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8일, 홍콩 영화에서 느낀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북토크가 열렸다. <방구석 1열> 등을 통해 홍콩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영화 평론가 주성철. 그는 영화 잡지에서 20년 일하며 양조위, 유덕화, 왕가위, 성룡, 주성치 등 수많은 홍콩 영화인들을 인터뷰한 자타공인 홍콩 영화 전문가다. 홍콩을 직접 오가며 홍콩 영화의 성지들을 섭렵한 끝에, 그 이야기가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번 행사는 홍콩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웨이 티하우스 앤 레스토랑'에서 차와 다과를 즐기며 진행되어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됐다. <화양연화>의 OST와 함께, 독자들은 홍콩 영화의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와 함께하는 홍콩 여행
주성철 기자는 직접 찍은 미공개 사진과 함께, 홍콩 영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소개했다. 첫 번째는 완차이 지역의 랜드마크 '더 폰 레스토랑'으로, 두기봉 감독의 영화 <참새>의 배경이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폐업을 하고, 그 자리에는 티하우스가 영업 중이지만, 옛스러운 분위기만은 그대로다.
"더 폰 레스토랑은 100년도 더 된 옛 전당포 건물을 그대로 레스토랑으로 바꾼 장소예요.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가 시민들이 남겨두자고 해서 보존된 건물이죠. <참새>는 두기봉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누아르 계열의 영화는 아니지만, 제가 부산 영화제에서 두기봉 감독을 인터뷰했을 때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케이(임달화 분)는 카메라를 들고 사라져 가는 홍콩의 이곳저곳을 찍어요. 감독은 홍콩의 수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어, 그것을 기억하겠다는 마음으로 주인공에게 총 대신 카메라를 들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홍콩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 <화양연화>의 명소인 '골드핀치 레스토랑'도 빼놓을 수 없다. 코즈웨이베이에 위치한 이곳은수 리첸(장만옥 분)과 초 모완(양조위 분)이 단 둘이 만나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한때 레스토랑에서는 '화양연화' 세트를 주문할 수 있었고, 영화 장면에 등장한 좌석을 차지하기 위한 손님들의 쟁탈전도 벌어졌다.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 옥색 파이어킹 제디트 찻잔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화양연화>의 시대적 배경인 1961년은 당시 홍콩 사람들의 자부심이 치솟던 시기였어요. 실제 영화에서도 수 리첸의 남편이 일본으로 출장을 가서 코끼리 밥통 등을 사오는 장면이 나와요. 파이어킹 제디트 찻잔도 홍콩 중산층들이 자신의 경제적 위치를 드러내는 물건이었죠. 딱 1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아비정전>인데, 그 사이 1년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홍콩의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대영 무역량이 가장 높다가 대미 무역량이 급격히 늘어납니다. 홍콩 사람 입장에서는 홍콩이 언제까지나 영국의 식민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미국과도 교역한다는 사실에 자신감이 최고에 다다른 시기였죠."
'케네디 타운' 역시 주성철 기자가 강력 추천하는 지역. 2014년 이후 지하철이 다니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이곳에는 최근 인스타 명소로 떠오른 사이완 수영창고가 있고, 리안 감독의 <색, 계>에 등장한 '이'(양조위 분)의 집이 있다. 영화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폐허였기 때문에 영화 제작진은 이 장소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아직도 흰 벽과 초록 대문이 영화 속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홍콩의 과거와 현재
많은 감독들에게 홍콩은 화려한 과거와 쇠락한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특히, 왕가위 감독에게 홍콩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 일이 중요했다. 대표적인 예가 <중경삼림>의 두 가지 대조적인 장소인 '중경 빌딩'과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다.
"<중경삼림>은 상당히 사연이 긴 영화입니다.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으로 흥행 참패를 하고 홍콩 영화제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해 '택동영화사'를 차렸어요. 그후 감독은 급하게 제작비가 필요해 현대 홍콩 영화를 찍게 되는데, 그것이 <중경삼림>입니다. 이 영화는 '홍콩의 낮과 밤'을 담는 프로젝트로 시작해서 1부는 낮, 2부는 밤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장소가 '중경 빌딩'과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입니다. '중경 빌딩'은 왕가위 입장에서는 굉장히 각별한 장소예요. 한때 아버지가 지하 클럽 매니저로 일했을 정도로, 홍콩의 영화로운 시절을 상징하는 곳이었지만, 어느 순간 쇠락하고 말죠. 감독은 그 빌딩에서 홍콩의 과거를 발견하고 기억을 남기려 했던 겁니다.
반대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홍콩의 현재를 상징해요. <중경삼림>에서 페이(왕페이)가 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경찰663(양조위)의 집을 몰래 쳐다보죠. 당시 영화를 찍을 때 이 에스컬레이터가 만들어졌으니 어마어마한 문명의 이기로 보인 거죠. <아비정전>에서 경찰관(유덕화)과 수리진(장만옥)이 우연히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트램이 있는 지역까지 걸어내려오는 정서가 굉장히 중요해요. 점프컷으로 생략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저 거리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대화가 오갔을까 상상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길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통해서 한번에 연결된 거예요. 에스컬레이터를 타보면 다 아시겠지만, 한쪽으로만 서서 이동해야 해서 나란히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불가능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페이가 조금 자세를 낮추면 눈높이에 경찰의 집이 바로 보이는 곳이기도 하죠. 정말 감독이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장소를 설정했구나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북토크 내내, 주성철 기자는 코로나 이후 홍콩의 많은 장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 속 장소를 가보아야만 알 수 있는 감동이 있어 책에 실린 장소들을 직접 방문해볼 것을 권했다. 세 차례 서빙되는 티와 마작 모양의 초콜릿을 즐기며, 독자들은 영화의 추억에 푹 빠져들었다. 한쪽에는 홍콩의 분위기를 재현한 포토존이 자리해 있어 홍콩 영화의 장면들을 재현할 수 있었다.
독자와의 Q&A
홍콩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인가요?
아무래도 장만옥이죠. 왕가위 감독의 긴 영화 인생을 함께 한 단 한명은 역시 장만옥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장국영, 양조위, 유덕화 등 많은 명배우들이 있었지만, 왕가위 감독의 영화 만드는 스타일을 견디면서 함께 했던 사람은 장만옥이었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만옥의 작품은 관금봉 감독의 <완령옥>(1992)입니다.
장국영의 기일에 맞춰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찾는다면, 어떤 일정을 추천하시나요?
올해가 장국영의 20주기이기 때문에, 올해 4월 1일에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다른 관광객처럼 아침 일찍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 가서 사진을 찍고 샤틴에 위치한 보복산의 납골당에 가고, 코즈웨이베이에 위치한 장국영의 단골 식당 '모정'에서 하루를 마무리했죠.
'주성철과 함께하는 홍콩 영화 성지 순례 여행'을 진행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예전에 몇 번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여행사분들이 가격대를 높게 책정해서 늘 고민이에요.(웃음) 열심히 고민 중입니다.
왕가위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저는 늘 답이 정해져 있어요. 언제나 <해피투게더>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해피투게더>를 다시 봤는데, 양조위가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한 장면에서 유독 마음이 한동안 진정이 안 됐어요. 양조위가 여권을 숨겨놓고 안 주니까 장국영이 계속 달라고 하니까 양조위가 싸늘하게 "싫은데"하면서 어떤 표정을 지어요. 그런 정서가 왕가위 영화에서 정말 중요해요. 나중에 장국영이 필리핀에 가서 어머니를 만났을 때도 "난 싫은데"하면서 돌아서서 걸어가는 장면이 있죠. 왕가위 영화에서 중요한 건 바로 이거구나 다시 느꼈습니다.
홍콩 영화에 대한 기자님의 순수한 '덕심'에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영화 속 장소들을 발굴하셨나요?
한정된 정보 안에서 최대한 틀리지 않으려고, 인터뷰 등의 수단을 통해서 채우려고 합니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엔딩 크레딧에 장소 협찬 목록이 뜨잖아요. 그것으로 단서를 찾아서 직접 장소들을 찾아가기도 하고요.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주윤발이 나오는 영화 <타이거 맨>의 배경인 산속 오지 마을을 발견했을 때였어요. 홍콩과 관련된 모든 사진집을 모조리 뒤지다가, 사진 한 장을 보고 영화 속 그 장소 같아서 무작정 갔었어요. 다른 정보 없이 직접 찾아낸 장소여서 정말 뿌듯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홍콩 영화에 막 입문하려는 사람을 위해 영화를 추천해주신다면요?
왕가위와 장국영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장국영은 정말 놀라운 점이, 홍콩이라는 숨가쁘게 돌아가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필모그래피 관리를 기가 막히게 잘 했어요. 버릴 작품이 하나 없거든요. 그래서 그들의 영화로 시작하면 실패할 일은 없다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또, 저는 옛날 장국영 영상을 많이 찾아봐요. 실제로 홍콩에서 한 콘서트 영상이나 한국에서 예능에 출연한 영상 등이 정말 많아요. 충분히 재미를 느끼실 겁니다.
지금도 사라져 가는 홍콩의 장소를 보면 어떤 감정이 드시는지요?
왕가위 감독이 <해피투게더>에서 이과수 폭포의 거대한 포말을 통해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으로 표현하는데요. 어쩔 수 없이 홍콩 반환을 두려워하면서 만들기 시작한 영화였지만, 거스를 수 없는 물결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담겼다고 생각해요. 저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모든 것들이 조금씩이라도 더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껴요. 그게 멸종되어가는 홍콩 영화를 바라보는 제 심정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홍콩에 갈 때마다 노스포인트에 있는 '퀸즈 카페'를 들르는데, 거기만큼은 영업이 계속 잘 되고 있어요. <아비정전>에 나왔던 공중전화 박스도 있고, 감독과 배우들의 사인 액자도 그대로 걸려 있죠. 제발 여기만큼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홍콩을 가는 것 같습니다.
*주성철 영화 주간지 <씨네21>의 편집장. 2000년 이제는 없어진 영화 월간지 <키노>에 들어가 영화 기자 일을 시작해, 역시 현재는 없어진 영화 주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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