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앵커(2005년)’ ‘닮고 싶은 여성(2006년)’ ‘대한민국 최고의 끌리는 여성 아나운서(2007년)’ 등 각종 조사에서 1위를 한 김주하 아나운서가 TV 화면이 아닌 책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내가 뉴스를, 뉴스가 나를 말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는 흔히 예상하듯이 유명세를 이용한 신변잡기 에세이나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나 성공 스토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 실망스러운 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송 뉴스의 생생한 취재 현장 뒷이야기나, ‘뉴스의 꽃’으로 불리는 여성 앵커에서 과감히 기자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아주 안성맞춤일 책이다. 지난 8월의 마지막 날,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도전과 열정이 나를 만든다’란 주제로 열린 독자와의 만남에서, 그녀의 책에서 못다 한 얘기를 듣고 왔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모습을 드러내자, 강연장은 일순간 환호하는 관객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늘 웃지 않는 TV 뉴스 속 모습에 익숙해서인지,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특유의 긴장된 모습 때문인지 그녀는 약간 냉정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환한 미소를 터뜨리자, 여기저기서 여성 독자들의 ‘정말 예뻐요’란 말이 쏟아졌다.
|
남자 같은 목소리가 싫었던 그녀는 오히려 그 중성적인 목소리 덕분에 뉴스 앵커로서 객관성을 확보했는지도 모른다. | |
그녀는 “‘도전과 열정이 나를 만든다’라는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얘기를 들으려고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란 말로 서두를 꺼냈다. 지금까지 그녀의 색다른 목소리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신뢰감 있는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바로 그녀의 중성적 목소리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자 같은 목소리를 싫어했다. 어릴 때는 딸밖에 없다더니 아들이 전화를 받더라며 주위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했다.
“처음에 방송사에 들어오기 전에 타고난 재능과 끼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더라면, 그 꿈을 접었을지도 몰라요. 저는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되겠지’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입사해서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재능과 끼가 필수적으로 동반돼야 하는 거더라고요.”
입사 초기 수더분한 이미지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노력으로 최선을 다했다
현 재의 그녀를 보면 입사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내 모두에게 주목받는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입사 초기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입사해서 ‘선배처럼 잘하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난 원래 잘했거든’ 이런 말도 들을 만큼 주변엔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정말 화가 났어요. 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따라갈 수 없다는 얘기잖아요.”
“왜 꿈을 꾸게 되었는지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정말 공주처럼 살았어요. 이런 얘기 하면 다들 하는 얘기로 들으시겠지만, 정말이었어요. (웃음) 그런데 갑자기 쫄딱 망한 거예요.” 아버지가 사업하신다고 집을 판 돈을 친구에게 몽땅 사기를 당했다. 매일 먹을 쌀조차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데다, 아직 어려서 그 상황에 적응이 안 된다기보다 그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보신 적이 없었고, 골방에 저희를 두고 일을 나가야 했어요. 그때부터 꿈꾸기 시작했죠. 점점 구체적으로 ‘TV, 전화, 피아노가 있었으면 좋겠어’ 하는 식으로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꿈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한 번은 아파트 분양 전단을 구해서 머릿속에서 꾸던 꿈을 종이에 그려진 도면에 옮기기도 했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꿈을 꿨느냐면, 피아노를 놓을 공간이 있는지 확인하고, 가구, 전자제품의 가격까지 조사했어요. 비록 어렵지만 꿈을 꿈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거예요.” 꿈꾸는 법을 배우고, 또 실천하는 법을 배웠다.
|
여성 독자뿐만 아니라 많은 남성 독자까지 자리해 그녀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강연장은 빈자리가 없을 만큼 꽉 들어찼다. | |
개와 얽힌 얘기도 소개했다.
“강아지를 아주 좋아해 동네 개는 다 만지고 다녔어요. 하도 많이 병원에 가니까 의사선생님이 ‘또 개한테 물리면 미칠지 몰라요.’ 이러시는 거예요. (웃음)” 손 거죽이 벗겨질 만큼 물리기도 했다. 한 달에 두세 번도 갔다.
직업도 꿈꿨다. 여느 사람들처럼 그녀도 꿈이 수시로 바뀌었다. 의사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제주도에 농장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여군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꾼 꿈이 앵커가 되는 거였다.
“처음에 제가 입사했을 때는 눈에 띄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동기들은 정규프로그램을 맡았는데, 저는 맡지 못했거든요.” 그녀는 남들이 외면하는 리포터로 주로 활동했다. 보통 2박 3일, 3박 4일의 지방 출장이었다. 지역 풍물을 배우러 다니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회사에 돌아왔더니, 다들 얘기하고 있다가 얘기가 딱 끊기는 거예요. 제 얘기를 하고 있었단 거죠. 그런데 그 자리에 사보가 있었어요. 거기에 앞으로 10년 후 MBC를 이끌어갈 주인공들이 나왔는데, 입사 동기 아나운서 3명 중에 나 빼고 두 사람이 나온 거예요.”
이건 다른 경로로도 확인됐다. 이후 ‘굿모닝 코리아’라는 아침 프로를 맡았을 때 홍보실에서 취재를 나왔다. 인터뷰 내용은 이런 질문이었다. '입사 1년이 넘도록 동기들은 다 잘나가는데, 혼자 소외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땐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자신의 위치를 절감한 계기가 되었다.
영화 프로를 진행할 때 이틀에 24편의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인정해주든 그렇지 않든 나 스스로 당당하면 나중에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젠 리포터로 가더라도 대충대충 하지 않았다. 자료를 있는 대로 찾아 담당 PD보다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뭘 물어볼지 일일이 체크하고, 현장을 조사했다. 장시간의 여행으로 나가떨어진 스태프를 뒤로하고 어느 장소에서 촬영하면 좋을지도 스스로 생각해보고 제안했다.
그러다 그녀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TV 영화탐험〉이란 프로그램을 맡게 됐어요. 외주제작사에서 진행하던 거였는데, 불만이 많았어요.” 안 그래도 비인기 프로그램이었는데, 초짜 아나운서가 온 것 때문이었다. “이전에 맡은 여자 MC가 미스코리아였었는데, 수더분한 애가 나오니까 게스트까지 저를 무시했어요.” 녹화 중에 실수를 하면, 게스트에게 ‘언제 집에 가라는 거야?’ 하는 말까지 듣기도 했다.
“퀴즈 프로그램은 대본이 없어요. 그 상황에 대해 즉각적인 대처를 해야 하거든요.” 아예 영화를 다 보고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한 프로그램에 20개 정도의 영화가 나오는데, 2주에 한 번 몰아서 녹화를 하다 보니까 40개의 영화가 나온다. 그렇다고 그 영화 목록이 2주 전에 나오는 게 아니라 녹화 당일 아침에 나왔다.
|
그녀는 각종 조사에서 ‘닮고 싶은 여성’ 1위에 올랐다. | |
담당 PD한테 매일 전화해서 ‘언제 나오느냐?’고 매달린 끝에 최대한 당겨준 게 이틀 전, 사흘 전이었다. “퀴즈 특성상 주로 안 본 영화 중심으로 나오는데, 한 번은 48시간이 남았어요. 24편을 보고 갔죠.” 그 즈음에는 지금처럼 인터넷 정보도 없어서 비디오가게에 가서 영화를 찾았다. <셰인> <카사블랑카> 같은 오래된 영화는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작가보다도 더 많이 알게 됐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담당 PD도 도움을 줬다. 아직 개봉되지 않은 영화의 편집본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아침 프로 맡으면서 그 프로를 그만두니까 스태프들이 막 우는 거예요.” 열심히 한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나중에는 그들을 감동케 한 것이다.
“그렇지만 열심히 한다고 다 인정받는 건 아니에요.” 프로그램 준비하느라고 휴가를 하루하루 쪼개 가면서 보냈는데, ‘무슨 휴가를 그렇게 자주 가느냐?’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전직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경찰출입 기자를 했을 때였는데요. 어떤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힘든 게 어렵지 육체적으로 힘든 건 참을 수 있지 않느냐 하시는데, 그건 육체적으로도 어느 한계를 넘지 않았을 때 얘기예요.”
1997년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녀는 2000년 여성 앵커로는 최초로 아침 프로그램 <피자의 아침> 단독 진행을 맡았다. 그리고 2000년부터 <뉴스데스크>의 앵커를 맡는 한편 2004년 사내 기자 시험에 합격해 지난해까지 사회부, 경제부 기자로 활동했다.
그녀가 맡은 곳은 강서, 양천, 영등포, 구로경찰서였는데, 새벽 5시에 도착하자면 4시에 일어나야 했다. 앵커도 겸하고 있었기에 밤 11시에 퇴근해서 그날 방송분을 모니터하고, 가판신문 확인하고, 밥 먹고 자면 보통 3~4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나중엔 정말 부모도 못 알아보겠더라고요. 낮술만 그런 게 아니에요. (웃음)”
“그런데 회사에는 얘기할 수 없었어요. 못마땅하게 생각했거든요. ‘새벽에 경찰서 돌면, 뉴스는 뭐가 되냐?’ 말이 맞거든요. 그런데 저는 경찰출입 기자는 기자가 되는 수업이자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름표만 아나운서에서 기자로 바꿔 다는 건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한 번은 취재가 늦어져 저녁 7시가 되도록 방송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보통 9시 뉴스를 진행하려면 5시부터 준비해야 했는데 늦어졌던 것이다. 사무실에 전화해 선배한테 뉴스 코멘트 준비를 부탁했다. 그런데 전화기에서 들려온 대답은 평소 착하기만 하던 선배의 호통이었다.
‘네가 기자야, 앵커야? 웃기지 마.’ 사무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뉴스를 준비해야 할 앵커가 아직도 자리에 없으니,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오고 갔다. ‘숙청’을 해야 한다느니 험한 말도 오고 갔다. 그런데 평소 착하기만 하던 선배의 엄청난 질책과 호통 때문에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너무하는 거 아니냐?’ 하는 동정론으로 돌아선 것이다.
“저도 인간인지라 꾀를 부리고 싶은 경우가 있어요. 여기에 언론인이 되고 싶은 독자들이 있겠지만, 그런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꾀를 부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한 번은 대리운전 기사들의 무보험운전과 관련한 기사를 취재했다. 몰래카메라를 들고 타서 다 취재를 했는데, 혼자 하다 보니 밖에서 그 차를 찍은 화면이 없었다.
“웬만하면 다른 차를 찍은 화면으로 편집하면 되겠는데,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두 사람이 차를 나눠 타고 다시 찍었죠.”
타고난 미모와 재능으로 얻은 것 같은 그의 성취 뒤에는
끈질긴 도전이 있었다
그녀의 이번 책은 뉴스 취재의 현장, 사건과 인물에 대한 뒷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고 있다.
“여자라는 이름을 앞세워 당장이 편안하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하지만 그건 후배에게 선배들이 어렵게 닦아 놓은 길을 막아 버리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내 딸에게, 내 후배에게 자랑스러운 여성이, 아니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장의 안위보다는 힘들어도 여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일을 해야 한다.” (69쪽)
그녀는 앞장서서 남녀차별에 대해 외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선배 여기자 이진숙은 언뜻 ‘타고난 미모와 재능으로 거저 얻었을 것처럼 보이는 김주하의 성취 뒤에는 그러나 끈질긴 도전이 있었’음을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1시간여의 강의가 마무리되고, 독자와의 일문일답이 이어졌다.
Q) 꿈을 이루고 나서 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그리고 다음 꿈은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자만은 정말 잘난 사람이 부리는 사치인 것 같습니다. 저는 꿈을 꾸다가 잠드는 게 꿈이에요. 마지막으로 어떤 꿈을 꾸며 하늘나라로 갈까 그런 꿈도 꿔봤어요. 저는 남보다 뉴스를 좀 더 일찍 접하는 앵커가 아니라 진짜 앵커가 되고 싶어요. 그러자면 모든 분야의 기자를 해봐야 해요. 문화부만 해도 공연, 영화, 출판, 주거, 음식 다 해야 하잖아요. 경제부, 국방 등 다른 분야도 할 게 많고요. 꿈꿀 게 많아 행복해요.”
Q) 대전에서 강의를 들으러 왔습니다. 저는 아이도 두 명이 있는데요, 일하면서 아이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책을 내고, ‘왜 단독 앵커를 맡게 된 얘기가 없어요?’ 또 ‘왜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얘기가 없어요?’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실 작년 12월에 책을 내기로 계약했는데, 취직하기 직전까지의 얘기를 쓰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출산 휴가 이후 다시 복귀하는 바람에 육아와 직장 생활, 단독 앵커에 대한 얘기를 넣지 못했어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회적으로 잘하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미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 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엄마가 일을 하셨지만 잠시도 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집안일하고 빨래하고 간식을 준비하고 항상 그랬거든요.
|
사인회 모습. 연예인에 못지않은 인기에 사인회 장소는 한동안 사진 찍는 영화 관객들로 술렁이기도 했다. | |
그런데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집에서 살림하시는 분인데, 소파에 누워서 ‘라면 어디 있는지 알지?’ 하면서 TV 드라마를 보시는 거예요. 정말 충격이었죠. 그제야 일하는 엄마, 최선을 다해 주는 엄마가 무척 자랑스러운 거예요. 저도 아이한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군가 물어보면, 엄마라는 대답을 듣도록 하고 싶어요.”
Q) 앵커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일을 하지 않을 때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합니다.
“희한하게 앵커라는 타이틀을 달면 다들 목에 깁스를 하게 돼요. 그렇게 코가 하늘까지 높으면 주위에 표가 나거든요. 앵커는 앵커이기에 앞서 마음 따뜻한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아원에서 잠깐 봉사활동 할 때 절실히 느낀 거였는데,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입사시험을 함께 본 친구가 있었는데, 정말 똑똑하고 최고의 학벌에다 외모도 끝내줬어요. 같은 날 KBS에도 시험이 있었어요. 그 친구에게 빨리 가자고 했더니, ‘너나 가’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왜? 시험 잘 봤어?’ 이러니까 ‘그래, 나 이번에 됐어’ 그러는 거예요. 그때는 ‘재수 없어’라기보다는 그냥 ‘좋겠다’ 부러웠거든요. (일동 웃음) 그런데 그 친구는 떨어졌어요. 면접에서 그 사람이 표현하는 방법을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이 드러나는 거거든요.
일 안 할 때는 잠만 자요. 예전에 영화 프로 진행할 때에는 영화를 많이 봤는데, 요즘은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양보다 질이라고 하잖아요. 아이가 내 얼굴을 잊어버리는데, (웃음) 까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놀아주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