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얼마 전, 왼쪽 눈썹 아래 조그맣게 뾰루지가 올라왔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일인지 뾰루지는 점점 커져만 갔다. 엄지손톱 크기 정도가 된 뾰루지는 곪지도 않고 오히려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뾰루지가 쌍꺼풀을 덮을만한 크기가 되어서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피부과를 찾았다.
“이건 표피낭종이라는 거예요. 수술하셔야 됩니다.”
기껏해야 따끔한 여드름 주사치료를 생각하고 갔는데 ‘수술’이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왜, 도대체 왜, 무엇을 잘못했길래?
“원인은 찾기 힘듭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요. 이건 나는 사람만 계속 나요.”
그러니까 ‘그냥’ 생겼다는 거다. 특별한 이유 없이 속수무책 당했다는 거다. 아무래도 수술은 너무 무서운데, 많이 아플까? 아,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는 조금 남을 거예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결과였다.
며칠 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수술대에 누워 낭종 제거 수술을 받았다. 표피낭을 절개하여 내부의 염증을 빼내고, 비닐처럼 생긴 낭종 주머니를 완전히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수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서늘한 느낌 때문인지 계속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수술부위가 약간 패일 수도 있다는 얘기 때문에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수술 후 샤워 때마다 전쟁을 치렀다. 상처부위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해서 방수 필름을 붙였는데, 아무리 테이프를 잔뜩 붙여놔도 습기 때문에 필름이 자꾸만 떨어졌다. 덕분에 샤워시간이 한 시간도 넘게 걸렸고, 약속 시간에 자주 늦었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엔 눈썹 쪽에 길쭉한 밴드를 붙여놓은 내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눈썹 위, 대각선으로 길게 붙인 밴드 때문에 마치 앵그리 버드 같아 보였다. 왜 하필 얼굴에……. 억울한 감정이 자주 불쑥불쑥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에서 ‘아마도 이자람 밴드’의 <온 세상 사람들이 억울하다>라는 노래를 듣게 됐다. 보컬은 무심한 목소리로 ‘온 세상 사람들이 억울하다. 하하하.’ 노래하고 있었다. 억울하다고 말하면서 자꾸 ‘하하하’ 웃는 그 노래가 기괴하면서도 매력적이어서 포털에 검색을 해봤더니, ‘살면서 억울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나만 억울한 줄 알았더니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억울했다.’라고 소개글이 적혀있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아무런 잘못 없이, 저마다 크고 작은 불행을 겪으면서 살아갈 것이다. TV 뉴스에서 사건, 사고 소식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명백한 책임 소재를 따져야 하는 사건도 분명 있겠지만, 불행은 삶을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그냥’도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공평하게 억울하다면, 그래서 내가 조금 위로를 받았다면, 나는 너무 못된 걸까. 따지고 보면 표피낭종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억울함에 빠져 허우적댈 바엔 하루 네 번 연고나 꼬박꼬박 챙겨 바를 수밖엔……
다행히도 세상엔 원인 모를 불행이 덮쳐오듯, 사고 같은 행복도 찾아온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영화 같은 이야기지만 지난겨울, 하얗고 작은 아기 백구가 제 발로 우리 집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며칠간 온 동네를 수소문했지만 그 아이가 도대체 어디서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20년을 함께한 반려견을 잃고 슬픔에 빠져 있던 우리 가족의 사연을 꼭 누군가가 알고 그 아이를 보내준 것만 같았다. 우리는 아기 백구를 기꺼이 가족으로 맞아들였고,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웃게 됐다.
이제는 행복이나 불행이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내 인생을 덮칠 때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인생은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논리대로만 흘러갈 수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단지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왔을 때 크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아마도 이자람 밴드’처럼 불행 앞에서 ‘하하하’ 웃을 수는 없더라도, 상처에 연고는 몇 번이고 덧바를 수 있는 끈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새 내 눈썹 밑의 상처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어졌고, 우리 집 아기 백구의 덩치는 나만큼 커졌다. 아마도 불행의 자국은 날로 희미해지고, 행복의 존재감은 날로 무게를 더해가는 것인가 보다.
*모범피 모범생이 아니고 싶은 모범생. 글쓰고 디제잉하고 요가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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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피(나도, 에세이스트)
불치의 사춘기를 앓으며 디제잉하고 글 쓰고 요가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