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륙 준비를 위해 덧창을 열어달라고 승무원들이 이야기하며 복도를 지나다닌다. 비행기가 기울고, 타원용의 창 너머로 푸른 바다와 은빛 모래밭이 서서히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독일 땅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를 상상한다. 이모들을 태웠고, 나와 엄마, 아빠, 해나를 태웠으며, 머지않은 미래에 레나와 한수, 그 밖의 수많은 그리운 이들의 안부를 물으러 갈 나를 태울 그 비행기를. 창밖에는 어느새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다. 민들레 꽃씨를 닮은 눈송이들은 춤을 추듯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가볍게 하강하는 중이다. 얼마 안 있어 내가 탄 이 비행기도 착륙할 것이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서. 온통 흰빛으로 눈부실 활주로 위로.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 등을 바로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비행기 바퀴가 곧 지면에 닿기를 기다리면서. 그러고 나면 우재에게 전화를 걸고 이렇게 말해야지.
안녕, 그동안 잘 지냈지? 나는 지금 막 도착했어.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에서 읽었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인터뷰 - 백수린 소설가 편>
오늘은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거라고 속삭이는 소설가를 한 분 모셨습니다. 첫 장편 소설 『눈부신 안부』로 돌아온 백수린 작가님입니다.
황정은 : 등단하고서 12년 만에 쓴 첫 장편 소설인데요. '작가의 말'을 이렇게 시작을 하셨어요. "2020년 7월 25일. 이 소설의 씨앗이 내게 날아온 날짜를 기억한다." 그리고 "첫 장편 소설을 마침내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 있을 것 같다는 예감에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고 하셨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백수린 :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날 시 쓰는 친구랑 평론하는 친구랑 같이 밥을 먹고 있는 자리였는데, 그 즈음 제가 장편 소설을 쓰고 싶어서 계속 소재를 찾고 있다는 걸 친구들이 알고 있어서 이런 걸 써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해줬어요. 그러다가 그때 한 친구가 파독 간호사 전시회를 다녀왔었다고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황정은 : 그렇군요.
백수린 : 예를 들어서 몇 년 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파독 간호사 전시회를 봤는데, 그게 아주 좋았고 그걸 보고서 나오는 길에 '백수린이 쓴 파독 간호사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싶어'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을 했어요. 그리고 그 파독 간호사 전시가 어땠는지를 이야기를 해줬었거든요. 그런데 흔히 우리가 '파독 간호사'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잖아요. 저 역시도 그런 이미지밖에 갖고 있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아닌 되게 젊고 생동감 넘치는 20대 여자 아이들 같은 느낌이 좀 있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때 살았던 그 20대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약간 그런 생각이 들면서 '외국에 20대 때 나가서 뭔가 꿈을 갖고 펼치고 싶어 하는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내가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걸로 어떻게든 소설을 써보겠다고 말하고 헤어졌죠. 그러고서 이야기를 고민하기 시작했었어요.
황정은 : 백수린 작가님도 해외에 체류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험이 (함께) 만나서 '내가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백수린 : 네, 그런 것 같아요. 어리거나 젊은 나이에 외국에 나가서 이방인으로 사는 경험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이라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통해서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제가 조금 생생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눈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파독 간호사를 들여다본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황정은 : 말씀하신 것처럼 그 전시가 세간이 (파독 간호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게 여성 노동자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20~30대 여성들, 그런 여성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에 많이 주목한 전시였고 대단히 인기도 많았잖아요. 저도 인상적으로 본 전시였거든요. 제가 전시 이후에 관련 서적들을 찾아봤는데, 관련한 연구자들이나 학자들은 이미 그런 시선으로 가지고 그 삶들을 해석하고 있었더라고요. 보통 한국 사회에서는 희생자라거나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존재들로 보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잖아요. 불쌍하고 타국에 가서 고생하는 존재들로 보는 시선이 세간의 시선이었는데 '연구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삶을 새롭게 해석을 하고 있었구나'라는 계기가 된 전시이기도 했습니다.
황정은 :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제 소설은 대부분 장면에서 시작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눈부신 안부』의 경우는 어떤 장면이었을까요? 어떤 장면을 쓰고 싶으셨어요?
백수린 : 『눈부신 안부』를 쓸 때는 어떤 장면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이 저의 첫 장편이어서 그런 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단편을 쓸 때는 거의 대부분 장면에서 출발을 했거든요. 어떤 구체적인 장면이 쓰고 싶어서, 아니면 그 장면을 해석하고 싶어서 썼는데, 이 소설에서는 어떤 고정된 장면은 없었고 '어떤 캐릭터를 쓰고 싶다', '그 인물의 삶을 쓰고 싶다' 약간 그런 마음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이게 단편과 장편의 차이인가? 그런 생각을 좀 했고요. 제가 다음 장편을 쓸 때 어떨지 좀 궁금하더라고요.
황정은 : 어느 인물의 삶을 궁금하게 여기셨어요? 이모들인가요?
백수린 : 이 소설을 처음 기획할 당시에는 '오행자 이모'가 저의 주인공이었어요.
황정은 : 화자의 이모죠?
백수린 : 네, 그 이모에서 출발을 했었습니다.
황정은 : 행자 이모의 경우는 실제 모델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제가 작가님의 에세이에서 'M이모'라는 인물을 읽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수린 : 꼭 M이모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고, 저는 사실 이모들이랑 아주 가깝지는 않거든요. 엄마랑 이모들 나이 차이가 좀 있어서. 행자 이모는 제가 어릴 때부터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이모에 대한 판타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정은 : 네, 행자 이모라는 캐릭터에게 애정이 많이 가시겠어요. 은근하게 존재하면서 화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지표들을 제공하는 인물이잖아요. 저도 행자 이모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소설가로서 12년 동안 살면서 '나의 첫 장편'을 생각한 시간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상상을 한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나의 첫 장편은 이런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 라는 바람일 수도 있고요.
백수린 : 어떤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고요. 첫 장편을 어떤 이야기를 쓰면 좋을까를 상상해 본 적은 많이 있었어요. '아마 이방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다', '이왕이면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그 정도로 막연하게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황정은 : 늘 생각하던 요소들하고 만난 거네요. 이번 첫 장편이 이방인으로서 존재한 삶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니까.
백수린 : 네.
황정은 : 첫 장편은 첫 단편집하고는 또 다른 것 같거든요. 저는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내가 오래 붙잡고 있을 질문을 이제 시작한다'라는 일종의 자기 선언적인 면도 분명히 있었거든요. 이후의 중요한 작업들이 결국은 첫 장편으로 어떻게든 되돌아가고 연결되는 면이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백수린 작가님에게는 어떨까요?
백수린 : 글쎄요. 저는 아직 미래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작품이 어떤 의미가 될지 예측하기는 좀 어려운 상태인 것 같아요. 오히려 저의 과거를 돌아봤을 때, 이번에 『눈부신 안부』를 출간하면서 코멘터리북을 같이 냈는데, 그 코멘터리북을 준비하면서 편집자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제 첫 단편과 첫 장편이 만나는 지점이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황정은) 선배님 같은 경우는 첫 장편이 앞으로 있을 글들의 돌아오는 장소가 되어 주었다고 하셨는데, 저는 어쩌면 지난 12년 동안 했던 이야기들의 마침표를 찍는 자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이제 다음 작품을 쓸 때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어떤 마지막 챕터로써 갈무리하는 작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조금 했습니다.
황정은 :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된 소설입니다. 연재 당시에는 제목이 '이토록 아름다운'이었어요. 제목을 바꾼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백수린 : 약간 자의 반 타의 반 바꾸게 된 것인데요. 연재할 당시에는 사실 제가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가제로 붙여놓은 상태였어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제목을 붙였던 건데,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이 '각각의 사람들이 다 얼마나 아름답고 고유한가'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런 느낌으로...
황정은 :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것이다.(웃음)
백수린 : (웃음) 네, 그렇게 붙여놨었는데. 그런데 쓰는 동안 정이 붙어서 '그냥 이 제목으로 가도 되겠다' 그렇게 저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모든 분들이 반대를 하셨어요. 너무 추상적이라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뭔가 분명한 것이 너무 없고 막연한 느낌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제목을 얘기했을 때 너무 좋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바꿔야 되지 않겠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럼 바꿀까?'라고 생각을 하고 여러 고민을 하다가, 또 편집자님과도 상의를 하고 그래서 지금의 제목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황정은 :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가 조금씩은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저는 들었습니다. 다들 서로 조심스럽게 안부를 묻는 사이 같단 말이죠. 이 안부를 '눈부신 안부'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혹시 있을까요?
백수린 : 슬픔의 긴 터널이라고 책에도 표현이 되어 있지만, 거기를 지나서 마침내 만나게 되는 어떤 밝고 환한 같은 안부라는 의미로서도 '눈부신 안부'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고요. 어떻게 보면 안부라는 것이,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고 안녕을 물어주고 하는 그런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황정은 : 작가님은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시나요?
백수린 : 남들은 알지 못하지만 각자만의 이유로 어떤 상실이나 슬픔에 빠져 있고, 어떤 틀 안에서 자기를 가둔 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밖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소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자기 자신을 돌아봐서 가능하거나 자신이 회피했던 것들을 직면해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도 있을 것 같고요. 동시에 자기를 초과한 힘들이 작용해서, 그리고 그것들이 타인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타인이 가지고 있는 다정함과 만나서 나를 바깥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것을 조금 알게 해주는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백수린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제45회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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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