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빗줄기가 밤이 되면서 더 굵어졌다. 이 시간이면 화니 프라자 건물도 대부분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1층 편의점의 불빛만이 환하게 거리를 비췄다. 편의점 안에서 남자 손님 한 명이 간이 식탁에 컵라면을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의 거리는 한산했다. 우산을 쓴 사람 몇이 잰 걸음으로 건물 앞을 지났다. 택시 몇 대가 지나간 뒤 야식 배달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긴 꼬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여자 한 명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어두침침한 계단을 내려와 상가 입구 앞에 서서 비가 쏟아지는 바깥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복도 끝에 있던 경비원 복장을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간호사님. 우산 없어요?”
상가 경비원인 김재식 씨였다.
“네. 챙긴다는 걸 깜빡 했나 봐요. 아무래도 편의점에서 하나 사야할 것 같아요.”
“잠시 기다려 봐요.”
경비실로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 검정색 장우산 하나가 들려있었다.
“순찰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놓고 가는 우산이 많아요. 며칠간 두어도 가져가는 이가 없으면 내가 챙겨두거든요.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올 때 쓸 만해요.”
“감사합니다 아저씨. 내일 출근할 때 다시 드릴게요.”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비가 한 번 오고 나면 주인 없는 우산은 또 생기거든요. 허허.”
너털웃음을 지은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김희정 씨도 그의 시선을 따라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일기 예보엔 초저녁에만 온다고 해서 퇴근 무렵엔 멈추겠거니 했는데.”
“요즘 일기 예보 믿을 수가 있나요. 그거보단 내 관절염이 훨씬 정확하지. 오늘은 하루 종일 쑤시는 게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어요.”
“관절이 많이 불편하신가 봐요.”
“나이 들면 으레 그러려니 하죠. 요즘은 손가락이 아파서 연필을 잡기가 불편하네요.”
그가 양쪽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마른 편이었지만 손가락만은 살집이 오른 것처럼 두툼해 보였다. 김희정 씨는 그의 관절이 부어서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알아챘다.
이틀 뒤 그녀가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경비실 안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쓰고 있던 김재식 씨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았다.
“우산 가져다 드리려고 들렀어요. 그리고 이것도.”
그녀가 우산과 함께 커피 캔 두 개를 내밀었다.
“빌려드린 값으로 이 정도면 쏠쏠하네요. 앞으로도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허허.”
김희정 씨는 경비실 내부를 훑어보았다. 한 평 남짓한 방 안에 작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한 명이 겨우 누울 만한 너비의 장판이 깔린 침대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돋보기 안경, 손전등과 수첩이, 한쪽 벽엔 연필 꽂이와 책 몇 권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정리 정돈이 깔끔하게 된 모습이 그의 성격을 짐작하게 했다. 책상 밑 작은 서랍장 위에 놓인 두꺼운 스케치북과 팔레트가 눈에 띄었다.
“그림을 그리시나 봐요. 한 번 보여 주세요.”
“아이구. 그냥 소일거리로 하는 거예요. 그리다 보면 심심하지도 않고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가 펼친 스케치북에는 도시 변두리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색이 입혀진 그림도 있었지만 연필 스케치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었다. 일부는 김희정 씨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출퇴근 길에 만나는 익숙한 골목과 화니 프라자 앞길 그림은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미술을 잘 모르는 그녀도 단순한 아마추어 수준의 그림이 아니란 건 느낄 수 있었다. 스케치북을 넘길 때마다 탄성을 지르는 그녀를 김재식 씨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림이 정말 멋져요. 전시를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아이구, 칭찬이 과하세요.”
“상가에 오신 지 서너 달 되셨을 텐데 그동안에도 많이 그리셨나 봐요.”
“정확하게 아시네. 네 달 조금 넘었습니다. 삼십 년을 아침에 정시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생활을 하다가 퇴직했어요. 처음엔 교대 근무가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익숙해져서 할만 합니다. 밤에 경비실에 있다 보면 젊었을 때 군대에서 초소 지키던 생각도 나고 그래요. 퇴직하고 방구석에서 노는 친구들도 많은데, 관절은 성치 않아도 큰 병은 없으니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허허.”
“병원엔 가 보셨어요?”
“진료는 몇 번 받았지요. 이 나이가 되면 관절염이야 달고 사는 건데. 뾰족한 수가 있으려나요. 아플 땐 약 먹고, 그럼 또 좀 나아지고 그렇습니다.”
“지난 번에 보니 관절에 붓기도 있으신 것 같던데, 이따가 저희 병원에 와서 진료 한 번 꼭 받아보세요. 오래 일하시려면 건강 잘 챙기셔야죠.”
김희정 씨의 조곤조곤한 말투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반딧불 의원 진료실을 찾은 건 몇 시간 뒤였다.
“관절이 아픈 건 꽤 오래 된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요즘은 더 심해졌어요.”
“어느 관절이 가장 많이 아프신가요?”
“여기저기 돌아가며 아픕니다. 얼마 전엔 손목하고 무릎이 아팠고…… 요즘은 손가락이 제일 불편해요. 잠을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뻣뻣해서 주먹이 잘 안쥐어지네요.”
“뻣뻣함이 한 시간 이상 오래 가나요?”
“그럼요. 어떤 때는 오전 내내 불편하기도 한데요.”
의사는 그의 손가락을 유심히 관찰하고 관절을 주물러가며 통증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가 아픈 관절을 누를 때마다 김재식 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관절이 아픈 것 말고 다른 증상은 없으세요? 피로가 심해졌다거나, 미열이나 입마름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피곤한 건 있는데, 익숙지 않은 경비 일을 새로 하다 보니 그런가 했지요. 체중이 좀 줄긴 했습니다. 이삼 킬로 정도? 입마름은 특별히 없는데, 맞다. 원래 안구 건조가 있었는데 부쩍 심해졌어요. 인공 눈물을 달고 삽니다. 짬짬이 그림을 그리는데 그래서 심해진 건가 싶기도 하고, 손가락도 아파서 당분간 그림 그리는 것도 그만두려고 생각했지요.”
“손가락 관절엔 지금도 염증이 있는 상태입니다. 혈액 검사 몇 가지와 X선 촬영을 해보는 게 좋겠어요.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드실 수 있는 약을 처방할께요.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일주일 뒤 경비원 복장을 한 김재식 씨가 다시 진료실을 찾았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던 의사가 진료실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검사 결과를 살펴봤어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보입니다.”
“류……마티스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의사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관절염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퇴행성 관절염과 류마티스 관절염인데요. 퇴행성 관절염은 나이가 들면서 관절을 많이 써서 연골이 닳아 생깁니다. 그래서 체중이 실리는 무릎 관절에 주로 많이 생기죠. 하지만 류마티스 관절염은 우리 몸의 면역 체계가 고장나서 멀쩡한 관절을 공격해 염증을 일으켜요. 그래서 많이 쓰는 한두 관절에만 생기지 않고 여러 관절이 한꺼번에 아픕니다. 특히 손가락 관절에 많이 생기구요. 치료를 안하고 오래 두면 관절이 망가지고 변형도 생기게 됩니다.”
김재식 씨가 멍한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본래 알고 있던 관절염은 관절에 생기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었다. 류마티스란 생소한 이름의 병은 한꺼번에 여러 관절을 망가뜨린다니 더 못된 병임에 틀림없다. 면역이란 놈은 무슨 문제가 있길래 괜히 멀쩡한 관절을 망가뜨린단 말인가.
“류마티스 관절염은 전신 질환이라, 관절 문제 외에 피로나 안구 건조증 같은 증상이 함께 생길 수 있어요. 치료를 하면 이런 증상도 나아질 수 있습니다.”
“거참 희한한 병이네요. 그럼 소염진통제 같은 약은 도움이 안되는 겁니까.”
“물론 염증과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류마티스 관절염에선 면역을 조절하는 약을 쓰는 게 더 중요해요. 함께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면역이 문제라니…… 면역력에 좋은 식품이나 영양제 같은 건 없습니까? 방송에선 많이 나오던데요.”
의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면역력을 강화한다는 상품들은 많지만 과장이고 장삿속이에요. 설사 진짜 그런 효과가 있다고 해도, 면역 기능이 과하게 작동해 관절을 공격하는 게 류마티스 관절염인데 거기에 면역력을 더 세지게 하는 걸 먹으면 불 난 데 기름을 붓는 거죠. 면역력이란 체력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골고루 잘 드시고 운동도 하셔서 체력 관리 잘 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그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태생이 가만히 쉬는 걸 못 견딥니다. 공무원으로 삼십 년을 일하는 동안 결근 한 번이 없었어요. 퇴직하고 집에 있기가 힘들어 경비 일도 시작했지요. 그런데 이젠 이런 병이 발목을 잡네요. 앞으로 제가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요?”
“완치가 어려운 병이지만 꾸준히 약을 드시고 관리하면 건강에 큰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어요. 일도 하실 수 있구요.”
“말씀을 들으니 조금은 기운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기운이 난다고는 했지만 그의 말투엔 힘이 없었다. 약 처방을 하는 동안 김재식 씨는 무릎 위에 놓은 자신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가 양손을 조심스럽게 몇 번 쥐었다 폈다. 그의 손에 의사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셨지요? 화가인 르누아르도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일흔이 넘어서까지 그림을 그렸지요.”
“저도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몇 년 전에 서울숲으로 전시회도 보러 갔었지요. 전시회장에 여자 분들이 많았는데 그 사이에 나이 먹은 남자는 저밖에 없어 민망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주름진 눈매에 소년의 눈빛과 같은 밝은 빛이 순간 떠올랐다.
“관절염을 참으며 붓을 놓지 않았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멋진 말이네요.”
그가 잠깐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다음 진료 날짜를 상의하고 진료실을 나가려던 그가 돌아서서 말했다. 한결 기운찬 말투였다.
“다음 번에 오면 제 그림을 한 점 선물로 드리고 싶네요. 젊었을 땐 미대를 갈까도 했었지요. 취미로 그리는 거지만 곧잘 칭찬도 듣고 하니 보기 민망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허허.”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인 르누아르는 풍성하고 반짝이는 색채로 일상의 아름다움을 그려 색채의 마술사, 행복을 그리는 화가로 불린다. 그는 오십 대부터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았는데, 정확한 진료 기록은 없지만 그의 사진이나 편지 등을 통해 병의 진행 경과를 짐작할 수 있다. 관절염이 심해지면서 말년에는 휠체어에 앉아 손가락에 붓을 묶어 그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시적인 관절의 통증은 관절을 무리해 사용한 경우 누구나 겪을 수 있다. 하지만 6주 이상 지속되는 만성적인 관절통의 경우엔 원인 확인이 필요하다. 흔한 원인으로는 퇴행성 관절염과 류마티스 관절염이 꼽히는데 두 질환은 원인과 치료 방법이 전혀 다르다. 퇴행성 관절염은 골관절염이라고도 불리며, 뼈를 둘러싸고 있는 연골이 닳아 염증과 통증이 생긴다. 대개 오십 대 이상에서 시작해 나이가 들수록 발병률이 증가한다. 반면 류마티스 관절염은 면역 체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관절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고, 젊은 연령을 포함해 모든 연령에서 생길 수 있다. 두 관절염 모두 손가락과 같은 작은 관절에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류마티스 관절염은 주로 손목 또는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의 관절에서 발생하고, 퇴행성 관절염은 손가락 끝마디 관절에 잘 생긴다. 또한 퇴행성 관절염은 무릎, 어깨, 고관절 등 큰 관절에 더 흔하게 생긴다. 류마티스 관절염은 여러 관절을 침범하고 양쪽 관절에서 대칭적으로 나타나는데 반해, 퇴행성 관절염은 일측 손이나 무릎에서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특징적이다. 두 질환 모두 아침에 일어나면 주먹이 잘 안 쥐어지고 뻣뻣한 증상이 생기지만, 퇴행성 관절염은 보통 30분 이내에 풀어지고 류마티스 관절염은 1시간 이상 오래가는 것 역시 중요한 차이이다. 류마티스 관절염은 전신 질환이므로 관절의 통증 외에 피로감, 식욕저하, 체중 감소, 미열, 안구 건조, 입 마름 등의 증상을 흔히 동반한다. 진단에는 류마티스 인자와 같은 자가면역 관련 혈액 검사가 필요하다. 두 질환은 치료법도 차이가 있다. 류마티스 관절염은 면역과 관련된 항류마티스 약물을 포함해 먹는 약으로 치료하는 반면, 퇴행성 관절염은 통증 조절과 함께 관절을 무리해 쓰지 않는 생활 습관 관리가 중요하다. 류마티스 관절염의 완치는 어렵다. 하지만 꾸준한 약물 치료를 통해 증상을 줄이고 질병의 진행을 더디게 하면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초기에 치료를 시작하면 효과가 좋으므로 일찍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병 1-2년 내에 관절 조직의 파괴가 일어나는 것도 이른 진단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마티스 관절염을 초기에 진단하기는 쉽지 않다. 노년에 생긴 만성 관절통을 퇴행성 관절염으로 생각해 대증 치료만 하다 증상이 심해진 뒤 류마티스 관절염 진단을 받는 경우도 많다. "대한류마티스학회의 조사에 따르면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들이 자신의 병명을 알기까지는 평균 23개월이 걸렸으며, 열 명 중 세 명이 진단에 1년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_ * 박효순 '류마티스 관절염’ 병명 알기까지 2년… 대부분 치료 골든타임 놓친다, <경향신문>, 2016.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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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