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그림책 작가 '피오트르 소하'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꿀벌, 나무, 위생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한 감각으로 그려내 지식 정보 일러스트레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듣는 작가다.
지난 12월 6일, 합정동 북카페 디어라이프에서는 피오트르 소하의 방한을 기념해 북토크가 열렸다. 이번 북토크는 작가가 지식 정보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커리어를 시작해 3권의 그림책 『꿀벌』, 『나무』, 『더러워』를 펴낸 여정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다.
폴란드의 '가장 아름다운 책 상', 독일 '최고의 어린이 논픽션 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한 그의 첫 번째 책 『꿀벌』은 양봉업을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운명처럼 만난 주제다. 부모님께 헌정하기 위해 그린 『꿀벌』을 시작으로 그는 후속작 『나무』를 펴냈다. 지난 10월 31일에는 위생에 관한 세계사를 담은 『더러워』도 국내에 출간됐다. 이번 북토크는 피오트르 소하의 전작인 『꿀벌』, 『나무』를 번역한 이지원 번역가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즐긴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벌 : 벌이 없으면 커피도 와인도 없다
그는 한 권의 책을 2년 넘는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드는 작가다. 풍부한 자료 수집, 꼼꼼한 연필 스케치,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이 조화로운 그의 작품들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완성된다. 특히, 『꿀벌』은 매체 일러스트였던 그의 정체성을 그림책 작가로 바꾸어 놓은 첫 번째 작업이었다.
"신문과 책은 전혀 다른 영역의 작업이었습니다. 신문에 실리는 그림은 시선을 잡아 끄는 포인트가 중요했다면, 책은 스토리가 중요했죠. 특히, 그림만 보아도 이 페이지의 텍스트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는 명확한 이미지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지식 그림책은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이 어렵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식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은 독자뿐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림 한 장을 그리기 위해 꿀벌에 대한 자료를 모으면서 지구와 생태계에 대해 새로 깨달은 사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나 자신을 위해 그림책을 만든다"고 말하는 이유다.
"작은 곤충이 없으면 인간은 맛있는 음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과일도, 채소도 얻을 수 없죠. 저는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데요. 꿀벌이 없으면 커피도 없을 거예요. 커피 나무에 피는 꽃도 벌이 수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꿀벌이 없으면 포도도 없고, 그러면 와인도 없겠죠. 꿀벌이 없으면 면 소재의 옷도 더 이상 입지 못할 겁니다. 이 책을 작업한 뒤로 저는 곤충을 죽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 폴란드에서는 벌을 훔쳐 가는 사람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질 정도로 엄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과학과 문명이 지금처럼 발달하기 이전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벌의 존재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피오트르 소하는 묵직한 물음을 던졌다.
나무 : 인간이 가장 많이 사용한 재료
피오트르 소하의 두 번째 책은 '나무'에 관한 것이다. 20여 년 전, 그는 캘리포니아에 가서 세콰이어 나무를 보고 굉장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세콰이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를 보고 받은 감동은 두 번째 책을 작업하는 원동력이 됐다.
"폴란드에서 자라지 않는 다양한 나무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세콰이어 나무가 저에게 엄청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죠. 금을 채굴하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모였던 골드러시 시절, 96%의 세콰이어 나무가 잘라서 버려졌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나무는 전체 세콰이어 나무의 30%에 지나지 않죠. 이 책은 『꿀벌』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세콰이어 나무에 감탄했던 그는 수많은 나무들이 상상보다 훨씬 크게 자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어린이 독자들도 나무를 보며 자신이 느낀 종류의 경이로움과 신기함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어떻게 페이지를 구심할지 고심했다고 한다. 지구상의 다양한 건축물과 나무가 어우러진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들' 그림이 탄생한 이유다.
"나무의 크기를 직관적으로 알려주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비교해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의 빅 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은 이 생각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죠.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피라미드도 있고, 우리 할머니가 살았던 시골집도 있고, 인간도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 수 있죠. 그저 나무만 그려서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없었을 겁니다."
과연 나무도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피오트르 소하가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보는 단골 질문이다. 정답은 "그렇다"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무가 아니라 씨가 여행을 한다. 나무의 씨앗은 새, 박쥐, 원숭이, 거북이와 같은 동물들이 먹고 움직여 배설물로 배출한다. 인간은 이 나무를 이용해 비행기와 자전거, 배, 목마를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가장 많이 사용한 재료인 나무. 피하트르 소하는 이렇게 다양한 나무의 특성 덕분에 책 작업을 하는 동안 매우 행복했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6만 종이 넘는 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제가 알고 있는 나무는 아주 소수죠. 저는 이 책을 작업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지만, 그만큼 좋았습니다. 나무는 저를 매료시킨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도 좋은 주제를 찾아 그림을 그리는 게 매우 중요해요. 창의성만큼이나 성실함이 요구되는 직업이거든요."
위생 : 인간에 관한 매일매일의 역사
피오트르 소하가 선택한 세 번째 주제는 '위생의 역사'다. 『꿀벌』과 『나무』로 자연 생태계를 수없이 돌아봤으니, 이제 자연이 아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이러한 계기로 탄생한 『더러워』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편리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책이다.
"아름답지 않은 주제로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그냥 역사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역사'를 담고 있어요. 저는 이 책을 상수도를 만들고 발명한 사람들에게 헌정합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싸워 이긴 장군들의 이름은 기억하면서 이렇게 훌륭한 시설을 만든 기술사 분들의 이름은 모릅니다. 전쟁이 없다면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고, 화장실이 없다면 세상은 매우 살기 힘든 곳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피오트르 소하는 인류가 화장실을 가지지 못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세 시대의 농담 중에는 "숲에 있는 나뭇잎 중 무엇이 제일 깨끗할까?"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누구나 숲에서 볼일을 보고, 나뭇잎을 화장지처럼 사용했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은 더러운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씻지 않았기 때문이죠. 루이 14세 태양왕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3번 정도 목욕을 했어요. 그래서 인간은 향수를 쓰기 시작한 겁니다."
위생에 대한 잘못된 관념으로 씻지 않는 행위는 냄새뿐 아니라 질병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남겼다. 병원에서조차 기본적인 위생 수칙을 지키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세균 감염으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19세기 초에는 외과 의사도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위생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죠. 병원에는 사방에 이가 있었고, 살이 썩어서 악취가 났습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최대한 유머러스하게 그림을 그렸지만, 사실은 굉장히 무서운 장면이죠. 위생은 인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우물은 어디일까? 피오트르 소하는 어린이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대답할 수 없다면 집에 화장실이 있다는 증거다. 화장실이 없다면 마을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삶은 무척 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지구상의 20억 명은 여전히 자신의 화장실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 준다.
피오트르 소하는 마지막으로 3권의 책을 작업하며 얻은 통찰을 이야기하며 북토크를 마쳤다. 자신이 그린 책을 통해 독자들이 생태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전하며.
"저는 세 권의 책을 만들면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파멸로 가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었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생태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어요. 몇 년 전부터 세계의 주요한 아젠다는 기후위기가 되었죠. 저의 책이 독자들에게 자연과 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면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와의 Q&A
작업을 시작하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따로 있나요?
매일 커피를 마시면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조금 읽다가 바로 책상으로 가서 그림을 그리죠.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않아요. 그저 그릴 뿐입니다. 저는 책 작업을 하는 데 보통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매일의 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큰 프로젝트를 맡으면 드라마를 보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여행을 가는 일상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그럼에도 사람들이 서점에 가서 저의 책을 펼쳐봤을 때 내용이 풍부해서 꼭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충분한 작업 시간이 필요했죠.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일러스트레이터는 참을성이 많아야 합니다. 오래 앉아서 그려야 하고 똑같은 작업이 수없이 반복되기도 하죠. 그래서 자신을 매혹시킬 수 있는 주제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저는 새로운 책이 스스로에게 도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꿀벌』의 성공이 있었으니, 후속작은 『개미』를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새롭지 않기 때문에 저는 '나무'를 주제로 선택했죠.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3권의 책 모두 소중하지만 아무래도 첫 번째 책 『꿀벌』에 가장 마음이 갑니다. 저는 비관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당연히 안 되겠지'라고 생각하죠. 그럼에도 『꿀벌』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굉장히 좋은 주제이고, 잘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긴 작품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마치 철인 3종 경기처럼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사실과 상상의 균형을 맞추는 기준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먼저, 그림으로 표현할 정보 자체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어 『꿀벌』은 정말 신기한 존재예요. 자기 몸의 25배나 되는 무게를 지고 날아갈 수 있는 힘이 있죠. 티스푼 하나만큼의 꿀은 6~7마리의 벌이 평생동안 만든 겁니다. 1kg의 꿀을 만들기 위해서는 벌이 수백 만 번을 꽃에 왔다갔다해야 하고요. 이 사실을 알고 난 뒤로는 꿀을 푼 숟가락을 끝까지 빨아먹습니다(웃음).
나만의 그림체를 만들고, 특징있게 표현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나의 개성을 생각하는 일은 부자연스럽습니다. 개성은 생각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걸 그리세요. 그게 본인의 색깔을 찾아줄 겁니다. 저는 20여 년 전, 3D애니메이션 작업을 했습니다. 이 일을 계속했다면 지금쯤 부자가 되었겠지만 저는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게 훨씬 좋았죠. 나에게 무엇이 잘 맞는지는 직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길을 고르세요.
*피오트르 소하 바르샤바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했다. 오랫동안 폴란드에서 유명한 신문과 잡지에 일러스트와 만화 작업을 했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하다. 부모님이 양봉을 하셔서 이 책을 만들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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