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지구에서 나타난 이후로 끊임없이 진화했다. 축축한 이끼식물에서 화려한 꽃을 피워내는 속씨식물까지... 차례로 새로운 형태를 출현시키며 길고 긴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 『극한 식물의 세계』는 그 진화의 여정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선한, 가장 충격적인,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을 한 컷 한 컷 보여주고 들려주는 '자연사 도슨트'다. 환경은 종의 진화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곳에서까지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싶은 극한의 환경에서도 버티며 살아가는 식물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이 책에서는 '극한 식물'이라고 부른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 중에서 식물만큼 열정적이며 획기적인 존재는 없을 것이다.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우리의 세상은 분명 이전과는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극한 식물'이란 어떤 식물을 의미하나요? 요즘 인기 많은 반려식물이나 정원식물이 아닌 극한 식물에 관해 책을 쓰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극한'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한 식물'이란 오늘날 지구에서 한계에 도달해 살아가고 있는 식물들을 일컫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키가 크다거나, 가장 작은 꽃을 피운다거나, 가장 오래 살고 있다거나, 가장 무거운 열매를 맺는다거나 등 지구상의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식물들을 말하죠. 저는 식물이 지구에 처음 등장한 후 오늘날까지 어떤 과정으로 진화해왔는지, 그리고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식물의 놀라운 세계를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말없이 위안을 건네는 초록의 식물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말이죠.
『극한 식물의 세계』에 나오는 식물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제 고정 관념을 깨는 경우가 많았어요. 집필하면서 선생님께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신 식물이 있나요?
이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오히아 레후아'라는 식물이 인상 깊었습니다. 흔히 화산 활동이 일어난 후면 온통 잿더미로 변한 황폐해진 상태가 떠오르는데, 이것은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그리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식물에게는 오히려 땅속에 있던 풍부한 미네랄과 영양소가 밖으로 분출되어 토양이 비옥해지고 생태계가 풍요로워지는 기회죠.
하지만, 이것도 화산 활동이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어야 가능한 풍요로움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직 뜨겁고 유독 가스가 나오는 상황이라면, 그 땅이 비옥하더라도 식물이 잘 살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히아 레후아'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형태를 가지며 화산섬에 적응한 식물이었습니다. 또, 유독 가스를 감지해 스스로 기공을 닫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니 오랫동안 식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저에게도 대단한 식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식물을 연구하는 관점에서 이 책에 나온 식물들 중 '최고의 극한 식물'을 하나만 꼽는다면요?
지구상에 가장 오래 살아오고 있는 식물인 '브리슬콘 소나무'가 저에게는 최고의 극한 식물입니다. 브리슬콘 소나무는 어떻게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나무가 기원전 2832년에 싹이 터서 이집트 피라미드의 건설과 단군의 고조선 건국, 트로이 전쟁과 로마 제국의 건국 및 석가모니와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의 탄생과 죽음을 동시대에 겪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기만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브리슬콘 소나무의 나이테에 새겨져 있는 기록입니다. 약 5천 년의 기후는 물론이고, 병해충이 창궐하던 시기, 산불이 일어난 시기 등에 대한 기록이 나이테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죠. 한 해도 빠짐없이요. 그래서 브리슬콘 소나무는 많은 학자에게 연구의 대상이자, 지구의 위대한 거주자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에 볼 수 있는 '극한 식물' 중에서 독자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으신 식물이 있나요?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식물도 여럿 등장합니다. 지독한 냄새의 '앉은부채',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 가장 키가 작은 '암매', 가장 작은 크기의 '남개구리밥', 가장 큰 잎을 가진 '가시연꽃', 가장 빠르게 자라는 '죽순대',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뽕나무', 치명적인 독을 가진 '피마자', 날카로운 열매를 가진 '남가새', 독한 털을 가진 '쐐기풀', 바다로 돌아간 '거머리말', 오래 사는 '향나무' 등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극한 식물은 살아가고 있죠.
이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대나무인 '죽순대'는 음식으로 쉽게 접할 수도 있지만, 담양에 가면 수많은 죽순대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옥한 토양에서는 하루에 91cm까지도 자라기 때문에, 죽순이 올라오는 5월의 담양 대나무 숲에서는 죽순대가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만히 보면 자라는 것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님 같은 자연사 박물관의 식물 학예사가 하는 일이 궁금합니다. 현장에서 극한 식물을 볼 기회도 있나요?
자연사 박물관은 자연의 역사를 전시하는 곳입니다.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 생태계, 지질, 천문, 화석 등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오늘날까지의 자연이 이루어진 증거와 기록이 담겨 있는 곳이죠. 저는 이곳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자연사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식물을 채집해서 표본으로 만들어 수장 또는 전시 및 교육에 활용하죠. 또, 우리나라의 멸종 위기 식물을 조사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멸종 위기 식물은 극한 환경에서 멸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라산 꼭대기의 절벽 바위틈에서만 살아가고 있는 '암매'도 그중 하나죠. 몇 년마다 재조사를 하러 갈 때마다 힘겹지만 꿋꿋하게 살아 있어 주는 암매를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제가 다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거나 연구가 부족한 식물이 지구에 많겠죠? 식물 연구를 위해 가보고 싶은 장소나 자세히 관찰해보고 싶은 식물이 있나요?
극한의 장소에는 아직 세상에 보고되지 않은 식물이 많이 있습니다. 접근이 쉽지 않은 열대 우림의 깊은 정글이 대표적이죠.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의 식물 조사에 참여해 머물렀던 열대 우림의 숲속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북한의 땅입니다. 우리나라 식물은 백두산에서 시작되는 산줄기인 백두 대간을 따라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자라는 식물만으로는 한반도의 식물을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죠. 그나마 1990년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백두산 절반의 땅은 밟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이마저도 우리나라 북방계 식물의 일부만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첫 식물 목록은 1937년에 나온 『조선식물향명집』입니다. 이 목록에 들어있는 식물들은 우리나라가 분단되기 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한과 북한의 식물이 모두 기록되어 있죠. 그 후 남한에서는 새로이 발견되는 식물의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북한 식물에 대한 정보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기에 언젠가는 북한의 땅에 있는 식물을 조사해 『조선식물향명집』 개정판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흔히 멸종 위기종을 이야기할 때, 식물보다 동물을 더 많이 언급하곤 합니다. 과연 지구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존재는 동물일까요, 식물일까요? 식물의 멸종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동물은 식물이 만들어놓은 기반 위에서 다양화된 생물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연의 생태계에서도 식물이 지구의 생산자가 되며, 이것을 먹고 1차 소비자인 동물이 살게 되고, 그 후 2차와 3차 소비자인 동물이 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생산자 > 1차> 2차 > 3차 소비자' 순으로 생물의 종류와 수가 많아야 생태계의 평형이 유지되는데, 이것을 '생태계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하지만 서식지 파괴, 환경 오염, 기후 변화 등과 같은 이유로 인해 식물의 종류와 수가 줄어들게 되면 생태계의 평형도 깨지고, 동물들도 피해를 입게 되죠. 그리고 그 피해는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인간에게도 닥치게 됩니다. 만약, 지구에 큰 재앙이 닥쳐 많은 생물이 멸종하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생물이 무엇이든 간에 식물이 없는 지구에서의 생태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생산자 없이는 소비자도 없는 것이니까요.
*김진옥 이화여자대학교 생물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식물분류학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 학예원구원, 성신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했으며, 현재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식물 분야 전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허준박물관, 약령시 한의학박물관, 한독의약박물관, 한국숲해설가협회 등에서 식물 수업을 진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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