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 <썸머 필름을 타고!>를 보았다. 청량한 영화였지만 무더운 날이어서 관람 전후로 계속 시원한 실내를 찾아다녔다. 영화와 어울리는 멜론 소다도 마시고 비엔나 커피도 마셨다. 열을 좀 식히자, 모리는 함께 사는 고양이 '롤랑'에 대해 얘기했다. 작년에 롤랑이를 입양한 후 모리의 삶은 많은 게 달라진 것 같았다. 모리는 나에게도 고양이 입양을 권했다. 나는 어느새 모리 너머의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그 고양이는 우리 집 거실에서 배를 드러내놓고 누워 있었다.
단톡방이 하나 있다. 전 직장 동료인 '이지', '노아'와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곳. 이지는 고양이(별바람 사랑해!)와 함께 살고 노아는 강아지 입양을 계획 중이다. 동물에 관한 이야기나 사진이 계속 올라온다는 얘기다. 나도 고양이 입양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지가 어떤 사진을 보내줬다. 이지네 시골집에 어느 날 눌러앉은 고양이 '누룽지'의 사진. 보자마자 알았다. 이게 묘연이구나.
이미 마음속에서 나는 누룽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고양이 입양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유튜브에서 <미야옹철의 냥냥펀치>를 구독하고 초보 집사를 위한 여러 가지 영상도 봤다. 회사에서 일하며 만난 사람들에게도 괜히 고양이 입양을 고려 중이라고 떠들었다. 다들 이런저런 조언도 해 주고 마음을 써 주었다.
그렇게 SNS로 고양이 영상을 보던 어느 날, 화면 하단에 잠시 뜬 애플 광고를 보게 되었다. 왜 갑자기 거기에 눈이 갔을까? 나도 모르게 애플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있었다. 그래, 나 작년부터 아이맥 사고 싶었지. 여러 가지 컬러로 작년에 출시된 24인치 아이맥 m1. 그래, 집에 TV도 없고 팟캐스트나 영상 편집도 할 거고... 어느새 22개월 무이자 할부 결제를 누르고 있었다. 여섯 자리 숫자만 누르면 끝난다.
세상이 이 정도로 빠르고 간단해도 되나? 그 큰 물건이 다음날 오후에 바로 배송되어 왔다. 돌아보고 후회하고 그럴 시간도 없다. 이미 다 저질러져서 선택을 정당화할 일만 남는다. 큰 화면으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니 왠지 더 재미있는 것 같았다. 괜히 그날 저녁 팟캐스트 녹음도 했다. 노트북으로 녹음할 때보다 소리가 더 깨끗한 것 같았다.
다음날 회사에서 아이맥을 지른 사실을 고했다. 동료인 '융'과 '단호박'은 나를 지하 스튜디오에 가두고 질문 폭격을 시작했다. 고양이를 입양한다면서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저축은 하고 있는지, 저수지 목돈은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하마터면 울 뻔했다. 나의 재정 상태는 폐허와 같다는 판정을 받았고, 주문처럼 외워야 할 말들이 내려졌다.
저축이 곧 소비다, 저축에 돈을 쓴다, 돈 모으는 것은 즐겁다, 누룽지를 데려오려면 저수지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확실한 동기 부여가 생겼으니 이제부터 정말 달라질 것이라 다짐하며 절약 라이프를 시작했다. 누룽지와 함께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며칠 뒤, 이지에게 연락이 왔다. 이지의 아버지가 '룽지'와 이미 사랑에 푹 빠져서 다른 데 보내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하셨단다.
아... 룽지야... 우리의 묘연은 여기까지인가보다.
그래도 새로운 묘연을 기다리며 나의 절약, 저축 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삶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어쨌든 저수지는 필요한 것이니까. 그리고 다른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서라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니까. 나 자신도 좀 책임질 필요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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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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