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작업실
작가들의 작업 뒷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만나기까지, 작가들은 어떤 날들을 보냈을까요?
더워서 아무도 없는 빈 대학 본관 도서관, 무더운 도서관에 있다가 나오면 여름 바람을 누릴 수 있게 해준 중정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_ ]
이 책을 본격적으로 작업한 건 작년. 저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레지던시에 있었습니다. 주로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서 집에서 작업하다가 점심을 먹고, 학교 도서관으로 갔죠. 빈에서는 학교, 슈퍼, 카페 모두 보통 6~7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규칙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했어요. (유럽에선 누구나 슈퍼를 발견하는 순간 바로 ‘장보기 모드’로 돌입합니다. 교직원 포함 모든 학생들이 교내 슈퍼마켓에서 점심시간에 전투적으로 장을 봤죠. 대파나 사과를 사물함에 넣으면서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나 그랬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존한 커피, 그리고 아이스크림 트럭
놀아주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커피 트럭과 도서관에 의지했어요. 사진을 보시면 영화에 나올 법한 멋진 도서관이지만 놀랍게도 냉난방이 안 되는데요. 상상이 되나요? 한여름에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모두 휴가 떠난 빈에 홀로 남아 숨소리 아득한 도서관에 있는 기분. 저는 왜 여기까지 와서 사서 고생하는가 생각했습니다.
작업 공간을 소개해 주세요.
저는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저는 버섯의 포자처럼 남의 책상을 그때그때 점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연필과 지우개를 사용하며, 어떤 글이든 시작은 반드시 손으로 쓰는 데서 출발하게 됩니다. 특히 시는 더 그렇습니다.
마감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그 일을 실제로 하셨나요?
마감을 하면 부산 여행을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여행 계획을 나름 체계적으로 세웠지만, 마감 계획이 체계적이지 못해 결국 마감을 못한 채 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고질적인 문제점입니다. 그리하여 다소 찝찝한 여행을 하게 되었죠. 그럼에도 때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는 연말. 제가 좋아하는 바에서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자신의 문제점을 잠시나마 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집니다. 작업 중 특히 재밌게 본 남의 콘텐츠는 무엇인가요?
빈에서 줌으로 시 쓰기 수업을 했습니다. 지난 여름의 주제는 ‘요즘 문학 탐구’였죠. 박참새부터 김선오, 김유림, 김리윤, 최재원, 문보영, 이소호 까지 나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요즘’을 제법 잘 이해하게 되었는데, 아아. ‘요즘’은 흐르는 것이더군요. 저는 2024년에는 자칭 ‘요즘’ 전문가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2025년의 ‘요즘’ 파악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 작업을 마친 후기
“나는 훌륭한 프로 이야기꾼이 아니고 영원한 아마추어 이야기 직조자. 마이너스 생산성의 가내수공형 이야기 생산자. 재봉틀도 아니고 무려 베틀 짜는 베틀러. (주의 요망: ‘배틀’ 아님) 자본주의 흐름에 제대로 역행하는 멸종 위기의 한 마리 바다거북이 그 자체.
아, 그런데 그것은 전부를 바치는 무모한 여자의 사랑이었고 놀랍게도 내가 여자였다!“
- 서문에서
『사랑의 잔상들』, 『진주』에 이어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 또한 시, 에세이, 비평 어느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더듬거리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책입니다. <악스트>에 글을 연재하고, 이를 다시 하나의 책으로 매만지는 과정이 어떠셨나요?
제 <악스트> 연재 글의 문제점은 탁월한 여성 작가들과 승부를 보려다가 그만 주눅이 들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글에는 분석은 있었으나 ‘내’가 없었고,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인 내가 없었습니다. 나는 먼저 실종된 나의 여자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나 선생님처럼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면 ‘나’는 도망가거나 숨어버릴 테니까 다른 목소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는 여자만 있는 게 아니라 소녀도 있었습니다. 남자도 있고 소년도 있었습니다. 저는 내 안에서 충돌하는 성을 통합하지 않고, 그 목소리들을 교차시키는 식으로 책을 다시 쓰기로 했습니다. 이를테면, 배수아의 소녀와 김혜순의 여자를 엮어서 바느질하는 식으로요.
한 권의 책이란 진실에 다가가려는 여행이라 생각합니다. 영혼이 번쩍 들리는 여행의 경험 없이 책은 진정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 제 가설인데요. 단, 그때의 영혼은 나(작가)의 영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좀 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것이 내가 진실에 다가간 방식입니다.
책 곳곳에 여러 엄마들 이야기가 포진해 있습니다. 작가님의 엄마 이야기도요. “말하기 위해 여자는 자기 안의 엄마를 꺼내야”(59쪽) 하지만 동시에 “아직도 엄마를 기다리고”(102쪽) 있기 때문일까요? 9인의 작가 외에도, 엄마를 꺼내거나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책이 있으실까요?
김미정의 『숨은 우체통』. 저는 저자가 직접 싸준 김밥을 얻어먹으면서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숨은 우체통』은 오래전 혼자 아기를 낳아야 했고, 학대하던 남자를 피해 그 아기를 안고 멀리 도망쳐야 했고, 또 그 아기를 살리기 위해 멀리 보낼 수밖에 없었던 저자의 인생을 담은 회고록이자, 잃어버린 딸을 향해 쓰인 연서입니다. 그러나 얄궂은 문학의 운명처럼 그 편지는 정작 딸에게 도착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끝내 도착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왜 여자는 편지를 쓰고 또 쓰는 것일까요?
도착하지 못하는 편지는 사라지는 걸까요?
작년 저의 엄마는 많이 아팠습니다. 아픔 속에서도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는 엄마를 보며, 저는 집집마다 ‘숨은’ 우체통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서랍 속에 ‘숨은’ 일기와 편지들이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어머니이고, 우리는 그 어머니의 자녀이며, 그 텍스트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ps. 참, 이 시대 저주받은 문학의 운명처럼 『숨은 우체통』은 현재 절판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단 1권 소장되어 있고, 김미정 씨의 집 창고에 10권쯤 남아 있지요. 저는 언젠가 김미정 씨가 숨은 우체통의 문을 열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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