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진의 글쓰는 식탁] 하트는 올 것이다
빨간 하트는 내게 올 것이다, 우리는 안전한 세계에서 하트를 주고받으며 살 것이다.
글ㆍ사진 신유진(작가, 번역가)
20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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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나비를 따라 뛰는 펭귄을 봤다. 펭귄들이 무리 지어 노란 나비를 따라 폴짝폴짝 뛰었다. 나는 요즘 무해한 생명들이 등장하는 영상을 즐겨본다. 혼자 보기 아까운 것들은 친구들에게 전송하고, 하트 이모티콘을 받기도 한다.

펭귄 동영상을 친구에게 보냈다. 뜬금없이 고맙다는 답장이 왔다. 낯선 반응이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던 중에 다시 메시지가 왔다.

“이런 걸 주고받으니 그래도 우리가 안전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대답 대신 하트를 보냈다.

메일을 열고 이메일 주소를 찾았다. 지난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이름 하나가 노란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7532개의 메일 중에 그 이름을 찾아냈다. 한나(Hanna). 성은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낯선 이름을 한 번도 제대로 발음한 적이 없었다.

한나를 처음 만난 것은 파리 8대학, 극시 강의 시간이었다. 조별 과제를 해야 했고, 거기서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한나와 나는 어떤 그룹에도 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한 조가 됐다. 한나와 나는 일주일에 두 번,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과제를 했다. 우리는 불어에 서툴렀고, 불어보다 더 어려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도 어리숙했지만 조금씩 가까워졌다. 한나 앞에서는 문법이 엉망이고 시제가 뒤바뀐 문장을 써도 창피하지 않았다. 나는 최소한의 단어로도 많은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물론 우정이 학점을 구해주진 않았다. 우리가 과제 발표를 망친 날, 한나는 내게 실망하지 말자는 쪽지와 함께 키 링을 선물해줬다. 우정의 상징이었을까, 위로의 선물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지옥의 재시험도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한나가 준 빨간 하트 키 링을 오래 간직했다. 

한나와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드문드문 연락을 이어갔다. 마지막 메일을 주고받았을 때, 한나는 고향으로 돌아갈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었는데… 지금 한나는 어디에 있을까? 프랑스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갔을까?           

한나에게 메일을 썼다. 뉴스에서 본 참혹한 이야기들은 잠시 뒤로 미루고, 내가 본 펭귄 동영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남극에 노란 나비가 날아왔고, 펭귄 무리가 그걸 보고 신이 나서 뛰었다는 이야기, 빙하가 차갑게 감싸고 있어도 펭귄의 걸음은 꼭 봄을 믿는 것 같았다는 말을 적었다. 메일의 끝에는 동영상의 주소를 링크로 걸고, 펭귄이 마음에 든다면 작은 하트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네가 무사하고 안전하다는 표식으로… 지금 나는 하트를 기다리는 중이다.

하트를 기다리며 내 일상에 전쟁을 개입시켜 본다. 총과 폭탄, 사망자 수, 초토화된 도시, 헤어지는 사람들, 나는 이런 폭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무언가를 써야 할 것 같다가도 이내 할 말을 잃는다. 이해를 넘어서는 일들을 만날 때마다 침묵과 소음의 유혹이 나를 괴롭힌다. 입을 다물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다 어느새 잊어버리는 방식은 너무 쉬우니까. 절망은 늘 쉬운 얼굴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읽었던 책 속에서 이브 버거가 아버지, 존 버거에게 “저마다 ‘너무 큰 것’을 다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게 그런 방법이 있을까. 존 버거는 이브 버거에게 답을 찾거나, 답을 마주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질문이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희망을 품은 질문, 그게 잘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은 무엇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침묵과 소란을 선택할 수는 없다. 내게 너무 또렷한 얼굴과 이름을 그렇게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방법을 찾지 못한 내게 남은 것은 희망을 향한 갈구다. 희망을 갈구하는 목소리를 기도라고 부른다지… 기도는 때때로 침묵과 소란을 넘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무 큰 것 앞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가 아닐까.

한나에게 보낸 나비와 펭귄은 나의 기도다. 21세기에는 기도를 이메일로 전송할 수 있으니 작은 목소리도 멀리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빨간 하트를 기다리며 작은 기도를 쓴다. 나비가 추위를 이기고 날면 봄이 올 것이다, 그 봄에는 펭귄이 춤을 추듯 뛸 것이다, 빨간 하트는 내게 올 것이다, 우리는 안전한 세계에서 하트를 주고받으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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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작가, 번역가)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웠다.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몽 카페』를 썼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