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음산한 도입부를 배경으로 역으로 쏜 조명 아래 다섯 멤버가 서 있다. 열 맞춰 선 이들의 이름은 애프터스쿨. 원년 멤버인 가희, 베카, 정아, 주연에 장수멤버로 활약한 메인보컬 레이나가 힘을 보탰다. 본격적으로 곡이 시작되기 전 패닝으로 훑는 이들의 얼굴에는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 감돌았다. ‘그때 그 느낌’으로 하지만 ‘지금의 몸’에 맞춘 푸른색 제복을 입고 선 이들의 복잡한 심경은, 그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감상에 젖을 새 없이 쏟아지는 강렬한 비트에 맞춰 애프터스쿨의 2021년 버전 ‘뱅(BANG)!’이 시작되었다, 활동 당시 ‘퍼포먼스에 음악이 가린다’는 평마저 들었던 원조 퍼포먼스 그룹다운 각과 박력에 연륜까지 더해진 이들의 무대는, 그 자체로 케이팝을 오랫동안 사랑해 온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들이 현역이 아니라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말은 단지 예의상 건넨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2013년 발표한 싱글 ‘첫사랑’ 이후 변변한 활동이 없던 이들이 2021년 케이팝 타임라인 한가운데로 다시 소환된 건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의 새 프로젝트 ‘컴눈명’ 덕분이다. 진행자 재재의 독보적 존재감으로 이제는 케이팝 전문 채널에 가까운 무게감을 지니게 된 이들의 새로운 타깃은 ‘다시 컴백해도 눈감아줄 명곡’이었다. 케이팝 역사의 숨겨진 명곡을 찾아내 다시 무대에 세우겠다는 이들의 원대한 포부는, 지금의 문명특급을 있게 한 파워 콘텐츠 ‘숨듣명(숨어 듣는 명곡)’에 이어지는 일종의 ‘케이팝 다시 보기’의 일환이었다. 줄곧 과포화 상태에 시달려온 케이팝 더미 속에서 의미 있는 콘텐츠를 제대로 재발굴해 보겠다는 변함없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진심인 콘텐츠 속에서 샤이니, 오마이걸, 2PM 등 지금도 정상급의 인기를 구가하는 그룹들이 다수 언급된 가운데,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건 놀랍게도 애프터스쿨과 나인뮤지스였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활동 당시만 해도 흔한 섹시 콘셉트와 명확하지 못한 그룹 색깔로 환영보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던 그룹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이제 와 두 그룹을 동시에 바라보니, 마치 다른 색깔 렌즈로 눈을 갈아 끼운 것처럼 이제 와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애프터스쿨과 나인뮤지스는 각각 ‘퍼포먼스’와 ‘좋은 노래’라는 확실한 무기가 있었음에도 활동 기간 내내 끊임없는 멤버 교체에 시달린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케이팝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장신 멤버들을 보유한 그룹이기도 했다.
시원시원한 팔다리로 마칭밴드에서 탭댄스, 폴댄스를 전문가 수준으로 구현하던 애프터스쿨과 카라, 인피니트와 함께 작곡가 스윗튠이 전성기에 쏟아낸 보석 같은 노래를 다수 불렀던 나인뮤지스. 갑작스레 머릿속에 종이 울렸다. 누구보다 확고한 장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의 무엇보다 큰 공통점은, 자신의 개성 그대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불과 10년 전 일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제작자의 구태의연한 기획이나 미디어의 주입식 교육,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대로 세상을 읽기 십상인 인간의 나태한 습성이나 아직 어린 나이, 매일같이 무대에 오르면서도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멤버들의 혼란까지. 모든 것이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만든 요소였다.
불과 10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변하고 있다. 쿨한 베카의 랩처럼 시원하고 깔끔하게 한여름 밤의 꿈으로 남기고 다음 스텝을 밟자 싶다가도, 마음 한 구석 자꾸만 질척임이 남는다. 임신 5개월의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오르면서도 멤버에게 ‘내 몸보다 네 춤이 더 걱정’이라는 농담을 던지는 정아의 의연함이, ‘무대 전, 육아하다 무대를 준비하며 삶이 달라지는 느낌이 이상해 눈물이 났다’는 문현아의 진심이, 무대 위에서는 당장이라도 무대를 부술 듯 강렬한 카리스마를 뽐내지만 ‘안녕하세요 애프터스쿨입니다’라는 단체 인사만으로도 눈물을 보이는 가희의 여린 강단이 자꾸만 떠오른다. 단지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는 결과론적인 문장으로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애프터스쿨과 나인뮤지스의 2021년 버전 무대를 즐긴 모든 이들과 함께 ‘지금도 맞고 언젠가도 맞을’ 시간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바로 지금 도전하라고, 날 따라오라고 외치는 ‘뱅(BANG)!’의 힘찬 외침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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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
2021.06.17
2021.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