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1회차 인생의 행복을 누려요 - <브러쉬 업 라이프>
생은 짧고 깨달음에 필요한 시간은 길어서, 2회차 인생이어야 보이는 사실도 분명 있을 테다. 이를테면, 이 드라마 1화의 첫 컷이 드라마 마지막 화의 엔딩 컷과 같다는 사실은 드라마를 처음부터 다시 한번 더 봐야 알 수 있는 것처럼.
글ㆍ사진 김혜경(광고AE, 작가)
20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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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광고AE가 격주 화요일,
볼만한 드라마와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일본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 포스터 (왓챠 제공)

'인생 2회차'란 말이 있다. 같은 인생을 두 번 반복한다고 느껴질 만큼 능숙하고 노련해 보이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다. 게임을 할 때 같은 시나리오를 거듭할수록 시행착오를 줄이고 최단 루트로 공략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 역시 N회차는 되어야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정해진 시나리오가 없는 인생에서 공략해야 하는 건 대체 뭘까? 과거를 돌이킬 수 있다면 우리는 무슨 선택을 하며 살게 될까?

대부분 미래에 가치가 보장된 주식, 가상 화폐, 부동산을 사거나 로또 한 회차의 당첨 번호라도 맞춰서 '재벌집 막내아들' 수준의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어쨌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다면 행복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장르 불문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이 유행인지 오래다. 주로 지난한 이번 생은 후딱 끝내버리고, 전생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태어나 화려하게 성공하고 복수하고 사랑하는 서사들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 2회차라면 꽤 뛰어난 인재가 돼 있을 거예요. 노벨상을 받는다든지요."

"확실히 그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으면 이상해요."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에서 인생 3회차 때 드라마 PD가 된 주인공이 본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기획한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를 제작하는 회의에서 나오는 대화다. 아쉽게도 드라마 속에서 정말로 회귀를 반복하는 주인공인 '콘도 아사미(안도 사쿠라)'의 삶은, 그들의 말에 따르면 '재미가 없다'.

1회차의 콘도 아사미는 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며 한 달에 두 번 이상 소꿉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그야말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게 되고, 새하얀 공간에서 눈을 뜨게 되기 전까지는! 그가 안내 데스크에 앉은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안내받은 새 생명은 다음과 같다.

"콘도 님은 과테말라 남동부의 큰 개미핥기입니다."

개미핥기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에게 데스크 직원은 '이 모든 일은 생전 내용에 근거한 일'이며, ‘원하는 생명이 아니라면 필요한 덕이 부족하다'라고 답한다. 좌절하는 그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내세에 큰 개미핥기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현세에 콘도 아사미로서의 인생을 다시 살거나. 현세에서 덕을 쌓는다면 내세에서 원하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1회차의 기억을 가진 채 2회차 인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나는 10화까지 그는 총 5회차의 인생, 도합 232년을 산다.

드라마 10화 동안 232년의 인생이라! 굉장히 버라이어티할 것 같지만 그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유아기도, 덕을 쌓기 위해 인생의 회차마다 수행하는 정기 미션도 같다. 친구의 가정을 지키고, 싫어하는 선생님이지만 곤경에 빠지지 않게 구하고, 잊을 뻔했던 아빠의 생일을 챙기고, 할아버지의 병이 악화된 이유를 알아내 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돕고, 친구의 불륜을 막는 것.

대부분이 상상하는 'N회차 인생'과 달리 그가 삶의 흐름을 크게 비틀지 않는 건, 다르지 않은 생이기에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순간들 때문이다. 같은 친구들과 함께 같은 시절을 지나가기에 나눌 수 있는 순간들은 소소해도 분명한 행복으로 남는다. 함께 웃고, 즐겨보는 드라마에 대해 떠들고, 스티커를 교환하고, 유행하는 포즈로 스티커 사진을 찍고, 단골 식당에서 밥을 먹고,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이라고 시작하는 말을 기꺼이 주고받고, 과자 취향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끝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의 순간은 232년을 반복해도 좋다. 그런 친구들과 함께라면 변함없이 '이날이 제일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돈 대신 덕을 쌓는 그의 모습은 분명 '드라마틱'하진 않다. 같은 친구들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야기는 유행하는 '회빙환' 서사들과도 다르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겹기보단 그저 부러웠다. 나 역시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 돌이켜보게 되기도 했다. 연락처에 저장된 소중한 이름들과 갤러리에 사진으로 저장된 나날들을 다시 확인하면 슬며시 웃음이 지어졌다. 행복했던 과거는 자연스레 '다음'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니까. 다시 반복하고 싶은 '다음'이 언제 올지, 과연 올 수 있을지 보장되진 않아도.

"집에서 샤워할 때 물을 틀면 따뜻해질 때까지 오래 걸리는 것 같잖아. 

실제로는 몇 초밖에 안 되는데 체감은 2~3분이야. 

아침엔 특히 더 긴 것 같지 않아? 가끔은 영원히 따뜻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해."

어차피 인생의 모든 순간은 똑같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한 찰나를 오래도록 되새기기 위해 나머지를 버티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영원히 따뜻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하더라도, 그 불안까지도 감당하면서.

드라마 제목 <브러쉬 업 라이프>에서 'Brush up'은 이미 배운 것이지만 완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시 공부한다는 뜻을 가진 영어 표현이다. 브러쉬로 문질러 광을 내듯, 녹슨 지식이나 기술을 다시 반짝거리게 한다는 의미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는 인생에서 보내는 지금이라는 순간이 소중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새삼 다시 깨닫는 것처럼. 232년이나 반복하지 않아도 뻔한 사실을, 누군가가 232년이나 살고 난 모습을 보고서야 분명히 보게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 '브러쉬 업 라이프!' 눈을 반짝 뜨고, 반짝반짝 빛나는 지금을 바라보며 살자!


생은 짧고 깨달음에 필요한 시간은 길어서, 2회차 인생이어야 보이는 사실도 분명 있을 테다.

이를테면, 이 드라마 1화의 첫 컷이 드라마 마지막 화의 엔딩 컷과 같다는 사실은 드라마를 처음부터 다시 한번 더 봐야 알 수 있는 것처럼. 

동시에 깨닫겠지, 좋은 건 반복하면 더 좋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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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광고AE, 작가)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한눈파는 직업』, 『아무튼, 술집』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