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기획은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천천히 진행되었다. 가령 10년 전쯤 정서경 작가에게 '엄마 됨'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써달라고 제안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아이와 가정, 친구들 그리고 본업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엄격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관리하는 작가인지라 그 책은 쓰이지 못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정서경 작가에게 이 주제에 관한 글을 받겠다는 생각은 늘 했다. 오랜 세월 이 주제에 대해 나눈 소중한 이야기들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를 낳고 10년 정도 고생하고 나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가 나누는 중요한 이야기들 중에서 아이 이야기의 비중이 다시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나도 우리는 늘 아이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다. 우리는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섞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 아이들이 커서 우리를 떠나가더라도, 우리 영혼에는 누군가를 키우고 돌봤던 시절의 감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홍한별 번역가는 십수 년 전 블로그에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올린 적이 있다. 그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책을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내가 아이를 낳기도 전이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밀을 거기에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번에 청탁을 받고 착한 말만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다며 고사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날 우리는 또 이 주제에 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돌봄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모든 존재를 돌봐야 하는 품이 넓은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 편견이 있지만, 사실 돌봄의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우리가 돌봄을 통해 우리의 작고 작은 그릇을 정확히 알게 된다는 점이다. 이전에 부렸던 오지랖이 오히려 매우 부끄러워질 정도다. 내가 구체적으로 돌볼 수 있는 존재가 정말로 얼마 안 된다는 사실, 돌봄이 마음이나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물리적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책에서 돌봄이라는 제목 아래 가장 어둡고 가장 복잡한 이야기까지 다 해보자고 결의했다.
서유미 작가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랫동안 소설 창작 강의를 하고 있다. 나도 퇴사 후 이 소문난 명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밤낮으로 글을 쓰는 수많은 엄마를 만났다. 그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느라 회사를 휴직했거나 퇴사를 했거나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분들이었는데, 그들이 아이를 재우고 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작업'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굴려보게 되었다. 이 책을 만들면서 여러 가지 혼란이 찾아올 때마다 이 장면을 떠올렸다. '돌봄'만큼이나 이 책의 중요한 주제인 '작업'은 직업과도 다르고 취미와도 다르다. 작업은 우리가 꼭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시대적 분위기나 세상의 시선으로 봤을 때 이것이 괜찮은 일인지 내가 잘 해내고 있는지의 성과 여부'가 아니라 '나는 행복할 것인가'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100매 정도는 쓸 수 있다. 지금 주어진 지면이 10매뿐이라 다 다룰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이 책은 내가 오랫동안 이들을 관찰하며 나누었던 이야기, 이들에게 받았던 감동과 영감에서 기획되었다. 분량은 길지 않지만 오래 숙성된 경험과 감정과 생각을 담고 있고, 무엇보다 필자들의 순전한 삶의 조각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럽다. '양육(돌봄)'이라는 가장 오해받기 쉽고, 가장 폄훼받기 쉬운 이야기들을 검열없이 다룸으로써, 우리는 안전하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조금 더 넓히고자 했지만, 어떤 편견과 혐오의 말이 돌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양육과 작업의 양상들이 더 존중받고 지지받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돌봄'과 '작업'에 관한 더 풍성한 이야기들이 더 자유롭게 창조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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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돌고래 편집장)
돌고래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대표. 지은 책으로 『돌봄 인문학 수업』, 『사회과학책 만드는 법』, 함께 쓴 책으로 『서경식 다시 읽기』, 『돌봄과 작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