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예술』은 한글 서예가 윤영미의 첫 번째 에세이다. 그가 쓰는 글씨는 어떤 금기도 없어 자유롭다. 붓이 주는 강렬한 힘과 서예가의 감정선이 합쳐진 글씨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제도권을 거부하고 타인의 생각과 간섭을 대놓고 신경 쓰지 않으며, 말 그대로 인생의 주체가 된 예술가의 태도와 생각을 서예 작품과 함께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한글 서예의 아름다움을 엿볼 순 있지만, 한글 서예의 아름다움을 대놓고 찬미하는 글을 읽을 순 없다. 붓으로 금기를 깨는 예술가 윤영미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서예를 하시는 것과 글을 쓰는 건 아주 다른 경험이셨을 텐데 어떠셨나요? 책을 내게 된 소감이 궁금합니다.
제 평생 명함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종이 한 장 내밀며 말하는 게 싫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 출간으로 거대한 명함이 생겨 버렸습니다. 책을 통해 내장 속 깊숙한 생각까지 꺼내놓았습니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제 안에 있는 언어의 민낯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은 이미 책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있지만, 서예가는 이제야 책으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같아 더 특별한 책이 될 것 같습니다. 강연장에 모인 특정한 사람들 앞에서만 아니라 책을 핑계로라도 더 넓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글씨를 자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벌써 흥분됩니다.
책을 다시 읽어보니 '논다'는 동사가 정말 자주 나오더라고요. 작가님께 '논다'는 건 어떤 건가요?
제 일상, 모든 행위가 놀이입니다. 글씨 작업도 놀이, 숨 쉬며 하루하루 사는 모든 것이 놀이가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냐고 묻지만 저처럼 모든 걸 놀이하듯 해 보세요. 에너지가 넘치는 게 당연하죠. 15년 전에 집을 짓고 당호를 '유희재(游喜齋)', '기쁘게 노는 집'이라 지었습니다. 논다는 건 즐기는 겁니다. 글씨 쓰기를 즐기니 제 일생의 90%는 노는 일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붓을 한바탕 휘두르면 최상의 놀음을 했다는 즐거움에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책의 부제가 '붓으로 금기를 깨는 예술가가 전하는 삶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행동 중에 작가님이 시원하게 깨트리고 계시는 금기를 말씀해 주신다면요?
혼자 긴 여행을 하다 보면 SNS 댓글로 '가족이 그 여행을 허락했는가?' 묻는 사람이 있는데 산소통 하나 입에 물고 싶은 심정입니다. 책에도 몇 번 등장하는 저희 가족은 무척 평화롭습니다. 각자의 일상과 개개인이 중심입니다. 가족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으뜸으로 하자는 게 저희 가족의 룰이죠. 그러면서 각자 성장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초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제가 초심을 잃지 않았다면 성장은 없었을 겁니다. 모든 걸 처음 그대로의 그릇에 담을 수 없습니다. 백이면 백 개, 천이면 천 개의 마음 그릇에 담아야 합니다. 저는 변하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고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작가님의 끓어 넘치는 에너지와 고도의 집중력, 고요함을 요구하는 서예 작업이 어떤 식으로 조화를 이루는지 궁금합니다.
끓어 오르는 에너지는 저의 꽤 긍정적인 기질에서 나오고요. 집중력은 예민함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한 획 한 획 천천히 집중하며 정신 수양의 수단으로 썼던 서예가 지금은 예술로의 서예가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선을 그리는 글씨 예술이 제 밝은 에너지와 고독한 집중력에 맞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기질만 가지고 있다면 징그러울 것 같아요. 저는 자유로운 예민함이 좋습니다. 제 글씨가 그 결과물입니다.
서예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안타깝게 여기거나 한글 서예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는 문장이 책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뭐든지 변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AI가 통용되는 세상에 '서예가 어쩌고 저쩌고... 훌륭한 이 서예를...' 이런 말은 서예가들의 꼰대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대중은 어려운 한자로 쓴 서예에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대중을 글씨 예술로 끌어들이려면 서예가를 먼저 보여주고 그 후에 서예를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예가 소수의 취미처럼 되어버려 대중성과 다소 멀어졌기 때문에 다른 예술들과는 방법을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이런 인상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한글이 더 예뻐졌어요", "한글이라면 세종대왕이 만든 우리 글 정도로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왔는데, 선생님의 글씨를 보고 한글의 존재감이 무섭게 다가왔어요" 대중에게는 한글이 정답이었습니다. 제가 기획하고 진행하는 <글씨콘서트>는 한글 서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극찬할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책에 "간섭받는 것은 질색하니 간섭하기를 싫어하고,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니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작가님이 『인격예술』을 통해 독자들을 깨우치는 게 아니라 느끼길 바라셨던 게 있었다면 어떤 것일까요?
서예가가 쓴 책은 이미 서예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읽히는 게 보통이지만, 저는 『인격예술』의 독자가 서예를 접해보지 않은 일반 대중이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붓으로 글씨를 쓰기보단 서예가인 인간의 삶과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냈습니다. 한 인간에 이끌려 글씨에까지 자연스럽게 매료되기를 기대하면서요. 서예의 매력을 알아달라고 요구하진 않았습니다. 저도 많은 작업을 하며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글씨가 참 매력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20년 뒤가 궁금합니다.
20년 후면 제 나이가 70이죠. 서예가의 글씨는 청년기와 장년기와 노년기로 나뉩니다. 청년기에는 힘차고 중년기에는 세련되고 노년기에는 비록 힘은 빠져도 그렇기 때문에 나오는 질박하고 고졸한 맛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순원체로 글씨체 등록을 하면 어떻겠느냐 물어보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제 감정이나 획의 상황에 따라 매일 달라지는 게 글씨인데 어떻게 하나의 글씨로 규정할 수 있겠어요. 어찌 보면 글씨가 매일 달라지는 것이 자유로운 저를 닮아서인 것 같습니다.
제가 꿈꾸는 건 있습니다. 제 글씨를 제 언어로 쓰고 싶습니다. 남의 시, 남의 문장이 아닌 제 언어만의 문장으로 글씨를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첫 책의 의미가 매우 남다릅니다. 『인격예술』 출간은 제 언어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고 서예가로 더 당당히 붓을 들 수 있는 자존감입니다. 아마 저의 글씨는 지금은 자유로움이겠고 20년 후에는 당당함일 것입니다.
*윤영미 대학과 대학원에서 서화예술을 전공했다.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것도 한자였고, 세상에 먼저 발표한 전시도 한자 서예였지만, 공기처럼 숨 쉴 수 있는 한글로 심장을 파고드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20년 동안 서예 선생으로 살다가 오십을 앞두고 한글 서예가로 세상에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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