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동료가 생기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종일 혼자 일하고 혼자 밥을 먹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제안 받은 일을 할지 말지 금액이 괜찮은지 조금 더 높일 수 있을지 등이 고민 될 때 함께 머리를 맞대줄 사람이 아쉬웠다.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녀도 답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우연히 참석한 출판사 송년회에서 그림책 작가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실마리라도 얻고 싶은 마음으로 모임에 참석했다.
밥공사. 모임의 이름은 밥공사였다. 2층 양옥집에 자리한 디자인 사무실의 1층 거실이 모임 장소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거실에는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었고 한 쪽 주방에서는 밥을 하고 있었다. 응? 밥을? 매번 당번을 정해서 돌아가며 밥을 해 같이 먹는다고 했다. 누군가의 사적 공간에서 밥상을 펴고 둘러앉아 밥을 먹는 상황이 펼쳐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약간의 정보를 얻고 싶었던 건데… 과하게 정이 넘치는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그렇지만 이름만 알던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모인 그 자리에 익숙해지고 싶어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곳에서 지회 언니를 만났다. 『뿅가맨』이라는 귀여운 책을 낸 작가였다. 작은 체구, 똘망 똘망 한 눈, 까랑까랑한 목소리. '『뿅가맨』 작가답게 귀엽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니가 하는 이야기는 귀여움과 거리가 있었다. 출판사별 인세 지급 날짜를 기억하고 있냐며 자신은 달력에 기록해두고 입금이 늦어지면 기다리지 않고 먼저 연락한다고 했다. 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이나 인세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스스로를 소진시키지 않는 방법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출판사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아 많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작업이 있으면 잊지 말고 자기에게도 연락 달라고 모두에게 당부했다. 요즘 일이 없어 걱정이라는 동료에게는 사람을 찾는 출판사를 알고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좋은 작업을 하는 것만큼이나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모습이 프로다워 보였고 일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는 모습도 좋아 보였다.
언니가 위암에 걸리고 '사기병’이라는 이름으로 인스타툰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참 언니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는구나… 게다가 새로운 장르에 도전을 하는구나. 언니의 건강을 걱정하는 나에게 언니는 팔로우 늘리는 방법을 물었다. 투병하는 동안 세 권의 책 『사기병』, 『우주로 간 김땅콩』, 『도토리랑 콩콩』 과 두 개의 이모티콘을 만들었다.
마지막 책 『도토리랑 콩콩』이 출간되고 일주일 후 언니는 하늘나라로 갔다. 언니가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이 책을 안겨주고 싶어서 서둘러 작업했을 많은 이들의 노력이 짐작된다. 갓 나온 책을 들고 요양원을 찾은 편집자와 디자이너에게 새 책을 받아 든 언니는 모두의 예상(아마도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받는)을 깨고 수정하고 싶은 부분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 쇄부터는 언니의 마지막 수정 피드백이 반영되어 인쇄되었다고 들었다.
참 끝까지 지회 언니답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그래,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고 해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겠지. 언니는 마지막까지 언니의 모습대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도토리랑 콩콩』은 지금까지 지회 언니의 그림책과 다르게 아주 단순한 그림체로 그려져 있다. 꼭 필요한 그림과 꼭 들어가야 할 대사만 들어있을 뿐 독자의 눈을 잡아끌기 위해 그린 것도 괜히 심심해 보일까 봐 그려 넣은 장면도 없다. 언니가 건강했다면 더 꼼꼼한 그림을 그렸을 텐데 아팠기 때문에 전과 다른 스타일이 담긴 그림책이 나올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을 읽어보면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 같은 마음으로 쓴 책이라고 짐작된다. 그렇다고 슬픈 내용은 절대 아니다. 주인공 도토리가 친구들에게 건네는 작은 고백이 담겨있을 뿐이다. 도토리와 땅콩, 강낭콩이 나오는 책이 슬프기는 쉽지 않으니까. 다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생각나는 친구, 모두 모두 소중해요.’ 라는 말이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는 것에 오랜 생각이 머문다. 그 말을 남겨주어 고맙다. 내가 지회언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 역시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이 책을 선물하면 참 좋을 것 같다.
“지회 언니! 『도토리랑 콩콩』 잘 봤어. 책이 참 귀엽게 잘 나왔네. 작업하느라 고생 많았지? 검색해보니까 베스트셀러더라. 많이 축하해~ 언니가 지금 여기 있었다면 줌으로 북 토크도 하고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도 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새 책을 홍보했을 텐데 그걸 못해서 아쉽지? 그럴 것 같아서 내가 이번 <채널예스>에 언니 책을 홍보했어. 잘했지? 따뜻한 봄이 오고 코로나도 잠잠해지면 우리가 처음 만난 밥공사 모임에서 언니를 기억하며 함께 밥을 해먹기로 했어. 그날 모임 사람들이랑 『도토리랑 콩콩』 같이 보면서 뭐가 좋고 뭐가 아쉬운지 이야기할게. 이제 언니의 새 책은 나오지 않겠지만 언니가 남긴 책이 많으니까 그 책들 보면서 언니를 항상 생각할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생각할게. 콩콩!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수신지(만화가)
서양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으며, 글과 그림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많다. 만화책 <3그램>, <며느라기> 등을 펴냈으며, 여러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작업했다.
tboz78
2021.08.09
하피
202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