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한 대학에서 인생 수업으로 불리는 강의가 있다. 바로 이화여자대학교 교양 강좌인 '여성과 예술'이다. 졸업하기 전에 반드시 들어야 하는 수업으로 꼽으며 재학생과 졸업생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바꾸어준 인생 수업."
이 인기 강좌 녹취하여 쉽게 풀어쓴 책이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대학의 교양 강좌 전체를 책으로 엮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우리에게 귀한 시간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10년 동안 이 강의를 맡아 발전시켜온 미술사학자 강은주 교수를 만났다.
첫 책을 출간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이 책은 제가 미술사학자로서 출간하는 첫 대중 교양서에요. 지난 10년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과 예술'이라는 교양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과 소통하는 일도 즐거웠지만, 미술에 관한 젠더 논의를 강의실 밖으로 끌고 나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수업 내용을 대중과 공유한다면 미술사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균형 잡힌 시각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요. 저의 이 같은 생각을 알아보고 미술사학과 석사 과정 동기인 이봄출판사 고미영 대표가 적극적으로 제안하며 책의 출간이 이루어졌지요. 완성된 책을 보니 새로운 관점의 미술사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어떨지 매우 기대되고 궁금하네요.
교수님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강의평가가 뜨겁더라고요. 어떻게 느끼세요?
이 강의를 제가 10년 동안 이끌어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학생들의 힘이 컸어요. 매 학기말 학생들이 올려주는 든든한 응원의 강의평이 동력이 되었지요. 덕분에 올해 초에는 우수 강의 표창도 받았고요. 수강생들에게 '인생 수업'이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부끄럽기도 하고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해요. 학생들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도움을 받는 수업이길 바라지요.
수업 중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들려주세요.
학기말에 한 학생이 자신이 평소 '구스타브 클림트'를 너무나 좋아했는데, 이 강의를 듣고 미워졌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어요. <키스>나 <유딧>과 같은 작품에 대한 페미니즘 관점의 해석을 듣고 새롭게 보게 된 거지요. 하지만 미술가를 미워할 필요까지는 없어요.(웃음) 클림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당대 사회가 가진 불평등한 젠더 의식이 결국 미술가와 작품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봐야 해요. 어떠한 경우에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은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영감을 준 학자나 작가와 작품이 있다면 누구이며 어떤 책인가요?
이 책의 내용에서 저의 독자적인 견해는 일부에 불과해요. 그리젤다 폴록, 린다 노클린, 캐럴 던컨, 휘트니 채드윅과 같은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의 영향을 받았지요. 그중에서도 단연 미국의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인 린다 노클린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어요. 노클린이 1971년에 쓴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았는가?』라는 에세이를 통해 페미니즘 미술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 저를 비롯한 많은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이 노클린의 글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왔지요. 그녀가 쓴 19세기 '타락한 여성상'에 관한 논문과 인상주의 여성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에 관한 논문도 이 책에 영향을 준 자료들입니다.
미술사학계에서 페미니즘 관점의 연구는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 중인가요?
미술사학계에서 페미니즘 관점의 연구가 시작된 지도 50년이 흘렀어요. 성과도 있었고 아쉬운 부분도 있지요. 페미니즘 미술사 연구는 197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어 1980년대 지나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죠.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중반 민중 미술의 흐름 속에서 페미니스트 미술에 관한 창작과 연구가 시작되어, 1990년대 제 은사님이신 오진경 교수님을 비롯한 김홍희, 윤난지, 김현주 등의 여성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어요. 최근에는 이러한 흐름이 다소 동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는 해요.
과거에 비해 미술계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난 것이 사실이고, 젠더 평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어느 정도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전통적인 남녀의 성역할이 강요되고 기회의 불평등이 잔존하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관점의 연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1980년대 이후로 페미니즘 관점의 연구는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 장애, 경제적 수준,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어요. 단순히 젠더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다 넓게 다양성을 인정하고 평등한 사회 구조를 갖춰나가는데 필요한 연구가 아닌가 싶어요.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미술가는 누구이며, 이유가 무엇인가요?
수업 중에도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제 답은 항상 같아요. 좋아하는 여성 미술가는 특별히 없고, 모든 여성 미술가들을 그 존재 자체로 존경한다고 말하지요. 특정 작가를 선정하지 않는 이유는 학생들에게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함이고, 또 성적으로 불평등한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 미술가로 살아남아 활동했다는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치열하고 투쟁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의미하기에 그 자체로 존경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동시대 한국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동지애를 느끼기도 해요. 이 책을 준비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망설임 없이 페미니스트 미술가임을 자처하며 역할을 다해온 윤석남 작가님께 특별한 존경을 느꼈고, 최근 '다정한 자매들'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수경 작가에게서 많은 영감과 동력을 얻기도 했지요. 이들 한국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출간될 2권에서 다룰 예정이에요.
이 책이 누구에게 어떻게 읽히면 좋겠다, 바라는 점이 있으세요?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해요. 페미니즘 관점의 미술사라고 하면 주로 여성 독자를 염두하고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사실 저는 여성 독자뿐만 아니라 남성 독자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접하길 바라거든요. 왜 우리가 젠더 평등에 관심을 가지고 더 논의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도 이 책을 혼자 읽지 말고 남자친구나 주변의 남성 지인들과 함께 읽어 달라고 당부하고 있지요.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요.(웃음)
*강은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으로 학사를, 같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청주공예비엔날레 전시팀장, 경기문화재단 학예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일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다. 지금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재학생과 졸업생의 인생 수업으로 불리는 교양 수업 <여성과 예술>을 비롯해 성신여자대학교와 한양대학교,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며, 페미니즘 미술사 및 현대 미술과 대중문화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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