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예술의 흥행에 관해 재미있는 상상을 한번 해 봅시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몇몇 아티스트들의 음반이 음반베스트셀러 10위권에 진입했다는 이야기는 예술계 톱뉴스감이 될 것이겠지요. 현대미술의 주요 화가들이 펼치는 난해한 작품전들이 전시예매 순위 상위권을 차지한다는 뉴스가 나오면 아마 전문가들도 의아해할 것입니다. 막강한 자본력에 의해 조정되는 현대의 예술판 속에서 순수예술이 치고 나가기는 이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나 딱 한 분야에서는 놀라운 성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문학으로, 순수문학계의 굵직한 단편들로 채워진 『2006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올해도 어김없이 YES24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마치 드라마대본 보는 것 같았어’라는 평가가 유독 많았던 2005년 작품집의 가벼움을 의식해서인지 2006년 수상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느낌은 ‘교과서적인 무게감’입니다. 특별히 파격적인 문체나 서사를 펼치기보다는 보편적인 인간 감정에 대한 밀도있는 서술과 일관성을 놓치지 않는 서사가 두드러지는 모습들이 작품들 속에서 드러납니다. 2005년이 드라마대본이었다면 2006년은 꼭 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한 단편들이라고나 할까요.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무거운 소설들만 모여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각각의 소설들이 차용하는 대중문화의 코드입니다. ‘큰 박스 속에 스물 네 개의 낱개 포장된 한 입짜리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는’ 모습이라거나 싸이월드에서 볼 수 있는 ‘최근 2주간 새로운 게시물이 없습니다’ 등은 위에서 언급했던 순수예술장르 중 문학만이 대중문화 속에서 인기도를 유지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문학은 시대에 민감하며, 동시대가 체감할 수 있는 코드들을 다룸으로써 오히려 그 작품적 완성도를 이뤄내고 독자와의 소통 채널을 다양하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주제와 서술에 있어 무겁고 침착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 소품과 배경은 독자들의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 이것이 이번 2006년 수상작품집들이 갖는 공통점이 아닐까 합니다. 전체적인 느낌들이 그렇다는 것이고, 물론 각각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힘과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상 수상작인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는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로 대표되며, 청소년들의 공포괴담 속에 항상 등장하는 천재형 1등과 노력파 2등의 심리가 중심이 되고 있는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이제 막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영화감독으로, 시사회 초청을 받아 백야의 북유럽에 가게 되자 학창시절 늘 1등을 독차지하며 주인공의 머리 위에 서 있었던 P를 떠올립니다. P는 주인공이 경배와 질투를 동시에 갖는 대상으로,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천재 특유의 완벽함과 거만함이 몸에 배인 그의 친구이자 우상이자 질시 대상입니다. 심지어는 주인공의 영화마저도 ‘이렇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아?’라고 한 마디를 던져 뭉개버리는 P는, 게다가 주인공의 베아뜨리체였던 M을 아내로 삼은 의사입니다. LA에서 의사로서 얻은 명성과 부를 다 던지고 북유럽에서 사랑과 영혼에 관한 면역체계를 연구한다는 그와 주인공의 만남, M의 존재, P의 진실 등이 차례로 밝혀지면서 흘러가는 주인공의 심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밤은 정돈되지 않은 어두운 구석이며, 낮과 대비되는 숨겨진 세계입니다. 주인공의 이상향이었던 P의 마지막 반전은 P의 밤을 드러내며, 북유럽의 해가 지지 않는 밤은 역설을 통해 주인공으로 하여금 ‘밤이여, 나뉘어라!’라고 절규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2등이 1등에게 갖는 선망은 P의 밤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감정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나타나는 아득한 결말, 마지 뭉크의 <절규>에서처럼 귀를 틀어막고 견디기 힘든 감정을 중얼거리는 주인공.
수상자 정미경이 직접 고른 자신의 대표작으로 수록된 소설은 「나의 피투성이 연인」입니다. 소설은 유명한 소설가인 남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도 채 마치기 전에 계속 그녀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어느 작은 출판사 편집장으로, 남편의 유고 중 출판계약이 되지 않은 일기, 편지, 잡문 등을 엮고 싶다고 집요하게 설득합니다. 출판사 덕택에 생각지도 않았던 남편의 유고가 담겼을 컴퓨터를 켜고 파일을 살펴보던 주인공은 남편의 일기 속에서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남편의 여자, M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차라리 남편이 살아있었다면 평생 몰랐을 수도 있을 죽음 뒤의 진실 앞에 그녀는 괴로워하게 되지요.
죽은 이의 흔적은 때론 남은 이에게 큰 상처입니다. 주인공은 남편의 죽음 이후 알 수 없는 알러지에 시달리고, 그보다 더한 고통인 남편의 다른 여자에 관한 기록을 본 뒤 잊을 수 없는 기억에 시달립니다.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자는 남편의 일기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아름다운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걸 책으로 낼 권리는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아빠의 완벽한 모습만을 기억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차라리 몰랐어야 할’ 것을 알아버린 자신의 모습을 비교합니다. 죽음, 한 생명이 자신을 표현하는 모든 행동을 멈춘 뒤 죽은 이가 세상에 남는 방식과 산 이들의 상처를 그려낸 중편 소설입니다.
대상 수상자의 작품 외에 제 눈길을 강하게 잡아 끈 소설은 구광본의 「긴 하루」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특이하게도 CCTV로, 그나마 작동하는 CCTV가 아니라 얼마 전 편의점 취객이 집어던진 매취순 병에 맞아 운명을 달리한 CCTV의 영혼입니다. 현대사회의 곳곳에 숨어 관음의 시선을 담당하는 CCTV의 영혼은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부정의 현장, 새벽의 편의점에서 일어나는 순박한 사랑과 청춘의 열정을 바라보고 자신의 후임 CCTV에게 이야기해주며 살아갑니다. 가끔은 다른 이의 몸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이 자유분방한 CCTV의 혼이 겪는 ‘긴 하루’의 이야기 속에서 안 그래도 짧은 소설 분량 내에 더 짧고 빠르게 돌아가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현대 사회 속에서의 윤리와 소외,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톡톡 튀는 소재와 문체로 대중적 인기가 상당한 김영하의 수록작 「아이스크림」은 여전히 독특한 위트가 살아 숨쉬는 글을 보여줍니다. ‘신구약성서 합본호 크기 상자에 스물 네 개의 소포장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유명 제과회사의, 그러나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제품’을 늘 사먹던 부부가 갑자기 아이스크림에서 기름 냄새가 나는 것을 감지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IMF 직후의 시대, 배탈이 날 것 같은 불량 아이스크림과 신고에 맞추어 찾아온 아이스크림 영업부장. 기름 냄새가 나는 아이스크림을 아무 표정 없이 꿀꺽꿀꺽 집어삼키는 영업부장의 모습과 IMF가 겹치면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냅니다.
전경린의 작품 「야상록」은 심사위원단에서 대상작과 함께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나와 있으며, 잡지사 기자로 일하는 도시의 현대 여성과 시골에서 전통적 가치관에 치여 살아온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대비되는 구조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주인공의 불륜을 대비시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 냅니다.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는 책을 못 읽는, 혹은 안 읽는 이들을 위해 일하는 독서치료사인 주인공이 7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려는 한 여자를 맡아 상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여러 가지 책들과 함께 풀어나갑니다. 윤성희의 「무릎」은 어린 시절 자신을 구하고 죽은 한 남자의 아이와 그 마음의 빚이 남은 주인공의 이후 삶을 ‘무릎이 마주 닿는’ 가난하고 좁은 공간 속에서 펼쳐내고 있습니다.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저도 단편집을 제대로 읽은 적이 거의 없음을 고백합니다. 거기에는 2002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뱀장어 스튜」를 읽고서 지나치게 스타일에 얽매이고 표현이 과장되게 흘러넘쳤다는 느낌에 실망했다는 개인적인 기억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2006년 작품집도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집어들었지만, 읽고 나서의 느낌은 간만에 가슴 뿌듯함 그 자체입니다. 삶을 다루는 문학이기에 삶 냄새가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나름의 지론인데, 이번 작품집 수록작들이 풍기는 냄새는 정말 꽉 찬 사람 냄새입니다. 짭짤한 땀냄새부터 구슬픈 눈물의 향기까지, 다루는 주제와 분위기는 달라도 내가 살아가고 고민하고 겪어왔던 무수한 감정들을 다시 한번 자극하는 오늘의 작가들이 보여준 필력에는 새삼 감탄하고 있습니다.
감히 이정도 분량의 리뷰 한 편에 작가들의 피가 서린 작품들의 내용을 다 담고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총 8편에 도합 300 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이 한 권의 책이 보여준 판매량은 어찌 보면 우리 문학계의 희망일 것입니다. 갈수록 삶이 팍팍하고 거칠어진다는 의견이 팽배한 가운데에서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없을 정도의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한국 단편문학이야말로 현대 문명이 미처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감성의 한구석을 보듬어줄 수 있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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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어떤 책?
지난 1년 동안 주요 문예지에 발표된 소설 중 가장 주목 받은 작품을 엄선하여 싣는 이상문학상 작품집. 올해 대상은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에 돌아갔다. ‘존재의 허무’를 그린 수작으로 평가 받은 대상 수상작 외에 정미경의 자선 대표작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 그리고 6편의 우수상 수상작이 실려 있다. 우수상 수상작으로는 구광본의 「긴 하루」, 함정임의 「자두」,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김영하의 「아이스크림」, 전경린의 「야상록」, 윤성희의 「무릎」 등 다양한 주제와 필치를 선보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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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작가 정미경은?
1960년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 소설 부문에 '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감성과 지성, 내면과 서사의 반목을 훌륭하게 통합해 낸 '장밋빛 인생'으로 획일화된 문단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는 평을 받았다.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장편소설『장밋빛 인생』,『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가 있다. 200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정미경> 등저12,420원(10% + 5%)
한 해 동안 발표된 작품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중·단편만을 모은 제 30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올해의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인 정미경의 와 자선대표작 외에도 우수상 수상작으로 구광본의 , 함정임의 , 김경욱의 , 김영하의 , 전경린의 , 윤성희의 등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필치를 보여주는 작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