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구에 인류의 존재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에는 저의 사적인 고통에서 시작된 생각입니다. 하지만 보다 큰 차원에서도 저의 의견이 옳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지구인은 서로에게 해를 끼치고 이 행성에도 해를 끼칩니다. 저는 저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 힘이 주어진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힘을 사용하여 보다 빠른 인류멸망을 이루고자 합니다.”
박서련 작가님의 소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에서 읽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황정은입니다. 오늘 제가 읽은 대목은 시간의 마법소녀인 이미래가 인류 전체를 향해 보낸 경고입니다. 끔찍한 폭력에 노출되어서 가장 약해진 순간에 자신의 마력을 깨달은 소녀 이미래는 자기가 가진 큰 힘을 인류를 멸절시키는 데 쓰기로 합니다. 마법이라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의 세계가 겪는 문젯거리들은 소설 밖에서 현실의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젯거리들이기도 합니다. 이미래만큼 큰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마법소녀들처럼 마력을 가진 것도 아닌 우리는 이 문제들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박서련 작가의 마법소녀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요. 오늘은 이 대화를 해보려고 합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인터뷰 – 박서련 소설가 편>
오늘은 “세계를 구하는 건 소녀들의 숙명”이라고 말하는 소설가를 모셨습니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를 쓴 박서련 작가님입니다.
황정은 : ‘작가 노트’에서 <세일러문>을 언급하셨습니다. <세일러문>은 세일러문의 작가 다케우치 나오코가 평소 즐기던 문화적 요소들로 만들었으니 재미없을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했어요. 재미없을 수가 없다.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시작부터 들려주시면 좋겠어요. 어떻게 구상하게 된 소설인가요?
박서련 : 이 또한 ‘작가 노트’에 썼던 건데요. 요술봉이라든지 마법의 콤팩트라든지 그런 것들이 공항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을까, 라는 궁금증에서 ‘이런 소설이 있어도 재밌겠다’ 그런 식으로 잠깐 갈무리해뒀던 아이디어가 발전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조금 더 정확히는 웹진 <문학 3>에서 소설 연재를 해달라는 제안을 주시고 몇 개월 정도 여유를 주셨는데, 그동안 소설 소재도 생각해 두고 미리 원고도 조금 써두길 바라는 의미에서 주신 시간일 텐데, 그동안에 했던 생각이 그거였어요. ‘요술봉’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썼으면 좋겠고 한 3부로 나눠서 ‘요’ 편과 ‘술’ 편과 ‘봉’ 편으로 쓰면 되겠지 라고 생각을 했었고요. 그 기획은 거의 날아갔고 결국은 ‘그냥 마법 소녀 이야기를 써야겠다’ 정도만 남은 셈인데,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황정은 : <세일러문>에 대한 엄청난 애정도 고백을 하셨는데요. 앞선 작품들의 은혜와 영향력을 언급하셨는데 역시 <세일러문>의 영향이 있었던 거죠?
박서련 : 네, 아무래도... 저는 89년생인데, 저를 전후한 나이대를 약간 포섭하는 말로 후기 밀레니얼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저도 ‘작가 노트’에서 그 단어를 택했는데, 이 세대 안에서 <세일러문> 주제가를 모르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모른다면 그야말로 간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일러문>을 막 좋아한다고 하지 않더라도 <세일러문>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당연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고 오히려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 중 하나고요.
황정은 : 어떤 영향을 받으셨어요, 작가님은?
박서련 : 뭔가 비주얼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웃음) 제가 좋아하는 물건이나 나중에 제가 좋아하게 될 많은 것에 영향을 <세일러문>에서 얻은 것 같아요.
황정은 : ‘작가 노트’에서 후기 밀레니얼 세대로서의 사회문화적 경험을 언급하셨습니다. 작가님 세대와 다음 세대는 정치적이지 않기가 어려운 입장이다, 라고도 쓰셨는데요. 소설의 설정이나 인물을 만들 때 MZ 세대로서는 어떤 경험이 반영이 되었을까요?
박서련 : 이 질문이 저한테는 의외로 되게 무겁게 들리는데, 왜냐하면 저는 주인공한테 아무 특징도 부여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었는데 그럼에도 스물아홉 살 때의 제가 굉장히 많이 반영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스물아홉 살 때 저는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때 당시에 대학을 그만둔 상태였고, 생활력이 하나도 없고 제 손으로 벌고 있는 돈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고, 친구네 집에 얹혀살고 있었고, 글을 쓰고 싶지만 뭘 써야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 왜냐하면 내가 글을 쓰는 걸 누가 바라기나 할까, 내가 쓰면 읽어주기나 할까, 같은 생각이 굉장히 강하게 있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쓰고 싶지 않았고. 그런데 또 글 쓰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스물아홉 살 때의 저는 친구들을 만나서 놀고 떠들고 웃을 때가 아니고서는 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거든요. 사람도 아닌 것처럼.
그래서 스물아홉 살의 제가 주인공이 느끼는 굉장히 자존감이 낮은 상태하고 매우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때까지 제가 했던 직장생활이라는 것도 1년을 넘긴 적이 별로 없었고, 여러 가지 일을 했었지만 1년 넘게 한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한테 위로가 됐었던 건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길게 일하지 않고 길게 연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어요. 나만 이렇게 끈기가 없게 살고 있는 건 아니구나, 아마도 다들 힘드니까 끈기를 갖기 힘든 거겠지, 정도의 생각을 했던 것 같고요. 나 스스로를 굉장히 하찮게 여기면서도 ‘나만 이런 게 아니다’라고 여겼다는 것은 ‘남들도 나만큼 하찮다’라고 생각했다는 말도 될 수 있는데, 그럼 ‘이 세대가 다 그렇다’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으로 쓴 것 같아요.
황정은 : 작가님의 (소설에서) 마법소녀들은 상상의 존재와 싸우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재난과 사고 그리고 사건에 투입되는 노동자들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에게 소속이 있고 그것이 또 조합의 형태라는 점이 많이 반가웠는데요. ‘전국 마법소녀 협동조합’이라는 조직이 등장을 하잖아요. 줄여서 ‘전마협’은 어쩌다 만드신 건가요.
박서련 : 18대 대통령 탄핵 집회가 있었을 때 ‘장수풍뎅이 연구회’라는 깃발이 등장을 한 적이 있었잖아요. 저도 그런 깃발을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품었었어요. 그때 제가 손수건 크기만 한 깃발을 만들어서 ‘전국 마법소녀 협동조합’이라고 썼어요. 그리고 <카드캡터 체리>의 요술봉의 망치 모양과 <세일러문> 문스틱의 낫 모양을 크로스 시키고. 그 해에 그 깃발을 들고 다녔었어요. 물론 너무 부끄러워 가지고 조금 들고 다니다가 다시 가방에서 접어 넣고 ‘언젠가는 세상에 보여줄 거야’라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웃음)
황정은 : 조합원들이 있었을까요, 혹시?
박서련 : 아뇨, 저밖에 없었습니다. 혼자라서 너무 부끄러웠던 것인데. ‘그런 이름을 상상한 적이 있었지’라고 생각하면서 (소설에) 자연스럽게 그냥 넣었었던 것 같아요.
황정은 : 주인공의 행운의 상징이 ‘777번 번호표’였잖아요. 아로아를 만나서 자기 정체성을 전해들은 주인공은 이 행운의 상징이 있던 자리에 아로아의 명함을 붙입니다. 무작위의 행운을 걸어두었던 희망의 자리에 타인의 이름 그리고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걸어둔다는 점이 저는 의미심장하게 읽혔거든요. 이 장면을 쓸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박서련 : 저는 일단 그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무작위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그냥 숫자를 걸어두었던 자리에 타인의 이름을 대신 붙여둔다는, 그리고 그것을 희망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보아주신 그 독해가 저는 너무 좋았어요.
황정은 : 그렇게 쓰셨어요.
박서련 : 그런가요? (웃음)
황정은 : 그렇게 쓰셔서 제가 너무 좋았습니다.
박서련 : 저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라도 그럴 것 같아서. 아까 주인공의 낮은 자존감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저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을 했었는데요. 저 같아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희망의 자취 같은 걸 보았을 때 그리고 그 사람이 남기고 간 어떤 힌트가 있을 때 그걸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계속해서 보고 싶지 않을까, 하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어요.
황정은 : ‘전국 마법소녀 협동조합’은 기후위기라는 재앙을 막기 위한 작전을 세우는데요. 마법 소녀들한테 주어진 가장 큰 과제가 기후 재앙인 셈이잖아요. 이것은 환상이 아니고 소설 바깥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둘의 만남이 무척 흥미롭고 또 기발하게 느껴졌는데요. 어떻게 이런 조합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박서련 : 일단은 마법 소녀라는 설정 말고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그냥 우리의 현실 세계로 느껴지길 바랐어요.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숙제, 문제, 위기 이런 것들은 당연히 기후재난을 얘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요.
황정은 : 작가님이 생각하는 현실의 가장 큰 문제가 기후로군요.
박서련 : 네, 아무래도. 물론 단기적으로는 지금의 정치적인 다른 문제들도 있지만, 그것들도 굉장히 즉각적이고 파괴력 있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이렇게 아옹다옹하고 있을 때 이것으로도 뜻을 모으지 못하고 있을 때 지금도 빙하는 녹고 있는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황정은 : 주인공은 ‘전마협’의 의장이자 마구 제작자인 연리지를 만나서 마법 도구를 만드는데요. 모든 마법소녀들의 전투 무기인 ‘마구’가 그들 각자의 가장 소중한 물건이라는 점이 저는 재미있기도 했고 약간은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각자의 소중한 것이 마법소녀들의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이 소녀들의 모든 싸움이 그걸 지키려는 싸움인 거잖아요. 그래서 좀 마음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이 설정을 만들 때 어떤 상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박서련 : 이 설정이야말로 너무 생각 없이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웃음) 생각을 했다기보다 어떤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한 건 아닐까 싶어요. 아까 (제가) 마법 소녀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라는 얘기도 했지만, 또 제가 자랄 때 인기가 굉장히 많았던 만화 중에 <강철의 연금술사>가 있거든요. <강철의 연금술사>도 작품의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등가 교환이거든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고 또한 소중한 것으로 돌려받는, 그것을 저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썼던 것 같아요.
황정은 : 등가 교환이 이 소설의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기도 한 것 같아요.
박서련 : 맞아요.
*박서련 1989년 음력 칠석에 철원에서 태어났다.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는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 소설집 『호르몬이 그랬어』,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짧은 소설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 에세이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등이 있다. 한겨레문학상과 젊은작가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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