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을 대면하는 방식
백팩을 맨 아이들 무리가 학원 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조용하던 상가 복도가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로 채워졌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복도를 따라 이내 썰물처럼 계단참으로 빠져나갔다. 남은 아이들 둘이 장난을 치며 복도를 맴돌다 다른 학원 문을 열고 사라졌다. 어딘가에서 합창 소리가 들렸다. 노래는 복도 끝에 위치한 의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보며 지나가던 남자 아이 하나가 노래가 흘러나오는 문 앞에 멈춰 호기심 어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가임을 깨달았는지 이내 따분한 표정으로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진료를 시작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대기실엔 여자 다섯 명이 앉아있었다. 합창이 끝나고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반백의 여성이 성서 구절을 낭독했다. 다가오는 바자회 행사 준비에 대한 보고가 오간 뒤 사람들은 두 손을 모으고 짧은 기도를 함께 했다. 마침 기도가 끝나고 김희정 씨가 데스크 뒤편에서 종이컵과 홍차 티백, 쿠키가 놓인 쟁반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성서를 낭독했던 여성이 그녀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안나 씨. 괜히 일찍 출근해서 차까지 대접하게 만들고.”
“오랜만에 이렇게 구역 모임을 하니 정말 좋아요. 장소가 마땅치 않았는데 안나 씨가 아니었음 난처할 뻔 했지 뭐에요. 그런데 집에서 하는 것보다 더 분위기가 좋네요.”
자그만 체구에 옥색 스웨터를 입은 여성의 말에 반백의 여성을 포함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김희정 씨가 종이컵에 차를 따르며 웃음을 지었다.
“불편하지 않으실까 했는데 다행이네요. 저야 어차피 일찍 출근할 때가 많아서 괜찮아요.”
옥색 스웨터 여성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말을 꺼냈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정신이 나는 것 같네. 아까 베로니카 언니가 복음 말씀 할 때는 깜빡 졸았나 봐요.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왜, 불면증이야? 무슨 고민 생겼어?”
“고민은요. 그냥 요즘 잠이 안 와서요. 자려고 누우면 자꾸 몸에 열이 올라와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안젤라도 그래? 그거 갱년기 증상이야. 나도 수시로 열이 올라서 날이 추워도 스카프를 못하잖아. 남들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민망할 때도 있고. 금방 좋아지는 사람도 많다는데 벌써 반 년은 된 것 같아. 언제 완전히 나아질는지 원.”
파마 머리를 올려 묶은 여성이 푸념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옆에 앉은 둥근 테 안경을 쓴 여성이 옥색 스웨터의 안젤라 씨에게 말했다.
“요즘 생리도 왔다갔다하지? 그러다 점점 뜸해지고 나중엔 멈춘다고 하더라. 난 갱년기 증상이라고 들었을 때 어째 좀 서글퍼지더라고.”
“다들 때 되면 겪는 일인데 뭘 유난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나아질텐데. 벌써 오래 전 일이긴 해도 난 매달 하던 거 안하니 편하기만 하더만.”
반백의 여성이 이야기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파마 머리 여성이 그녀에게 샐쭉 눈을 흘겼다.
“베로니카 언니는 참 편하게도 말하네요. 저도 처녀 때는 매달 생리하는게 귀찮고 아프기도 해서 성당에 가면 생리 좀 안하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었잖아요. 근데 이제 폐경이 된다고 생각하니 왜 이리 인생이 허무한지 모르겠어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할 일도 많은데 그만 맥이 탁 풀려 버리는 게. 이젠 여자도 아닌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든다니까요.”
“그런 생각이 지나치면 우울증 된다더라. 데레사도 조심해. 난 한참 심할 땐 기분도 가라앉고 예민해져서 남편을 쥐 잡듯 했어. 우리 애가 얼마 전까지 사춘기였는데 오죽하면 남편이 그러더라. 사춘기보다 무서운 게 갱년기라고.”
안경을 쓴 여성의 농담에 다들 키득거리며 웃었다. 가벼워진 분위기에 위안을 얻었는지 안젤라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난 요즘엔 저녁이 오는 게 무서워. 아파트 거실에서 밖을 보면 지는 해와 노을은 아름다운데 저물어가는 내 모습은 왜 이리 초라하고 못나 보일까. 남편이랑 아이들도 늦게 들어올 때가 많으니 혼자 저녁은 차려 먹어서 뭐하나 싶고. 불도 안 켜고 혼자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을 때도 많아. 밤에 열이 올라 잠을 못 자고 뒤척거리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괜히 밉더라. 인생은 원래 혼자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그녀가 옆에 앉은 김희정 씨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안나 씨는 이런 이야기 아직 실감이 안 나죠? 아줌마들 주책이다 생각할지도 몰라요. 근데 난 안나 씨 나이가 너무 부러워요.”
김희정 씨는 뭐라 말을 해야할지 몰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겪진 않았지만 반딧불 의원에도 갱년기 증상으로 진료를 받는 환자들이 있었기에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는 익숙한 문제였다. 얼마 전엔 폐경을 일찍 맞은 사촌 언니에 관해 이수현 선생과 상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환자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적은 없었다. 그녀가 대답을 하기 전에 안경 여인이 끼어들었다.
“얘 봐. 그냥 두면 큰일 나겠네. 여성 호르몬 처방 받아. 나도 갱년기 증상 때문에 고생했는데 먹고 나니 씻은 듯이 없어졌잖아.”
“정말? 그렇게 효과가 좋아?”
데레사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에게 물었다.
“열 오름, 불면증에 우울증까지 종합 세트였는걸. 근데 다 나아지고 관절 아프던 것까지 좋아졌다니까. 오죽하면 내가 의사 선생님께 왜 일찍 처방해주지 않았느냐고 원망을 했겠어.”
안젤라 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경 여인을 향해 말했다.
“여성 호르몬은 부작용이 많다고 하던데. 소피아 언니는 괜찮았어요?”
“처음 먹기 시작할 때는 끊겼던 생리가 자주 나와서 불편하고 가슴이 뭉쳐 아프기도 했지. 흔한 일이라더라. 지금은 그것도 나아졌어.”
“저도 갱년기 증상이 아닐까 싶어 이것저것 좀 찾아봤어요. 그런데 호르몬제 먹으면 유방암도 생길 수 있다고 해서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의사 선생님도 유방암 검사 꼭 받아야 한다는 이야긴 하던데, 그거야 호르몬 치료를 안해도 원래 정기 검진 하고 있던 거니까. 당장 잠을 못 자고 힘들어 죽겠는데 어쩌겠어. 그리고 유방암 확률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고 하더라. 안나 씨, 그렇지 않아요?”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예전엔 유방암이 생길 수 있다고 해서 한참 호르몬 치료를 안 하기도 했는데 최근엔 위험이 크지 않다고 해요. 저희 의원에서 처방 받는 분들도 있는 걸요.”
유방암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면서도 약간은 자신 없는 기색을 보였던 소피아 씨는 김희정 씨가 동의하자 다시 안심하는 눈치였다. 안젤라 씨는 아직 확신이 없는 듯 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베로니카 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 때는 호르몬 치료 하라는 이야길 많이 듣지 못했는데 이젠 아닌가 보네. 나도 비슷한 증상이 있었는데 그냥 참고 지냈지. 그러고 보면 세상 참 좋아졌어.”
데레사 씨가 말했다.
“베로니카 언니도 호르몬 약을 먹지 않고 그냥 넘긴 거잖아요. 나도 갱년기 증상이 있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생기는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나아지는데 되도록 자연스럽게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좋은 약이 있는데 참을 게 뭐 있어. 결핍증이라고 하잖아. 여성 호르몬 결핍증. 호르몬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이니 나처럼 약을 먹고 부족한 걸 채우면 되지. 간단한 거 아닌가. 난 직접 경험해보니 이 좋은 약을 왜 다들 안 먹고 참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갱년기를 겪는 여자들 모두가 먹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안나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는 다시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김희정 씨를 바라 보았다.
“결핍은 마땅히 있어야 할 게 모자란다는 뜻인데, 너무 이른 나이에 여성 호르몬이 줄어드는 경우엔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봐요. 치료도 필요할 것 같고요. 하지만 때가 되어 호르몬이 줄어드는 건 모두가 겪는 과정이잖아요. 그걸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폐경이 된다고 모두가 다 불편한 증상을 겪는 것도 아니고요.”
그녀가 잠시 말을 끊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조심스러웠다. 앞에 앉은 이들 모두가 그 과정을 직접 겪었거나 겪고 있는 당사자들이었지만 막상 그녀 자신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결핍증이란 건 결국 증상을 말하는 거니까. 저희 원장님도 호르몬이 줄어드는 것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생기는 증상이 심한지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짧은 침묵을 깬 건 다시 베로니카 씨였다.
“안나 씨 말이 맞아. 내가 불편치 않다면 결핍은 문제가 아니지.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굳이 채울 필요도 없고.”
“부족한 게 많은 나는 아직은 약을 먹어야 할 것 같네요. 남들보다 예민한 이 몸을 어찌 한단 말이오.”
소피아 씨가 어깨를 으쓱하며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말투로 한탄했다. 데레사 씨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사람마다 다르다잖아. 난 그럭저럭 지낼 만하지만 소피아처럼 심하면 약을 먹을 수도 있는 거지. 안젤라도 가만 있지 말고 의사 선생님하고 상의해 봐. 치료를 받는게 더 나을 수도 있는 거니까.”
“맞아요. 호르몬 치료가 필요한 사람도 많거든요. 뼈가 약해지는 골다공증 예방에도 도움이 되구요.”
두 사람의 말에 안젤라 씨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를 받고 몸이 편해진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내가 왜 힘든지 이유를 알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더라. 근데 한편으론 내가 겪는 문제들이 갱년기란 이름으로 싸잡히는 느낌이 드는 건 달갑진 않았어. 기승전 갱년기라고. 어디가 아프다고 하거나 우울하다고 하면 우리 남편이 당신 갱년기잖아, 그럼 말문이 막혀서 더 이야기하기 어려워. 그래서 내가 우리 아들 두고도 예전엔 무심코 사춘기다, 중2병이다 했는데 이젠 안 하잖아. 그런 말 할 시간에 일 분이라도 애 이야기 더 들어주는 게 낫지.”
데레사 씨도 동감한다는 듯 소피아 씨의 어깨를 토닥이고 말을 이었다.
“갱년기란 말을 들으면 부정적인 생각부터 드는 것도 속상하더라. 내가 그런 느낌이 드는 대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하지만 이제는 내 몸이 나한테 말을 거는 거란 생각을 해. 그동안 너무 정신 없이 사느라 내 자신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일 줄 몰랐구나, 들어주지 못했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은 내가 읽고 싶은 책도 더 읽고 하고 싶은 일도 더 하려고 해. 지난 달부터 요가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좋더라. 몸도 덜 화끈거리는 것 같고.”
“몸은 시들어도 마음은 풍요로워지는구나. 결핍이란 게 좋은 점도 있네.”
두 사람의 말에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베로니카 씨가 헛기침을 했다.
“너희들 이야길 들으니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생각난다. 고린도후서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소피아 씨가 기도하듯 두 손을 마주 잡고 익살스런 말투로 냉큼 화답했다. 유쾌한 웃음 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이 통로를 필사적으로 달려온다
다시는 오지 않을 열차라도 되는 양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이런, 이런,
그들을 살짝 피해
나는 건들건들 걷는다
건들건들 걷는데
6호선 승차장 가까이서
열차 들어오는 소리
어느새 내가 달리고 있다
누구 못잖게 서둘러 달리고 있다.
-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갱년기」 중에서
황인숙 시인의 시 「갱년기」의 일부이다. 이 시에는 갱년기를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다. 폐경을 앞두고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을 보내며 느끼는 조급함. 시계 바늘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고 싶은 마음. 조급함을 덜기 위해 건들거려도 보지만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시간을 잡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폐경기 증상 개선 목적으로 여성 호르몬을 사용한 것은 1940년대부터이다. 이후 여성 호르몬은 여성성을 유지하고 노화를 방지하는 약물로 자리매김했고 1990년대까지 인기를 누렸다. 당시엔 폐경기 증상이 없는 여성에게까지 널리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 WHI(Women’s Health Initiative) 연구를 통해 호르몬 요법이 심혈관 질환과 뇌졸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결과가 발표되면서 여성 호르몬 치료는 위기를 맞는다. 곧이어 장기간의 호르몬 치료가 유방암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추가로 알려지면서 호르몬 요법의 인기는 급격하게 사그라들었고, 십여 년이 넘게 암흑기에 놓였다. 이후 호르몬 치료의 긍정적인 효과를 증명한 다양한 연구들이 발표되면서 최근에는 호르몬 치료를 옹호하는 의견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논란의 핵심이었던 유방암의 경우 후속 연구에서 5-7년 까지는 복용을 지속해도 위험이 높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갑작스런 열감으로 대표되는 폐경기 증상에 여성 호르몬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폐경 증상이 심하지 않다면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지만, 적절히 사용했을 때 부작용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 역시 없다. 전문가들은 폐경 증상이 시작될 때 되도록 일찍 치료를 시작하라고 권한다. 나이가 들어 늦게 치료를 시작할수록, 복용 기간이 길어질수록 부작용의 위험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호르몬 치료는 열감이나 식은땀 등의 혈관 운동성 증상 이외에 골다공증, 과민성 방광, 질 위축과 성 기능 장애, 우울감 등의 예방과 개선에도 부가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반면 질 출혈이나 유방 통증과 같은 부작용도 흔히 생기므로 의료진과 상의해 자신에게 맞는 약제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유방암이나 정맥혈전증의 병력이 있는 경우엔 호르몬 치료를 삼가해야 한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도 폐경기 증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신체적인 변화뿐 아니라 상실감과 감정의 기복이 많을 때이므로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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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