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 동료였던 김 과장님은 종종 다섯 살 난 딸의 사진을 팀원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날은 남편이 일찍 일을 마쳤는지 과장님의 딸을 데리고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고, 나는 사무실 안쪽 자리에서 차례로 인사를 해오는 과장님과 딸을 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핼러윈의 아이들처럼 어른들의 칭찬을 한 움큼씩 담으며 다가올수록, 나는 해야 할 말을 부랴부랴 고르고 있었다. "따님이 참 예쁘네요"나 "따님이 과장님 많이 닮았네요, 아이고야" 정도가 나으려나? 적당한 멘트를 고민하다가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끝내 화장실 가는 척 자리를 피했다. '미안해 내가 마음에 없는 말을 잘 못해'
나는 아이가 귀엽지 않다. 거기에 귀엽지 않은 대상을 귀엽다고 말해야 하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타인의 아이 사진이 띄어져 있는 휴대폰을 받으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아, 많이 컸구나!" 정도로 얼버무린다. 아이가 셋이나 되는 사촌동생을 할머니 팔순 잔치에서 만났을 때, 조카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 했을뿐더러, 살갑게 대해주지 않는 내게 사촌동생은 섭섭하다고 했다. 여전히 나는 조카들의 얼굴이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랬던 건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단지 아이가 귀엽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아이는 '덜 큰 사람'일 뿐이니까. 대신 나는 동물을 보편적인 사람보다 더 귀엽게 여긴다. 때문에 개나 고양이는 물론, 개미핧기나 오리너구리 같은 오지의 동물이나 비둘기나 쥐 같이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동물도 귀엽다. 덜 큰 사람에게 부족한 '귀여워함'을 이 행성의 온갖 포유류와 조류에게 쏟고 있으니 에너지 보존 법칙이 성립되긴 하나보다.
친구는 그랬다. 너 같은 애들이 자기 아이 생기면 더 유난이라고. 글쎄, 직관적으로 내 아이라고 고양이보다 더 귀여울 것 같진 않다. 아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이 없이 살기로 결정한 이유를 말하라면 적어도 나는 아이가 별로 안 귀엽기 때문이다. 대신 유기묘, 유기견을 입양하거나 보살피며 살기로 했다.
하지만 가끔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동력을 이해하고 싶었다. 본인이 살면서 감내해야 했던 어떤 일보다 가장 큰 양보와 고단함을 필요로 하는 일. 내가 기준 삼고 있는 '귀여움'이란 가치는 그 동력으로 설명하기에 가볍다. 그러다 문득 안 먹는 사과를 자꾸 깎아준다고 짜증 냈을 때, 우리 엄마가 곧잘 했던 "너도 자식 낳아봐라 이놈 새끼야"라는 말에 정답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답이 궁금해 아이를 갖기로 결정할 수는 없다.
지난봄 새로 이사한 집에서 친구들을 초대해 한 동안 집들이를 했다. 그중 대여섯 살 정도 되는 남매를 데리고 온 부부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 아이들이 있는 모습이 생경했다. 낯을 가리며 처음에는 엄마 뒤에서 쭈뼛거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소파 위를 뛰어다니며 어린 생명체가 가진 특유의 생기를 뿜어냈다. 우리 집 소파가 마음에 들었는지, 유독 그 위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을 친구 부부는 말렸지만 우리는 괜찮다고 했다. 그러라고 있는 소파였겠거니 한다.
좋아할지 고민하며 마트 키즈 코너에서 고른 간식을 내어주곤 유튜브를 틀어주었더니, 소파에서 내려와 간식을 연신 와작 거리며 화면에 나온 핑크퐁 상어에 빠져들었다. 과자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입을 삐죽거리며 티브이를 보는 아이들을, 친구 부부와 맥주잔을 기울이며 보고 있으니 마음속 어딘가에서 뿌듯함이 올라온다. 내가 마련한 장소에서 안전하고 즐겁게 보내는 아이들의 만족감이 나에게 주는 성취감 같았다. 좀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을지 고민했으나 부부 둘이 사는 집에서는 거기까지였다.
아이들이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청소기로 돌리며 '어쩌면 이걸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내 보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대상에게 가능한 모든 호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 내가 마련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반대급부로 내게 오는 만족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때의 엄마는 툴툴대는 서른의 아들에게 계속해서 사과를 주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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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산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게 인생이라던데 슬픔도 유쾌하게 쓰고 싶습니다. kysan@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