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과일을 고르는 법
“어서 오세요! 오늘은 수박이 싱싱하고 좋습니다! 꿀보다 더 답니다!”
“어머님, 사과도 좋아요. 한번 보고 가세요!”
활기찬 목소리가 과일 가게 앞에 울려 퍼졌다.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둥그런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연신 소리를 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가게 앞 길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만큼 컸다. 그는 말 끝을 길게 늘여 오세요오, 좋습니다아, 답니다아로 외쳤는데 독특한 리듬 때문에 노래를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가게 앞을 지나며 익살스런 표정으로 그의 말투를 흉내내는 동네 아이들도 있었다. 국방색 반팔 티에 색바랜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큰 몸집과 수염 때문에 턱시도를 입히면 언뜻 성악가처럼 보일 외모이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 손님을 향했다.
“퇴근길이신가 보네요. 찾으시는 과일 알려주시면 제가 골라드리겠습니다.”
“집에 손님이 오는데 와이프가 과일을 사오라고 해서요. 복숭아가 맛있어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물론 맛있죠. 그런데 무른 복숭아라 예쁘게 깎기 힘드실 거예요. 손님이 오신다면 쉽게 먹을 수 있는 청포도가 어떨까요?”
남자 손님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계산을 마치자 이번엔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총각. 수박 좀 골라줘 봐요.”
큰 체구임에도 수박 매대로 몸을 돌려 살피는 동작이 잽쌌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몇 개를 손바닥으로 두드려가며 소리를 비교했다. 소리가 맘에 드는 것들은 들어서 무게를 가늠하기도 했다.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수박을 노끈 포장에 넣으며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특별히 꽉 차게 잘 익은 걸로 골랐습니다. 여름에는 수박 같은 제철 과일이 최고죠. 다 맛있지만 제가 골라드리는 놈이 제일 나을 겁니다.”
“다른 집에서 산 거는 가끔 이상한 게 걸리는데 이 집 총각이 골라준 과일은 실패한 적이 없어요.”
아주머니의 말에 직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가 목에 건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연신 훔치며 대답했다.
“아이구 어머님, 저 총각 아니에요.”
“어머, 벌써 장가를 갔어요? 수박 고르는 걸 보니 와이프도 엄청 까다롭게 골랐겠네. 호호호.”
아주머니의 농담에 주변의 손님들 몇 명도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랑곳 않고 넉살 좋게 대꾸를 했다.
“에이, 와이프가 저를 고른 겁니다. 저보다 훨씬 까다롭거든요. 그럼 맛있게 드시고 또 오세요!”
과일 가게의 남자, 박준표 씨가 건물 3층의 반딧불 의원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마침 대기실엔 환자가 없었다. 대기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데스크로 다가온 그를 알아보고 김희정 씨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1층 행복 청과 사장님이시죠?”
“아, 네. 그걸 어떻게……”
살가운 인사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연히 알죠. 이 건물에 계신 분들 중에 사장님 모르는 분이 없을 텐데요. 과일 가게가 생기고 나서 이 골목이 더 활기차졌어요.”
“죄송합니다. 좀 시끄럽지요?”
“아니에요.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 보면 저도 힘이 솟는 걸요. 보기 좋아요. 사람 사는 것 같고.”
김희정 씨의 말에 그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저녁 아홉 시를 가리키는 벽시계 아래로 진료 시간을 알리는 안내문이 그의 눈에 띄었다.
<반딧불 의원>
— 진료 시간: 오후 5시 - 오전 1시
— 토요일은 쉽니다.
“같은 건물에 이런 의원이 있어 좋네요. 낮에는 가게 때문에 바빠서 진료 받으러 오기 어려운데 밤에 가게 문을 닫고도 올 수 있으니까요.”
접수를 마친 박준표 씨가 열려있는 문을 통해 조심스레 진료실로 들어갔다.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던 의사가 진료실 책상 앞에 놓인 환자용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그가 엉거주춤 의자에 앉자, 커다란 엉덩이 밑에서 의자가 삐그덕 힘겨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의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된 의자라서요. 이 책상도 그렇고 중고로 싸게 들여온 거라. 새로 살 때가 된 것 같은데 게을러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손때가 묻은 의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색이 바래 있었다. 박준표 씨는 의자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몇 년 전 중고 가구 매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새 것 같은 가구는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팔려 나갔지만 세월의 더께가 쌓인 물건일수록 매장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쓸만한 가구들은 너무 이른 시기에 퇴직을 한 회사원처럼 측은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며 가구 수리 실력도 제법 늘었는데, 오래 머물 것 같던 가구가 그의 손을 거친 뒤 새 주인을 찾아 매장을 떠날 땐 보람을 느꼈다. 문득 오래되어 망가지는 건 의자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문제가 생기고, 어느 순간엔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제가 혈압이 높아서 상의를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언제부터 그러셨나요?”
“한 일 년쯤 되었을 겁니다. 그때 가게 임대료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아 한동안 잠을 못 잤거든요. 두통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고혈압이라고 하더라고요.”
“신경을 많이 쓴데다 수면 부족까지 겹치면 혈압이 오를 수 있지요. 그래서 치료는 받으셨나요?”
의사의 질문에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가 겉보기엔 이래도 이제 겨우 서른 중반인데, 벌써부터 고혈압 약을 먹어도 되나 싶어서 처음엔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머리가 너무 아파서 혈압을 재보니 170이 나오는 거에요. 겁이 덜컥 나서 그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반신 마비가 있으셨거든요. 약을 먹으니 혈압이 내려가더라고요.”
“잘 하셨네요. 그럼 지금은 약을 드시고 계신 거군요.”
“그런데 제가 그 병원을 계속 다닐 수가 없어서…… 병원 두세 군데를 다녔는데 처방받은 약이 다 달랐습니다. 사람마다 그에 맞는 약이 있을 것 같은데, 처방이 매번 다르니 불안해요. 그러다보니 또 약을 꾸준히 안 먹게 되고. 이번엔 제가 여기 계속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저한테 딱 맞는 약을 정해 꾸준히 먹어보려 합니다.”
그는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쉴 때마다 그의 어깨가 들썩였고, 그때마다 의자에선 그의 체격을 견디기 버거워하는 듯한 신음 소리가 났다. 한숨과 의자의 신음 소리는 박자를 맞춰 합주를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지금 드시는 약을 볼 수 있을까요?”
그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처방전을 꺼내 의사에게 건넸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처방전에 쓰여진 약 이름을 확인하는 의사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주말 오전 TV에서 방영하는 골동품 감정 프로그램의 전문가 감정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주 좋은 약을 드시고 계시네요. 저도 많이 처방하는 약입니다.”
내놓은 물품이 진품이란 판정을 받은 의뢰인처럼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커다란 몸집이 마른 체격의 의사와 대비되어 더 커 보였지만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얼굴 표정은 아이처럼 밝았다.
“같은 약으로 처방해 드릴게요. 오늘 혈압은 조금 높은데, 약을 꾸준히 드시지 않아서일 수 있어요. 약효를 확인하려면 최소한 이 주 정도는 꾸준히 드셔야 합니다. 평소 혈압이 중요하니 혈압을 자주 확인하세요. 집에서 확인하기 어려우면 여기 오셔서 재도 됩니다. 한 달간 혈압 수치를 보고 필요하다면 약을 조정해 볼게요.”
“집에 혈압계가 있어요. 매일 재 보겠습니다. 약도 빠뜨리지 않고 먹겠습니다. 선생님께 좋은 약이라고 확인을 받으니 믿음이 가는게 혈압 조절도 더 잘 될 것 같습니다. 허허.”
공약을 다짐하듯 힘주어 이야기한 박준표 씨가 너털웃음을 짓자 의사도 미소를 지었다.
“저도 사장님이 골라주신 과일은 믿고 삽니다. 지난 주에 산 수박도 잘 먹었습니다. 제 눈엔 다 비슷해 보여 어떤 게 맛있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쳤다.
“선생님께 사실을 말씀 드리자면…… 사실 두드려도 보고 들어도 보지만 저도 겉만 보고는 잘 모릅니다. 농장에서 직접 먹어보고 가져왔으니 손님들께 추천할 수 있는 거죠.”
“고혈압 약하고도 비슷하네요.”
“네? 무슨 말씀인지……”
“고혈압 약 종류가 굉장히 많지만, 사실 대부분 효과에 큰 차이는 없어요. 모두 좋은 약입니다. 물론 환자에 따라서 효과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까지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먹어봐야 알거든요.”
박준표 씨는 입을 헤 벌린 채 눈을 끔뻑거렸다. 언젠가 처방 받았던 약을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고혈압 약은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의 성분으로만 수십 가지에 달했고, 실제 제품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약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면 왜 그리도 종류가 많단 말인가. 난처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의사가 덧붙여 말했다.
“고혈압 외에 다른 병이 있는 경우엔 고혈압 약도 가려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는 대부분의 고혈압 환자에겐 어떤 약을 먹을 것인지 보다 약을 꾸준히 먹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장님께도 해당되는 이야기고요.”
“그렇군요. 저는 괜한 걱정에 정작 중요한 걸 못하고 있었던 거네요.”
“그러고 보면 제가 사장님을 믿고 과일을 사는 것처럼, 약을 믿고 드실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요. 믿음, 믿음이 중요하죠. 제가 손님 앞에서 골라드리면 더 믿으시니까요. 으허허.”
“사장님께 특별히 중요한 문제가 또 하나 있는데요.”
호탕한 웃음을 짓던 그가 의사의 진지한 말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체중을 조금만 줄이시면 혈압이 훨씬 잘 내려갈 겁니다. 다음 번에 오시면 그 문제도 조금 더 상의해 보지요.”
“아이구. 제 장사 밑천인 목소리가 이 든든한 체구에서 나오는 건데. 그래도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죠. 앞으로 노력해 보겠습니다.”
진료실을 나가려던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뒤돌아 섰다. 가게에서 손님을 부를 때처럼, 목소리가 기운찼다.
“의자 소리는 스프링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기름 좀 치고 나사를 조여주면 금세 조용해질 겁니다. 제가 언제 한 번 올라와 손봐 드리겠습니다. 은퇴하긴 아직 아까워 보여서요.”
고혈압 약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혈압을 낮추는 기전에 따라 안지오텐신 전환 효소 억제제, 안지오텐신 차단제, 칼슘 차단제, 베타 차단제, 이뇨제 등으로 나뉘며, 각 기전 별로 수십 가지의 약제가 존재한다. 다양한 약제들이 있지만 특정 약이 다른 것들에 비해 효과가 우월한 것은 아니다. 대한 고혈압 학회 진료 지침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한 다섯 종류의 약제 모두를 일차 약제로 선택할 수 있다. 고혈압 치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이들 다양한 기전의 약제들 중 어떤 것이든 선택 가능하다. 하지만 기존에 앓고 있던 다른 질환이 있을 때는 특정 약을 피하거나 우선시 할 수 있다. 천식이 있을 때는 베타 차단제, 통풍이 있을 때는 이뇨제를 피하고, 심장 질환이나 만성 콩팥병이 있을 때는 안지오텐신 차단제를 우선 고려하는 것이 그 예이다. 고혈압 약은 종종 부작용을 일으킨다. 칼슘 차단제는 혈관을 확장시켜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기도 하고, 안지오텐신 전환 효소 억제제는 마른 기침을 일으키기도 한다. 혈압이 낮아지면서 어지럼증이 생기기도 한다. 많은 고혈압 환자들이 장기 복용 시에 생기는 부작용이나 내성에 대한 걱정으로 약 복용을 꺼리거나 중단한다. 하지만 고혈압 약의 부작용은 복용 초기에 생기며, 약을 변경하면 이내 사라지므로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한 약을 오래 먹는다고 내성이 생기진 않는다. 어떤 약을 선택할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일단 선택한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고혈압 환자 열 명 중 한두 명은 처방받은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는다. 대한 고혈압 학회의 2020년 발표에 따르면 고혈압 환자 중 혈압이 권장 수준으로 조절되는 비율은 45%에 불과하다. 약에 대한 낮은 순응도는 이러한 낮은 조절율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처방받은 고혈압 약을 절반 미만으로 먹는 경우엔 약을 잘 먹는 환자에 비해 뇌졸중으로 사망할 확률이 두 배 가량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 S Kim, DW Shin, JM Yun, Y Hwang, SK Park, Y Ko, B Cho. Medication Adherence and the Risk of Cardiovascular Mortality and Hospitalization Among Patients With Newly Prescribed Antihypertensive Medications. Hypertension. 2016 Mar;67(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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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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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론 고혈압 약은 꾸준히 먹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약이니까 계속 먹으면 오히려 안 좋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약을 오래 먹는다고 내성이 생기지는 않는다니 안심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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