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끔했다. 김한민 작가의 신작 제목을 읽고는! 대관절 무슨 내용이길래 ‘착한 척’은 지겹다고 말할까. 주인공의 결기 넘치는 표정을 오랫동안 응시한 뒤 책장을 펼쳤다. 『착한 척은 지겨워』는 NGO 바닥에서 15년째 잔뼈가 굵은 소심한 시민운동가가 거침없는 언행으로 공포의 시위꾼으로 소문난 기후 활동가 ‘마야’와 기후 정치를 하는 당 ‘불가능한당’을 창당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이다. 내 안의 ‘쓰레기가슴’을 발견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책을 읽는 내내 콕콕 쑤실 것이다.
5년 만에 신작이다. 2018년 『아무튼, 비건』 출간 후 페르난도 페소아의 작품을 번역했고 단독 저서는 오랜만이다. 5년간 어떻게 지냈나?
책 작업을 소홀히 하고 환경운동에 매진했다. 『착한 척은 지겨워』도 기후 문제와 비거니즘에 관심 가지면서 구상했으니 꽤 오래됐다. 아무리 긴급하고 절실한 문제라도 해결하려면 대중의 지지 없인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지지를 얻으려고 ‘착한’ 접근들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때쯤 그레타 툰베리처럼 전혀 ‘안 착한’, 가감 없는 목소리도 나타났는데, 이 책은 그런 흐름의 일종이다. 반면, 다른 한쪽에선 치유와 힐링, “괜찮아, 네 잘못 아냐” 류의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메시지들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는데, 이 책은 그런 흐름에 역행한다.
주인공 ‘나’와 기후 활동가 ‘마야’. 두 인물은 시각적으로도 굉장히 대비된다. 캐릭터를 만들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화자인 ‘나’의 이름은 (책엔 안 나오지만) ‘신디’이다. 신디와 마야 둘다 실제 모델들이 있다. 나는 책 속 인물을 만들 때, 두 명 이상의 실존 인물을 섞어서 만들곤 한다. 그래야 모델과 거리를 둘 수 있으니까. 가장 큰 고민은, 그러면서도 인물이 얼마나 살아 있느냐는 것이다.
기후 위기, 연민, 미투, 인류세, 동물해방, 기분만 띄우고 행동은 억제하는, 허영에 쉽게 자극되는 ‘쓰레기가슴’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을 쓰면서 ‘이 내용은 꼭 넣고 싶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나?
“쓰레기가슴”과 “자위는 집에서”. 그 뜻은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제발 다들 지금 작동하고 있는 것이 쓰레기가슴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전자라면 과감히 집어치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위를 하려면 집에서 각자 했으면 좋겠다, 공개하지 말고. 너무 당연한 얘기 같지만, SNS 환경에 익숙해진 우리는 지금 하는게 자위라는 사실조차 자주 까먹는다.
제목을 지은 배경이 궁금하다. 『착한 척은 지겨워』라니! ‘착한 척은 괴로워’도 아니고!
착한 척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설마 착한 척이 그렇게까지 문제의 핵심이라곤 생각 안 한다. 착한 척의 폐해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개인만이 아니다. 기업도, 정부도 착한 척에 도가 텄다. 그 수많은 착한 척할 시간에 정말 착한 짓들을 했다면, 세상이 두 번 바뀌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 스스로도 착한 척에 찌들어 있는 면이 있어 다짐을 담은 제목이기도 하다. “착한 척은 괴로워”는 당연히 염두에 둔 적 없다. 그 또한 착한 척이기 때문에.
에필로그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머리를 질끈 묶는 그림이 표지가 됐다. 어떤 결단, 결의일까? 안경을 쓰고 순한 표정을 했던 첫 장면과는 사뭇 다르다. 주인공은 이제 착한 척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될까?
맞다. 주인공은 조금씩 변한다. 그전까지 자기 의지대로 살았다곤 하지만, 추구하는 이상도 없이 현실적으로 열심히만 살아오다가, 의지에 반해 끌려다니다시피한 경험을 하고 나서 변화가 생겼다. 그렇다면 이중에서 진짜 의지는 뭘까? 나도 모르지만, 주인공이 자기 방식대로 ‘미투’를 해낸 경험이 앞으로의 인생에 자양분이 될 것 같다.
현재도 착한 척하느라 괴로워하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괴로움은 도구다.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 같은. 행동을 위해 잠시 필요한 감각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괴로움 자체에 몰입하고, 몰입한 시간 동안 뭔가 했노라고 착각하면 변화는 싹부터 잘린다. 괴로움의 표현을 그치자. 아무도 (당신 자신조차) 그것에 관심 없다고 상정하자. 당장 분연히 일어나 뭐라도, 작은 뭐라도 해라. 물론 그런다고 세상이 바로 바뀔 리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세상을 실제로 조금이라도 바꿔가는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징징거림이 아닌, 또다른 행동으로 넘어갔다. 물론 이건 내 말이고, 주인공 마야는 이렇게 친절하게 얘기해주지 않을 거다.
이 책을 읽고 마음이 찔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듯하다. 채식을 비롯한 환경운동을 작게나마 실천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한 마디를 한다면?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Just do it.
*김한민 (글·그림)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리피데스에게』, 『혜성을 닮은 방』, 『공간의 요정』, 『그림 여행을 권함』, 『책섬』, 『카페 림보』, 『비수기의 전문가들』, 『사뿐사뿐 따삐르』, 『웅고와 분홍돌고래』 등의 책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으로 페루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독일에서 작가 활동을 하다가 귀국해 계간지 [엔분의 일(1/n)]편집장으로 일했다. 포르투갈 포르투 대학교에서 페르난두 페소아의 문학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했고, 리스본 고등사회과학연구원(ISCTE) 박사과정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산문집 『페소아와 페소아들』, 시선집 『시가집』을 엮고 옮겼으며, 페소아와 그의 문학, 그리고 그가 살았던 리스본에 관한 책 『페소아: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의 화신』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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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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