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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지가 사랑에 빠진 그림책] 무릎 꿇은 사랑고백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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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도 끝도 없는 시기 질투를 멈춘건 당시 이수지 작가의 신간 <wave>를 본 후였다.(이후 <wave>는 <파도야 놀자>라는 제목으로 비룡소에서 출간되었다. (2021.01.06)


내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미술학원 선생님을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그건 엄마의 소망이었고 내 꿈은 항상 같았다. 엄마가 포기하지 않고 미술학원 얘기를 꺼내면 가르치는 것과 그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고 똑순이처럼 답했다. 미대를 졸업할 때 졸업 전시 주제를 ‘팔리는 작품’으로 잡았다. 똑순이처럼 답했지만 나 역시 그림만 그려서 어떻게 먹고살지 걱정이 많았다. 팔릴법한 그림을 그렸고 부산에 사는 누군가에게 팔렸다. 좋은 출발이었지만 생각처럼 기쁘지 않았다. 그 그림은 부산에 사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팔린 그림은 몇몇 사람만 볼 수 있고 나 또한 다시 보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니 마음이 영 복잡했다. 그렇다고 그림을 팔지 않으면 그건 직업이 될 수 없는데… 그런 고민을 할 때 그림책을 만났다. 졸업 전시를 보러 온 편집자가 그림책 일러스트를 청탁한 것이다. 그림을 그려서 돈을 받고, 여러 사람이 볼 수 있으면서 원화는 내가 갖는다? 세상과 타협한 느낌에 아쉬움은 남았지만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 정도면’ 따위의 거만한 생각이 쏙 들어가는 그림책을 만났다. 이수지 작가의 『동물원이라는 책이었다. 



『동물원은 동물원에 놀러 간 엄마 아빠 아이가 겪는 짧은 소동을 담은 책이다. 글과 그림이 따로 진행되는 형식도 재미있지만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동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휘리릭 재빠르게 그린 부분에서조차 느껴지는 세심한 관찰력, 세밀히 시간을 들여 그린 페이지에서도 숨통이 트여지는 여백. 해맑은 천재성과 방망이 깎는 노인의 장인 정신이 한꺼번에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게 그림책이라면 ‘이 정도면’이 아니라 ‘이런 나 일지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한번 이수지 작가의 그림을 알고 나니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따라그렸다. 최소한 양심이랄까 자존심이랄까 그런 것을 지키기 위해 책을 펴놓고 그대로 따라 그리지는 않았다. 기억에 의존하여 자유로운 듯 그렸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쓸쓸하게도 퍽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내 스타일로 조금만 발전시키면 될 것 같았다. 사람은 모두 고유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으니 아무리 비슷하게 그려도 같을 수는 없을 거야라고도 생각했다.

어느 날 작업실에 놀러온 언니가 놀란 눈으로 그림 많이 늘었다는 칭찬을 했다. “뭐 그렇게 까지는 아직...” 칭찬을 받았지만 께름칙했다. 언니가 이수지 작가를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언니가 책꽂이에 꽂힌 『동물원을 꺼냈다. 많은 책 중에 하필 그 책을. 언니는 『동물원을 한번 보고 나를 한번 보고는 말을 아끼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로 따라 하기를 멈췄다. 대신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한다고 외치는 박진영처럼 작가에 대한 질투와 원망이 이어졌다. ‘조금만 시간이 더 주어졌으면 나도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에서부터 ‘왜 나보다 먼저 이런 작업을 해서 내가 따라 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거야?’까지. 좋아하는 작가를 물으면 이수지 작가는 빼고 답했다. 

밑도 끝도 없는 시기 질투를 멈춘건 당시 이수지 작가의 신간 『wave』를 본 후였다.(이후 『wave』는 『파도야 놀자』라는 제목으로 비룡소에서 출간됐다.) 어느 외국도서전이었다. 도서전 한구석의 아시아 섹션이 아닌 좋은 위치의 매대 위에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파도를 마주하는 어린이의 뒷모습이 멋들어진 형태로 그려져있었다. 어린이의 율동감 있는 동세와 밀려오는 파도가 어우러져 신나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을 만들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책장을 펼쳤다. 철썩철썩 치는 파도를 따라갔다 도망쳤다 하는 단순한 이야기일 뿐인데 현란한 파란 파도와 노련한 드로잉 그리고 다섯 마리 갈매기의 활약으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좋은 것 투성이었다. 부러움도 배 아픔도 깜빡 잊고 “너무 좋다!”를 연발했다. 그리고 나는… 그리고 나는 마침내 중국 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따거’를 외치며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질투심을 그만 내려놓기로 했다. 좋은 작업을 만났을 때의 벅찬 기쁨은 미운 마음도 사라지게 만드나보다. 어설프게 좋았다면 ‘이런 그림을 내가 먼저 그렸어야 하는데.’라는 황당한 질투를 계속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힘들까 봐 확실하게 멋진 작품을 만든 걸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수지 작가가 올해 안데르센상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좋은 소식을 온전히 축하할 수 있게 되어 나도 마음이 가볍다. 계속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확실하게 멋진 작품을 계속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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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수신지(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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