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누군가의 팬이기만 했던 나에게 처음 팬이라며 다가온 사람들을 기억한다. 순간 겁이 났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얼떨결에 감사하다고는 했지만 정작 실제로는 아무것도 감사드리지 못했다. 도리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가는 내내 나를 보고 수줍게 웃어주고, 사랑을 선사한 사람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람들은 왜 누군가의 팬이 되는 걸까?’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팬이다. 당신은 누구의 팬인가? 즐겨 듣는 음악을 만드는 가수, 자주 보는 영화에 나오는 배우, 작가, 운동선수, 인플루언서 등 우리를 열광하게 해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사랑을 보낸다. 설령 내가 좋아하는 그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이렇게 불공평한 사랑도 없지만 이렇게 흔한 사랑도 없다. 존재해주기만 한다면 끝없이 사랑을 줄 것 같은 팬.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색하기만 하다.
건방진 물음이지만, 내 머릿속에 늘 떠오르는 것은 '사람들이 왜 나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을 열광시켰나.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로 오만하다. 좋아해주면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지 사랑에 의구심을 품다니. 그러나 정말로 궁금하다. 나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몇 십번을 들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도리어 나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라면 - 이것도 역시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랩을 잘하는 사람도, 외모가 뛰어난 사람도,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세상에는 널리고 널렸는데 하필 나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도 내 입장에서는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상을 지지하는 뮤지션이라 나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굉장히 용기있는 일이라고. 지금에야 당연히 그 말뜻을 이해하지만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던 처음에는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용기있는 행동인지 궁금했다. 수 년 전, 공개적인 자리에서 랩을 통해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행동에 대해서 특히 그런 반응이 많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은 매우 뜨거웠고 나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겠죠?"라고 앞으로 받게 될 몇 십 줄의 똑같은 질문에 무색하게, 그 랩 가사를 쓸 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동료들 역시 가사에 대한 내용적 피드백보다는 '랩 잘 하고와~'같은 응원만 해줄 뿐 그 행동에 대해서 칭찬을 해준다거나 찬사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비난을 하는 일은 더더욱. 그러나 그 랩이 공개되고 나서의 일들과 그것들을 겪은 지금의 나는 솔직히 용기를 내어 랩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는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나는 용기가 있어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거나 팬들을 모으기 위해 자꾸만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 행동이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는 '나'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오히려 나의 용기가 되고 있다. 수많은 악플을 받고 그에 대처조차 하지 못한채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 때 알게 되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헛소리이며 그것 자체로 나라는 사람을 끝없이 미워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여전히 어떤 용기를 가지고 다음 할 일을 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그저 그대로 행할 뿐이다. 그 때문에 여전히 많은 상처를 받고 가슴에 구멍이 뚫리지만, 무엇이 옳은 지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최대한 옳은 것으로 해석되는 쪽의 발언을 지지하는 일은 습관처럼 계속되고 있다.
옳은 일을 위해 용기를 내는 사람들의 팬들은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응원할 것이다. 자기 자신 대신 용기를 내어주고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달해주는 것을 응원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대신 노래로 만들어주는 가수,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을 대신 연기해주는 배우, 나를 대신해 세상에 영향력있게 존재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팬심이 아닐까 싶다. 지난 도쿄 올림픽 때 나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여자배구팀을 응원했다. 김연경 선수의 마지막 올림픽이었기도 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뜨거운 팀워크와 땀이 나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서 배구공을 때리고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기도, 온 몸을 다 쓰며 땀흘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중계조차 되지 않던 여자 배구가 4강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자 사람들 역시 그들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나의 에너지를 대신 분출해주는 선수들에게 사람들은 아낌없는 팬심을 보여주었다. 그 여름의 에너지를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아직도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나를 좋아할까? 그것은 아마도 내 목소리로 말하는 것들이 그들의 가슴속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내가 행동하는 것이 그들의 가슴속에도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로 듣는다. 나는 그 경험을 하면서 무엇보다 놀랐다. 물론 전면적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노래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아직 부끄럽기만한 내면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공감해주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서’ 같은 것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수록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스스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여자배구를 보며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피가 끓고 에너지가 솟구치는 일이 있으니, 노래를 듣고 자기 자신의 상념을 회고해보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 나만의 대화 방식이 따로 있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나보다 랩을 잘하는 사람도,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세상에는 너무너무 많지만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나 한명 뿐이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런 이유로 누군가의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대신 알아주는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여담으로, 나는 박소담 배우의 팬이다. 그녀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서 보여준 '표정'에 빠져버렸다. 그는 그 영화에 오래전부터 캐스팅된 주연 배우가 갑작스럽게 하차하고 주연 배우 자리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졌다고 인터뷰했다. 그렇게 갑자기 복잡한 감정의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에서 한번 더 빠져버렸다. 박소담 배우의 표정과 발성은 확실한 '누군가'가 되기도, 확실한 '아무도 아님'이 되기도 해 굉장히 매력적이다. 스펙트럼의 끝과 끝을 정확히 같은 기법으로 연기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신기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도전해본 적 없는 장르이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신비로운 사람들만이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환상에 갇혀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박소담 배우에게도 이미 많은 응원이 가겠지만, 또 한번의 힘찬 응원이 갈 수 있도록 방구석 한 켠에서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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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릭(뮤지션, 작가)
뮤지션, 작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괄호가 많은 편지』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