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사랑니를 뽑았다. 예기치 못하게 고등학생 때 났던 사랑니는 비좁은 입안에서 소리소문없이 지내왔다. 곧바르게 나는지 삐뚤어지는지도 모른 채 썩은 채로 방치되어 10년을 함께 한 결과는 냉정했고, 참혹했다. 얼마 전 가볍게 스케일링만 하고자 치과를 방문했던 나는 “사랑니가 멀쩡한 치아까지 썩게 하고 있습니다. 뽑는 게 나아요.”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얼떨결에 예약을 잡고 나오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집을 도착해서는 한시도 폰을 놓지 않았다. 각종 포털사이트를 돌며 온갖 사랑니 발치 후기를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슬슬 겁이 났다. 밥을 먹지 못하니 많이 먹고 가라는 말, 피가 멈추지 않아요, 퉁퉁 부은 얼굴은 어떡하죠? 등 다양한 사람들의 후기는 볼수록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차라리 하루빨리 뽑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사랑니’라는 키워드가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당일이 되었다. 미리 진통제도 한 알 먹고, 비장하게 집을 나선 것과 달리 치과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출근길보다 무거웠다. 결국 기다리던 내 이름이 불려 졌고, 마취는 시작됐다. 순간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입안은 아무 감각 없이 얼얼했다. 나 정말 괜찮은 건가? 싶은 생각을 하기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의 “놀라지 마세요.”라는 덤덤한 한마디와 함께 말이다. 그 무언가가 혹시 제 치아인가요? 애꿎은 청바지 무릎을 잡아 뜯으며 혼란을 거듭하고 나서야 수고했다며 선생님은 힘겹게 뽑아낸 치아를 눈앞에 보여주셨다. 10년째 방치된 사랑니를 날것으로 보자니 기분이 참 오묘했다. 그날은 집에 돌아와서 2시간 동안 거즈를 물고 있었다. 인생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진통제를 먹으니 나름 견딜 만했다. 다음날은 죽을 먹어야 했지만,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용감한 내 모습을 자랑을 하기도 했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습겠지만, 사랑니를 뽑은 이후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겼다는 점이다. 마치 ‘내가 사랑니도 뽑았는데 뭔들 못하겠어?’라는 이유 있는 자신감에 차오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모든 일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졌고, 무엇이든 주어지면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기분 좋은 설렘은 덤으로 나를 붕 뜨게 만들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10년 동안이나 안부 한 번 묻지 않았던 지난날, 돌이켜보면 가끔 아프기도 했고, 예민한 신경을 거스르게 한 날도 있었다. 단지 그 고통이 크지 않아서, 무서워서 지금껏 외면했던 나였다. 속으로는 언젠가는 뽑아야지 하면서 이래저래 바쁘다는 이유를 핑계 삼아 자기 위로를 하며 보냈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두려움은 어딜 가나 발목을 잡기 마련이다. 야속하게도 발목 잡힌 세월은 강산까지 변하게 했다.
올해가 다 가기 전, 잡힌 발목이 풀린 셈이다. 아주 큰일을 해낸 것만 같아 달력에도 적어두었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사랑니를 뽑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사실 나에게 마음의 변화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쯤 찾아오는 인생의 신호등 앞에서 바뀌지 않는 빨간불 앞을 한참 동안 서 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귀인이라도 찾아와 도와주기를 내심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신호를 멈추게 한 것도, 움직이게 한 것도 남이 아닌 내가 되었다. 내가 지어낸 도로 위 신호등 작동법을 남이 알 리 만무했다.
2021년은 이것 하나만 지키기로 약속한다. 오롯이 ‘나’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용감한 내가 나약한 나를 지켜주는 걸로, 단단히 묶었으니 풀 수도 없다.
2주가 흘렀다. 사랑니의 빈 공간은 새로운 잇몸으로 살이 차오르는 중이다. 아직은 빈 공간이 어색해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고는 하지만 속은 참 후련하다. 빈 구멍을 가득히 채워나갈 마음도 여전하다. 하물며 그게 음식일지라도 기꺼이 담아낼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사랑니를 숨기고 살아간다. 남이 보기에 눈에 띄지 않아서 가지고 살아간다 해도, 뽑는다 해도 온전히 나의 몫인 셈이다. 오로지 가진 자의 선택에 의해 운명이 좌지우지될 뿐이다.
권윤정 할 수 있는 건 많았지만, 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품고 살아가는 방구석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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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정(나도,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