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쒔다. 동지를 맞아 팥죽을 쒀 보았다. 요리 고수의 정석 조리법을 따라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 그들이 덧붙여 공개한 간단 비법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고 나의 게으름이 낳은 요령을 더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완성했다. 조리 과정 자체는 단순하지만 팥을 불린 시간까지 치면 하루의 절반 이상이 들어간 셈이고, 그 최소한의 과정 중에도 냄비의 물이 넘쳐 수습하고 데일 뻔하고 소소하고 부끄러운 파란만장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맛있으니 되었다. 그렇다. 맛있으니 되었다 싶은 것, 일차원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은 제일 중요한 것. 음식 덕에 나의 마음도 몸도 어느정도 균형을 유지한다.
이유는 없는데 특정 상황이 되면 특정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체력 소모가 큰 날에는 햄버거다. 말 그대로 몸을 움직여 쓸 일이 많았거나 공연을 몇 시간씩 본 날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머리 위에 잔여 배터리 10% 빨간 불 켠 채로 햄버거 가게를 찾아 먼저 들르는 것이 순서. 정신 소모가 큰 날에는 떡볶이다. 중간에 임시 방편으로 달고 찬 음료를 긴급 투입하기도 하지만 저녁은 아무래도 떡볶이다. 조금이라도 여력이 있을 때는 매운 떡볶이를 사다가 적당한 비율로 춘장을 넣어 짜장 떡볶이를 만들기도 하고, 당장 드러누워야 할 상태라면 편의점 떡볶이다.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는데, 과거의 어떤 기억들은 음식과 단단하게 묶여있다. 일요일에 온 식구가 함께 집안 대청소를 하고 점심으로 잔치국수를 먹었는데, 덕분에 국수는 나에게 집의 맛, 가족의 맛이다. 꼭 그렇게 둘러앉아 먹었던 오이냉국도 마찬가지. 오이와 미역, 새콤하고 시원한 보통의 냉국 맛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건 그 풍경 덕일 거다. 시간이 미화시킨 부분들을 감안하고 보아도 그 음식들은 분명 상징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누군가는 된장국에서 하루치의 응원을 얻을 테고, 다른 누군가는 쫄면으로 화를 씻어내며 마음의 평화를 득할 것이다. 하나의 음식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음식은 우리가 아주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고비를 넘어갈 힘을 준다.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고, 눈물 콧물 땀 개운하게 쏟아내고 다시 일어설 때 으쌰 손을 잡아준다. ‘먹는 걸로 푼다’고 하면 부정적인 어감도 있는데, 아니다, 물론 무언가를 해칠 정도가 되면 안되겠지만 그것이어야만 하는 영역이 있다. 치킨과 맥주만이 나를 구할 수 있는 날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어 쌓이면 위로가 필요한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진다.
믿음이 없을 때조차 음식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놀라움을 안겨주며, 우리를 달라지게 하고, 강하게 만들어준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열린 마음으로 나눠 먹으라. 그러면 똑같은 선물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리고 위로받았다.
_에밀리 넌, 『음식의 위로』 365쪽
그야말로 죽을 쑨 기분이 되어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조금은 나아진다. 다행히, 행복하게도. 그 맛을 선물하고 싶어서 다른 이에게도 음식을 건넨다. 같이 먹자고 말한다. 아마도 거기에는 말에 담긴 것 이상의 마음이 있다. 그러고보니 내가 죽을 쑨 것은 정말 동지였기 때문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는 뭐 맛있으니 되었지만. 따뜻한 팥죽 한 그릇을 다시 담는다. 거기 멀리 있는 당신과도 언젠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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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욱(도서 PD)
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