만만치 않은 역사물이다.
하염없이 늘어나는 분량 때문에 말 그대로 ‘죽을 지경’이었다. 통상 ‘400매 이상 쓰다 보면 사람이 미치는 법’인데, 1천 매를 넘어가니까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견디기 힘들었음을 토로했다. 이런 각고의 결과물은 제대하면서 책으로 출간했다.
“이순신처럼 살라고 권유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인간이 앓을 수 있는 병을 모두 가지고 있었어요. 복통, 변비, 우울증 해서 40여 가지의 병을 앓았다고 기록돼 있거든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아닌가 생각돼요.”
첫 작품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이순신과 얽힌 얘기를 자세하게 한 다음 그는 자신의 힘들었던 생활 전선에 대한 소개로 이어갔다.
제대 후 1998년에 서울에 올라와 ‘보따리장사’로 부르는 시간강사 자리를 얻었다. 일주일에 25시간에 달하는 강행군의 강의였다. 한군데에 붙박여서 하는 강의가 아닌 만큼 이 대학 저 대학 뛰어다녀야 했다. 소설을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충청도의 한 학교에서 전임강사 자리가 났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가 말렸다. 우리 문학 현실에서 소설을 쓰자면 비평가들과 친해야 하는데 서울을 떠나면 그럴 수 없다는 이유와, 문예창작과 교수로 들어간 다음에 제대로 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만류의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없어서 소설을 못 쓰나, 교수 자리를 맡아서 못 쓰나 결론은 똑같은 셈이니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전범이 되어 보겠다는 결의와 함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어느 수필에서 한 말처럼 ‘장편소설 작가에게는 두루마리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지방에 숨어서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써서 서울에 던져 보이겠다는 각오였다. 그렇게 한 결심은 10년 동안 35권 5만 매 정도를 ‘써 재꼈다.’ 발표한 원고는 3만 매 정도였다. 스스로 “양으로 밀어붙인 감이 없지 않다.”라고 했지만, 현재 젊은 작가들 중에 그만큼 고증이 잘된 역사소설을 발표한 사람은 없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런 지방 생활을 올봄에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이제 단련돼서 굳이 숨어서 글 쓰지 않아도 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2006년 겨울까지 8년의 지방 생활이었다.
넘어야 할 산맥, 연암 박지원
그가 소설로 형상화하고 싶은 인물은 이순신과 함께 연암 박지원이었다. 충무공과 연암은 결코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고전문학을 전공한 만큼 연암은 피해갈 수 없는 과제였고, 넘어야 할 거대한 산맥이었다.
『열하일기』와 관련한 소설을 먼저 쓸 작정이었으나, 진해에서의 군 생활로 첫 작품이 이순신으로 뒤바뀌었다. 그런데 백탑파 시리즈를 발표하자, 독자들이 너무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연암의 『열하일기』를 다들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써서 벌어진 결과였다.
그러면서 현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감정적 실존을 표현한 『난중일기』와 조선시대 최고의 저작인 『열하일기』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큰 문제라는 것이다.
『열하일기』는 무엇보다 그 당시의 문체가 다 들어 있는 ‘이상한’ 여행기다. 고문, 소설, 시, 사전, 대담집 등 다양한 형식으로, 여행하는 그 순간에 새로운 인식과 느낌들을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다 나온 결과라는 설명이다. 대부분의 여행서가 나만의 느낌을 내 식대로, 일관성이란 이름으로 ‘왜곡’해 표현하는데 『열하일기』는 그렇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열하일기』와 관련한 소설을 쓰기 위해 10년 동안 연암의 문집을 모두 읽고, 연암을 추종했던 홍대용을 비롯한 ‘박지원 사단’의 작품도 독파했다. 또 문체반정을 주도한 정조의 작품도 모두 훑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백탑파 시리즈 『방각본 살인 사건』과 『열녀문의 비밀』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시기 중 하나인 것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가장 풍성한 치세를 구가하던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젊은 실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리고 이 연작은 역사추리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실학, 특히 북학파들의 이상과 실천, 그 한계 등을 이야기 속에 펼쳐내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신작 『열하광인』을 출간했다.
“정조가 위대한 인물이에요. 조선시대 가장 위대한 인간 중의 한 명이죠. 공명정대하고. 연암 또한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할 수 있죠. 이 두 위대한 인물이 싸우게 된 게 문체반정이에요.”
정조의 논리는 조선이 썩어가고 있는데, 주자학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만 한다. 그래서 주자학적 글쓰기를 하라는 것이었고, 연암은 주자적인 것도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논리였다. 이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개혁군주였던 정조가 절대군주로 나아간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연암 자신은 ‘학문적 항복문’인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을 끝내 쓰지 않았다. 백탑파의 핵심 인물인 박제가도 마찬가지였고, 이덕무도 병사했다.
‘아무리 위대한 왕이더라도 문학을 탄압하는구나.’라는 생각은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던 저자의 씁쓸한 기억을 떠올렸다. ‘데모’가 한창이던 때, 학교에 가다 전경들에게 가방 수색을 당했다. 그 시절엔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크리슈 나무리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책은 단순한 명상집이다)이란 책이 나오자 바로 잡혀 들어갔다. ‘?명’이란 글자가 들어간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마 웃지 못할 코미디 같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참 어이없고, 수준이 낮은 거죠. 그런데 정조와 연암을 축으로 한 백탑파와의 문체 논쟁은 아주 고차원적이죠. ‘이거 하지 마.’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스타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잖아요.”
그는 “요즘은 금서가 없다는 게 위대한 문학이 없다는 반증”이라며,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문학을 소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금서를 쓸 수 있을까?’를 열흘 동안의 사막 여행에서 고민하다 돌아왔다고 했다. 95년부터 책을 쓰기 위해 모아둔 책상 서랍의 자료가 이제는 텅 비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할 것을 다짐했다.
“릴케가 로댕의 비서였는데, 『릴케의 로댕』이란 책에 보면 ‘텅 빈 작업실에 들어오면 7시부터 5시까지 그는 계속 돌만 갈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땀 흘리는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그리고 로댕이 실패한 작품들을 한쪽에 모아놓은 거 보고 감동한 장면이 나와요.”
새로운 장르에 대한 시도, 끊임없이 하겠다
그는 세상에 나온 책들이 스스로 맘에 차지 않을지라도 계속 돌을 갈고 있는 로댕처럼 끝없이 써내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건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는 실존이라고 봐요. 작가로서가 아닌 더 나은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죠. 이전 작품보다 더 떨어질 수 있겠지만, 12년 동안 생각했던 대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죠.”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다음은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Q) 대중적 인기에 비해 문학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하루키, 스티븐 킹, 존 그리샴을 좋아해요. 호러소설, 판타지도요. 판타지는 대중소설로 폄하하는데 소설은 재미있는 소설과 재미없는 소설로 나뉜다고 보거든요. 밀란 쿤데라의 『느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이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른바 ‘철학소설’이 없었어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도 마찬가지고요. 곤충을 소재로 한 작품은 『파브르 곤충기』밖에 없었어요.(일동 웃음) 베르베르 이후로 ‘곤충소설’이 나왔죠.
작가는 독자는 작가나 비평가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없는 장르소설이 있어요. 작가에게 새로운 시도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저는 운이 좋았죠. 전임강사 자리 얻으면서 계속 작품을 쓸 수 있었고요. 저는 독자가 작가나 비평가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외국소설이 95고, 우리 소설이 5 정도라고 한다면 그 이유가 있는 거죠. 독자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정확히 알죠. 똑똑한 거죠. 독자들에게 애국심이 없어서가 아니고요.”
Q) 한국 소설이 침체기입니다. 여성작가들이 과대 포장된 감도 있는데, 한국 작가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대답을 하기 전에 한참을 머뭇거렸다.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조용히 그의 입을 보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너무 거창한 문제라 저도 그 생각은 못했어요. 작가가 나아갈 길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한국 작가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최근에 코엘료 책이 나왔는데, 저는 이런 작가와 싸운다고 생각해요. ‘진검승부’죠. 국내 작가하고만 경쟁하는 게 아니죠.
요즘 책 판매에 신문광고가 효과가 없다고 하잖아요. 독자들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거죠. 존 그리샴을 의식하듯 절대적인 수준으로 고민해요. 한국 작가로만 모아서 비교할 건 아니라는 거죠. 다만 아쉬운 건, 새로운 영역으로 많은 시도를 해봤으면 하는 건 있죠.
지금 KAIST에 있는데, 남들은 ‘공돌이’ 있는 데서 무슨 작품을 쓰느냐고 해요.(일동 웃음) 그런데 저는 공학자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소설로 쓰고 싶거든요. 보통 인문 쪽 시각에서만 소설을 쓰는데, 세상의 반을 못 보는 것 같아 그게 안타까웠거든요. 공학 쪽 분야 교수님들이 과학적 지식을 활용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 기술이 부족하니까 옆에서 그들의 사고를 듣고 배우면서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어요.
저도 코사인이니 뭐니 함수에 머리가 아파요. 그런데, 연암은 공학, 천문학, 문학, 다 했거든요.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십여 권의 과학소설을 썼는데, 『뇌』 같은 소설을 보고 동료 과학자들이 ‘이건, 이게 아닌데.’ 하거든요. 사실 더 많이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작품으로 풀어내지는 못하는 거예요. 당연하죠. 그래서 제가 학교 있으면 동료 과학자들과 점심도 같이 먹고 또 연구실에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죠.
인간을 바라보는 것은 인문학 하나로만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인문학과 자연과학 모두를 가지고 봐야 하죠. 저는 그걸 합쳐서 작품으로 쓰고 싶어요. 이순신도 문학적인 사람이지만, 되게 공학적인 사람이었거든요. 포(砲)도 아주 상세하게 연구했어요. 어느 시점에서 문과 인간과 이과 인간으로 구분하는 건 아주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문과와 이과의 구분 없이 그렇게 살고 싶어요. 연암처럼 내가 연구한 분들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Q) 학교에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계신데요. 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이건 좀 전문적인 영역인데,(웃음) 이야기 산업이 엄청나게 팽창했어요. 이 이야기가 문학 아니면 예술이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경영, 디자인, 건축, 전시 등에서 모두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전부가 문학개론 수준에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수준이에요. 각 분야에서 수천 편의 스토리텔링이 나오고 있는데, 그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형편이죠.
전통적인 아날로그 전달매체가 책이고, 디지털 매체는 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창작하고 소통하잖아요. 블로그에다 사진도 올리고, 음악도 올리고, 동영상까지 넣는 거잖아요. 이게 바로 스토리텔링이에요. 예전엔 작가만 했지만, 이젠 모두가 다 하는 거죠. 디지털 민주주의가 실현된 거예요. 댓글로 소통하고, 펌질로 전달하고 새롭게 유통하거든요.
디지털 시대의 스토리텔링 연구와 관련해 외국 학회에 가면 우리나라 상황을 예로 들어요. 근데 정작 한국인은 없어요. 가만 들어보면 ‘한국에는 이런 것이 있다.’라면서 자기네들끼리 막 떠들어요. 근데 내가 보면 전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서로 논란을 벌이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내가 한국에서 왔는데, 그건 이렇다. 싸이를 나도 하고 있는데, 그건 이렇다.’ 그러면서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곤 하죠.
소설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공포소설에서 어느 부분이 제일 무서운지 뇌파 검사를 해요. 이건 작품의 내적 완결도와 상관없는 것인데, 예전엔 텍스트 분석을 하거나 설문조사를 했거든요. 그런데 설문조사는 의식하지 못하게 거짓말도 할 수 있거든요. 정확하지 않은 거죠. 우리 문학인들은 이런 새로운 방법을 활용하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 이런 연구가 필요하다고 봐요.
‘Eye Tracking’이라고 해서 동화 같은 경우 아이들이 배경 그림을 어느 부분에서 더 재미있어하는지 관찰하는 거예요. 어느 부분에서 눈동자가 빨라지는지, 느려지는지 알 수 있죠. 책 읽는 습관도 파악할 수 있고요. 저도 피실험자가 돼 보기도 했는데, 사실 감시받는 기분이라 유쾌한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주 재밌어요.”
역사소설 작가로 갇힐 생각이 없음을 밝힌 작가
인문학과 공학의 만남?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써내는 역사소설가로만 인식된 그가 다음 작품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지금까지 쌓아온 책상 서랍의 자료가 텅 비어 있는 지금, 그 글감의 곳간이 어떤 내용으로 가득 찰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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