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인간
여린 색 같은 개념은 인간의 것이다. 자연은 여리지 않고 첫 발을 겨우 내딛은 자연도 역시 여리지 않다.
글ㆍ사진 박주연(도서 MD)
2021.01.29
작게
크게

픽사베이강을 따라 걷다 보면 수많은 색깔을 발견한다. 해가 지고 뜰 때 하늘의 색은 정말 다채롭다. 연푸른 바탕이 점점 짙어지고 생경한 붉은 계열의 색이 등장하여 기세를 펼칠 때, 끝까지 물들인 다음 모두 검게 변해가는 때. 그 몇 분간 세상의 모든 색을 보는 느낌이다. 어린 왕자는 우울할 때마다 노을을 본다고 했다. 이후 노을은 감상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기분 상태, 예를 들면 우울이나 상심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노을이라고. 얼마 전 노을을 보고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감정은 개인과 인간 전체를 넘어서는 거대함에 대한 경이라고. 노을이 아니라 어떤 자연을 보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자연의 일은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이고, 개인은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 나는 노을이 되지 못한 채 노을을 본다. 노을의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베이비블루라는 색깔의 이름을 보고 참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여린 상태를 ‘베이비’라는 수식어가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어느 해 봄, 나뭇가지 끝 갓 피어난 어린 잎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여린 색은 봄의 색이 아니다. 새로 올라온 잎은 다른 배경과 섞이지 않을 만큼 쨍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의 형광에 가까울 만큼 반짝이는 그 잎은 전혀 여리지 않았다. 여린 색 같은 개념은 인간의 것이다. 자연은 여리지 않고 첫발을 겨우 내디딘 자연도 역시 여리지 않다. 여린 것은 인간 개인뿐인가 생각했다. 

몇천 년, 몇만 년,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반복과 변주를 병행해온 자연의 일을 생각한다. 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베이비’일 수 없겠구나. 자연은 무자비하다. 자연은 순간에 모든 것을 발산하라고 요구한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나는 그저 지켜볼 뿐, 나의 귀가 잘린다 해도.


고흐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진은영,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수록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저
문학과지성사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예스24 #채널예스 #채널예스칼럼 #도서MD #추천도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eBook
0의 댓글
Writer Avatar

박주연(도서 MD)

수신만 해도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