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한가위
사람도 동물도 아닌 땅 그 자체가 주인공인 소설이 있습니다. 저 간결한 한마디로 독자를 단숨에 잡아채는 박경리의 『토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팔백여 명에 이르는 인물이 등장하는 대하 소설이지만 책을 펼쳐본 이라면 금방 알 수 있듯, 『토지』의 중심은 언제나 경남 하동의 평사리 땅입니다.
'문화유산'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우리 시대의 고전은 작가가 어린 시절 마주한 단 한 번의 강렬한 인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경남 출신의 외할머니가 그에게 들려주었던, '1902년 가을의 수확철에는 전국에 호열자(콜레라)가 돌아 누렇게 익은 벼를 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더라는 괴담 같은 옛이야기에서였죠. 어린 금이(박경리의 본명)는 그 풍경을 기억 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습니다. 너른 논에 무르익은 벼가 금빛으로 빼곡히 들어찼는데, 이를 거두는 이는 한 사람도 없는 섬뜩한 풍경이 마음을 울렁이게 했던 것입니다. 『토지』는 그렇게 작가의 머릿속에 처음 둥지를 틀었습니다.
악양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 그땅 서편인가? 골격이 굵은 지리산 한자락이 들어와 있었다.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이다. _2002년 나남판 『토지』 서문 중에서
섬진강 옆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토지, 그 곁에 선 지리산 고개마다 서려 있을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원고지를 채워가던 창작 비화에서 엿볼 수 있듯, 작가 박경리에게 '땅'이란 단순히 집을 짓고 사는 장소를 넘어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가꾸는 토대였습니다. 사람과 땅이 맺는 숙명적인 관계를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통찰력을 타고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이미 자신부터가 전국을 돌며 삶의 터전을 옮길 때마다 마음의 풍경이 달라지곤 하던 섬세한 성정이었던 탓이 컸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일평생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대작가이기에 그의 대외적인 삶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온통 슬픔이라더니"라는 한탄 섞인 한 마디가 절로 나올 정도로 고된 세월을 지내야 했던 그가 겪었을 슬픔과 기쁨에 대해서는 상상하기가 다소 어렵습니다. '국민 작가', '시대의 문호'라는 무거운 명성 아래 그의 심정을 짐작하는 일조차 조심스러운 탓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열렬했던 박경리의 독자이자 『토지』에 관한 글을 쓴 인연으로 30여년 간 작가와 교류한 김형국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는 『박경리 이야기』에서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인생 이면을 슬며시, 그러나 당사자에게 무례하지 않은 방식으로 들추어냅니다. 특히, 작가가 몸소 가꾸었던 집터를 일일이 조사하며 집필실이자 생활 공간이었던 그 장소들을 우리 앞에 생생히 불러내죠. 그런 저자의 애정 어린 추적기를 따라가는 일은, 어쩌면 평생 '땅과 사람'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작가를 보다 깊이 읽는 한 가지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서울 정릉 집의 '구멍 지기'
박금이가 필명인 '박경리'로서 살아가기 시작할 무렵, 그가 새롭게 집터를 잡은 곳은 바로 서울 정릉이었습니다. 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세 식구가 살기에는 모자람 없는 단란한 국민 주택이었지만 『박경리 이야기』에서 딸 김영주가 회고하는 정릉 시절을 들어보면, 어찌된 일인지 그 작은 집은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쓰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고 또 돈도 좀 생기고 편하다 싶으면 언제나 안절부절하셨다. 그리고 종내는 별나게도 멀쩡한 집 때려 부수기 공사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건축 일을 아는 사람을 데리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라곤 지어본 적도 없는 막일하는 사람을 데리고 이 벽 헐고 저 벽 헐고 집이 흔들흔들 몸살 앓기를 그 몇 차례였던지."
생각이 막히고, 앞날이 깜깜할 때마다 작가가 펜 대신 집어 드는 것은 망치였습니다. 공간을 어떻게 짜겠다는 청사진도 전혀 없이 일단 벽부터 허무는 마구잡이식 공사였죠. 그 '막일'은 이제 전업이 되어버린 글쓰기에 때때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막상 마감한 뒤 딸에게 "나 원고 끝나면 뭐 할까"라고 묻던, 작가로서의 불안을 떨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박경리가 애꿎은 집을 부수어가며 답답함을 풀고자 했던 것은 비단 창작의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는 작가로서 연재 요청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호시절이기도 했지만, 사인(私人) 박금이에게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으로부터 숨어들고자 애쓴 유배 시절이기도 했던 탓입니다.
사위로 맞아들인 저항 시인 김지하가 박정희 시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투옥된 뒤, 하나뿐인 딸이 옥바라지에 지쳐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 박경리의 마음은 덩달아 황폐해졌습니다. 정권의 삼엄한 감시와 '팔자 억센 모녀'라는 세간의 이죽거림은 그들을 더욱 괴롭게 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을 향해 문턱을 낮출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아슬아슬해 보인다"는 걱정을 들을 정도로 기자든 문학계 인사든 외부인에게는 조금도 곁을 허락하지 않고, 집필실로 삼은 정릉 집에 틀어박혀 원고지에 쓸 다음 문장만을 고민했습니다. 어머니 김용수 여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멍 지기'나 다름없는 삶을 살던 집 귀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릉 집에 숨어든 시절 연재를 시작한 『토지』의 초반부는 마치 황량한 공사판 같던 작가의 마음을 비추는 듯 땅과 사람에 얽힌 서러운 이야기를 토해냅니다. 평사리 너른 들에 발붙이고 살던 이들이 일제 강점기라는 격변기에 휩쓸리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 머나먼 만주 용정 땅에서 타향살이를 해나가는 모습에 많은 독자들이 함께 가슴을 쳤습니다. 선함과 악함이 뒤섞인 온갖 인간 군상이 서로 뒤엉키며 살아가는 이 아수라장에서 작가가 포착해낸 정서는 단연 '포한'(한을 품음)이었습니다.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아 신세에, 천하게 태어나 평생 떠돌이로 살아야 하는 처지에 저마다의 가슴속 움튼 슬픔을 작가는 절묘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평사리 주민들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낼 길은 작가도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습관처럼 찾아오는 불행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쫓기듯 글을 썼지만, 묵은 감정을 어떻게 문학으로 분출하며 소설을 마무리 지을 것인지는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토지』 4부를 써내려가던 원고지를 미완의 상태로 잠시 밀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주 단구동 시대의 주변 껴안기
고심하던 작가의 시선을 돌려놓은 것은 또 다른 '토지'였습니다. 1980년 초여름, 작가는 서울 정릉 집을 뒤로 하고 치악산 자락에 자리한 원주 단구동으로 넘어갑니다. 아무런 연고 없는 타지로 옮겨간 동기를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호사가들이 짐작한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은둔하기 위해서라든가 혹은 작가로서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서 떠난 이삿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김지하 시인이 출감하고 나서 원주에 정착한 딸 부부를 가까이에서 돕기 위한 이사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로서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자 단행했던 이때의 이주는 작가에게 뜻밖의 활로를 틔워줍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작가를 맞이한 것은 단구동 집 너른 뜰에 심긴 나무와 전 주인이 두고 떠난 고양이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듯한 이 낯선 것들에 작가는 차차 마음을 주었습니다. 펜을 잠시 내려놓고, 정릉에서 그랬던 것처럼 망치를 드는 대신 목장갑을 끼고 손에 흙을 묻혔습니다. 밭매기는 바깥 사람들과는 달리 단 한 번도 작가를 배신하지 않는 정직한 노동이었습니다. 그 자신의 말대로 "(자연이라는) 원금은 까먹지 말고 이자로만 살아야"함을 깨닫는 수행이기도 했죠. "글쓰기와 노동과 나는 삼발이" 같다던 당신의 새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고추밭에 물 주고 배추밭에 물 주고 고양이들 밥 말아 주는' 단조롭지만 꾸준한 일상이 이어지며 날이 서 있던 그의 신경줄도 차츰 느슨해졌습니다. 정릉 시절만 해도 외부인은 일절 집에 들이지 않던 그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젠 마음을 다친 후배 작가를 불러들여 곰국을 끓여 주고, 인생 조언을 청하는 독자에게는 밥상을 내주며 고민을 성심껏 들어주었습니다.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사계절 흐름을 닮아 마음가짐이 넉넉해지자, 엉켜 있던 작품 구상의 실타래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26년 동안 원고지 3만 매를 채울 때까지 작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토지』는 서희 일가가 빼앗겼던 평사리 땅을 되찾고, 조국 해방을 맞이하는 먹먹함으로 절정에 달하며 끝을 맺습니다. 여기에는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존재인 이상 온몸으로 수난을 견디며 사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지만, 이상향을 바라보며 올곧게 나아가려는 자세 역시 인생을 대하는 진실된 태도라는 단단한 현실 감각이 담겼습니다. '따뜻한 인간의 향기'를 닮은 흙내음을 맡아가며 작가는 그렇게 땅 때문에 울고 웃는 인간들의 이야기, 『토지』를 단구동의 앞뜰에서 일구어냈습니다.
수십 년을 함께한 모든 독자들이 벅차했을 『토지』의 완결을, 김형국 교수는 작가에게 선물했던 고급 만년필의 펜촉이 다 닳은 채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온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이 대목은 어쩐지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던 작가의 성정도 둥글어진 펜촉처럼 누그러져 누구든지 감싸안는 쉼터가 되었다는 말로도 읽힙니다. 20여 살이나 어린 젊은 연구자였던 저자를 처음 만난 그날 아낌없이 밥상을 베풀던 큰 어른은 그렇게 우리 세대를 껴안은 너른 품이 되었습니다. 매지리로 떠나가며 남긴 문인들을 위한 집 '토지문화관'도 만년에 맞이한 그러한 변화의 한 굽이로 볼 수 있겠습니다. 돌을 골라내며 몸소 키우신 무공해 채소들이 끼니마다 밥상에 오르는 그런 '하숙집'이었다고, 문화관을 거쳐간 수많은 문인들은 지금도 따스한 눈길로 이곳을 추억합니다.
'박경리로 살아간다는 기분으로 하루 24시간, 1년 반 가까이' 살던 저자가 『박경리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선생에게 바친 이름은 다름 아닌 '큰글'이었습니다. 작가로서도, 인격적으로도 일가를 이룬 대작가라는 뜻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인 셈입니다. '자자손손 파먹어도 파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학 유산'(박완서)을 남기고 떠난 국민 작가였지만, 만년에 다다른 그의 모습은 『토지』의 마지막 문장만큼이나 산뜻하고도 넉넉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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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나(나남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