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이 붕괴하자 다른 나라가 그렇듯 '고요한 아침의 나라' 역시 손님맞이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해졌다. 매일 새롭게 들려오는 해외 아티스트의 내한 소식은 물론, 공연과 페스티벌로 점철된 SNS 피드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며 일정을 확인하는 경우가 얼마나 잦았던가. 음악 마니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을 2022년을 다시 되돌아볼 팝 앨범 10장을 정리했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비욘세(Beyonce)
여성 뮤지션의 약진을 진두지휘하는 흑인 음악의 대변자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모두가 펑크(Funk), 디스코로 회귀할 때 비욘세는 뒤를 이어 등장한 음지의 전자 음악 '하우스'를 들고 돌아왔다. 먼지 쌓인 댄스 플로어를 재정비하기 위한 춤곡 모음집이 코로나 위기의 세상을 하나로 뭉쳐 차별 없는 지하 세계로 끌어들인다.
클럽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같은 음악을 즐길 뿐이다. 이것이 음악의 의미이고, 그 의지는 비욘세가 계승한다. 수많은 참여진, 담긴 내용, 여러 장르를 응축하는 힘으로 현세를 응집한다. 2022년이
로살리아(Rosalía)
리키 마틴과 샤키라가 이끌었던 새천년 전후를 거쳐 'Havana'와 'Despacito'를 주역으로 한 2010년대 후반 이후, 라틴의 세계 침공은 이제 파티 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배드 버니의
매 순간 쉬지 않고 예상을 뒤흔드는 역동적인 전개와 청아한 목소리가 만나 무질서 속의 아름다움을 피워냈다. 다양한 스타일과 레퍼런스 차용을 동력 삼은 산발적인 공습은 가족과 친구, 내면에서 발굴한 텍스트로 가지런히 모아져 가수 고유의 힘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 출신 가수가 과거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 문화를 전유한다는 논란은 한편으로 보면, 세계화에 따른 라틴 음악의 무국적성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국경과 장르의 틀을 넘어 뻗어나가는 라틴, 좋든 싫든 그 선봉장에 로살리아가 존재한다. (한성현)
제이아이디(J.I.D)
애틀랜타 힙합 크루 스필리지 빌리지에서 마이크를 잡던 무명 래퍼에서 2017년 제이 콜이 이끄는 드림빌 레코드에 사인한 슈퍼 루키로 거듭나기까지 착실히 실력을 증명하며 성장해왔다. 실력보다도 개성, 눈길을 끄는 재미가 중요한 힙합 신의 경쟁 홍수 속에서도 좋은 음악과 랩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성실한 노력과 가파른 성장 곡선은
근래 이렇게 충만한 감상을 선사하는 앨범이 또 있었나. 더 날카로워지고 물오른 래퍼의 플로우가 대번 청각을 장악하고 옛 재즈와 소울의 향취를 가득 품은 프로덕션은 아름다운 선율의 향연이다. 자신의 역사를 치열하게, 입체적으로 풀어낸 자전적 메시지는 또 어떤가. 언뜻 진부할 수 있는 가족 이야기도 그의 펜 끝에선 한 편의 영화로 재생된다. 탄탄한 랩, 수준 높은 프로덕션, 여운 진한 메시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제이아이디는 현존 최고의 래퍼 중 하나다. (이홍현)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명불허전이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올해만
돌아온 기타리스트의 존재감은 실로 거대했다. 그는 잠시 전자 음악에 몰두했던 최근 이력이 무색하게 견고한 록 기타 연주로 리듬 파트와 보컬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치밀하게 사운드의 틀을 짜 맞췄고 매끄러운 코러스와 맹렬한 기타 솔로로 자신을 대체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선포했다. 멤버 재편성으로 발산된 화학 작용은 펑크 록과 그런지, 재즈 등 폭넓은 장르 소화력으로 불씨를 옮겨 서로 즉흥의 재간을 겨루는, 견고한 음악 회합으로 완성됐다.
위켄드(The Weeknd)
이즘 필진들은 위켄드가 음반을 낸 해의 연말이 되면 늘 고민한다. '올해도 위켄드 음악을 올해의 앨범이나 싱글로 뽑아야 하나?'가 난상 토론의 주제지만 결국엔 선정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음악보다 좋으니까.
미츠키(Mitski)
귀를 잡아채는 멜로디와 장르를 넘나드는 작곡 능력도 만개했지만, 미츠키의 핵심은 역시 멜로디와 단어를 조화롭게 꾸며내는 융합력이다. 'Your best American girl'이나
돌아온 미츠키는 스스로 전자 음악의 연회를 거행한다. 과거를 계승한 신스팝 'The only heartbreaker', 디스코 넘버 'Love me more'의 경쾌한 선율과 '누군가를 사랑하니 분명 외로울 것('Should've been me')'이라는 처연한 가사가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변화를 위한 과정이었다는 소회처럼 뚜렷한 반전의 미학은 날카롭고, 관계와 사랑의 곁가지조차 손질해내는 도도한 표현 역시 세밀하다. 내면으로 깊게 침투한 가시마저 가다듬어 재개장한 정원에 방문객은 연신 감탄을 보낼 수밖에. (손민현)
데인저 마우스 앤 블랙 소트(Danger Mouse And Black Thought)
흑인 음악의 축을 차지하는 두 장인이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연마한 힙합 앨범엔 각기 다른 색들이 이음새 하나 찾을 수 없이 완벽하게 접합해있다. 다만, 그 질감은 절대 부드럽지 않았다. 오랜 명작에서 빌려온 샘플을 기반으로 둔탁한 드럼과 베이스로 제련된
마치 축음기처럼. 이 년 전 세상을 떠난 엠에프 둠을 비롯해 과거를 지향하는 한편, 붐뱁의 다음 단계를 제시하는 콘웨이 더 머신을 통해 현재까지 보듬는 복잡한 흐름이 데인저 마우스가 일궈낸 고풍스러운 원반 위로 정렬한다. 음구(音溝)를 통과하는 바늘의 역할은 블랙 소트의 날카로운 래핑. 묵직한 목소리가 진동을 일으키며 세대와 주파수를 맞춘다. 어찌 보면 고루할 수 있는 작법을 끊임없이 담금질하며 다수의 공감을 구할 걸작으로 탄생시켰다. 시대를 소환하지만 잠식되지 않고 고유 색채를 발현하는 점에서 이미 '클래식'이란 칭호의 영예를 부여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손기호)
찰리 XCX(Charli XCX)
보통은 이러지 않는다. 앨범 다섯 장 계약의 메이저 레이블과의 종결이라면, 게다가 그 13년간 지속적으로 현저한 제작 자유의 침해를 경험한 경우라면 그 작품은 제목처럼 충돌과 분노의 화염 아니면 키스 앤 텔의 폭로일 소지가 크다. 거기에다 음악가의 본령인 '실험'에 충실해 온 주체임을 감안했을 때 막상 결과물이 지극히 레트로적, 타협적, 상업적임은 놀랍다. 뉴 잭 스윙, 디스코, 펑크(Funk), 신스팝, 하우스 팝 등 재래적 요소들을 순차적으로 배열하면서 유사 히트곡 컴필레이션을 꾸려냈다. 굿판은 걷어치웠다.
이러한 역공이 도리어 우호적 시선을 유발한다. 기존 질서로 향하는 '타락한 팝의 하수인'(이즘 리뷰 한성현)일지 몰라도 거기엔 음악 세계와의 화해 나아가 자신에 대한 다독거림이 있다. 예술적 아이콘 대신 '대중가수적 인격'을 택한 것이다. 세상과의 연결점을 놓치지 않으려는, 다수의 배제를 피하려는 안간힘 발버둥 몸부림은 아름답다. 실은 작은 도발들의 연속이다. 'Good ones', 'Beg for you', 'Used to know me' 등 짧게 끊어치는 곡들이 숨 가쁘게 이어지는 실한 수작 소품집! (임진모)
잭 화이트(Jack White)
지난 11월 10일 예스24 라이브 홀에서 열린 내한 공연은 여러모로 화제였다. 고밀도 사운드와 퍼포먼스가 호평받았고 록 마니아들은 젊은 거장의 연주에 화답했다. 사운드 적으로 양단에 선 두 음반
할퀴는 듯한 음색과 이펙트 잔뜩 걸린 기타 톤의
빅 시프(BIg Thief)
사후 세계의 입구를 여는 어쿠스틱 종교 의식. 공터에 버려진 플라스틱 인형들의 정겨운 캠프파이어. 우연히 주운 로파이 카세트에 녹음되어 있던 동화집 내레이션. 빅 시프의
모든 것은 변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과 물처럼, 산들거리며 정처 없이 떠도는 나뭇잎과 나비('Change')처럼. 하물며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조차도 그들의 초연함 앞에서는 그저 변화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남는다. 빅 시프의 선율에는 시간을 머금고 조금씩 바뀌며 전승되어 온 여러 아티스트의 정신과 흔적이 깃든다. 밥 딜런의 낭만과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투쟁, 그리즐리 베어의 거리감, 피오나 애플의 즉흥성, 그리고 카시트 헤드레스트의 투박한 질감까지. 그야말로 마법 같은 1시간 20분이다. 잘 짜인 한 편의 판타지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장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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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