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는 좋아하는 카페가 있었다. 집에서 일 분도 채 걸리지 않는 아담한 카페. 급한 원고를 써야 할 때 종종 가던 곳. 안타깝게도 카페는 자주 문을 닫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등장하는 카페 ‘제이니’처럼. 이 소설의 출발은 서유미가 종종 가던 카페의 풍경과 육아를 하면서 마주쳤던 여자들의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부터 시작됐다. “삶이 지속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천천히 잃어가는 일”이기도 하기에, “그걸 알아가는 게 슬프기만 한 건 아니라는 얘기”를 나누고 싶어 서유미는 이 소설을 썼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친밀함이 아니다
작년 2월 첫 에세이 『한 몸의 시간』이 출간되고, 소설은 꽤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셨나요?
많은 분들이 비슷하겠지만 2020년은 인생에서 아주 이상한 해로 기억될 것 같아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해였거든요. 제 시간이 줄어들 거라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밖을 나가는 일이 어려워지고 외출하는 동안 계속 마스크를 쓰고 지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이와 집에서 어떻게 하면 하루를 잘 보낼까, 궁리하면서 비대면 수업을 하고 이따금 공원을 산책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소설 쓰는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분리된 공간도 필요하셨을 텐데요.
아이가 보육기관에 다녔을 때는 낮 동안 카페에서 많이 썼고, 밤에는 아이를 재운 뒤 책상이나 식탁에 앉아 썼는데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져서 좀더 근원적인 문제와 맞닥뜨리게 됐어요. 소설을 쓰는 남편과 번갈아 가면서 아이를 보고 소설을 쓰는 날은 카페에서 일했는데 카페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공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작업실이 절실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의 주인공 ‘경주’는 경단녀입니다. 엄마, 아내이기도 하고 취업준비생이기도 하죠. 경주는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카페 제이니’에 가서 이력서를 쓰고 비슷한 취향을 지닌 카페 주인을 멀찍이 관찰합니다. 우리가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풍경, 그리고 곁에 있는 인물로 다가왔어요.
아이와 문화센터를 갔을 때, 그리고 카페에서 마주친 여자들의 얼굴이 있었어요.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뿌듯함과 초조함과 외로움이 얽힌 표정들. 소설에 따라 다른데, 어떤 인물의 표정이나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하고 한 문장이나 하나의 공간에서 나오기도 해요. 한 장면이나 하나의 표정이 다가오면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이야기를 더듬어보고, 이야기에서 소설이 시작되면 그 이야기 안에 숨어있는 얼굴과 표정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경주’는 비혼인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읽혀요. 하지만 이 고립이 과연 스스로 선택한 걸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어쩌면 생존본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주가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이 중요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경주의 그런 면이 누군가에게는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보면 후회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경주의 고립은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계에서의 물러남이나 고립 역시 즉흥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소설 속 ‘카페 제이니’는 경주에게 무척 특별한 공간이에요. 개인으로서의 시간이 보장되는 곳이기도 했고요. 결말 즈음에서는 경주와 카페 주인이 친밀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상상했어요.
소설에서 공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인물이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 성격이나 감정이 많이 달라진다고 느껴요. 경주가 카페에 간 건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해서지만 집처럼 편한 곳을 원한 건 아니었어요. 어느 정도의 거리감, 낯섦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카페 제이니’와 미스 제이니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어떤 질문을 던지거나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라고 설정했어요. 어른이 되면 더 많이 아는 것이 친밀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쓰면서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있었나요?
소설의 전반부에 경주가 카페 제이니의 테이블에 앉아서 그 자리에 앉게 되기까지 회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부분에서 경주의 결혼, 임신, 출산, 퇴직, 육아의 시간이 지나가요. 긴 시간을 회상하는 부분이라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나 고민됐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소설이 육아하는 경단녀의 하소연이나 넋두리로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누구에게나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계기, 궤도를 수정하는 시기가 있고 알 수 없는 고립감에 빠지는 때가 있는데, 그게 노경주에게는 결혼, 출산, 육아였던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직이나 이별, 갑작스러운 발병이나 이민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표면적으로는 육아나 경단녀에 대한 얘기로 읽힐 수 있지만 속절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느낌을 아는 독자분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그런 생각, 당신도 우리도 해요
낮에는 ‘지우 엄마’로 밤에는 ‘노경주’로. 두 삶을 사는 여성들이 많아요. 작가님은 어떠신가요?
저 역시 낮과 밤,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 아이와 같이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 많이 달라요. 소설 속의 노경주처럼 아이가 어릴 때는 일하러 나와서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아이 생각을 하느라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막상 아이와 놀아주는 동안에는 일 생각 때문에 혼란스러웠어요.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 적도 많고요. 그런데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인 것 같기도 해요. 돌이켜보면 학생 때도 공부해야 할 때 딴 짓하고 딴 생각하고, 놀라고 자리 마련해주면 시험이나 진로 걱정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 저 자신을 분리하려고 노력해요.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글 쓰는 저는 작업하는 책상에 놓아두고, 아이를 재우고 나와서 일할 때는 아이 생각은 잠시 접어두려고 애써요.
경주에게 좀더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었어요.
경주에게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고민을 털어놓고 공감과 이해를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해요. 자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아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누군가, 어떤 얘기든 묵묵하고 진지하게 들어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 우리의 인생은 어쩌면 그런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과 함께 해나가는 여정인지도 모르죠. 그런 한두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해지고 얇고 넓은 관계에 기대고 실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있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요.
소설의 끝에서 손님들이 ‘카페 제이니’를 응원하는 쪽지를 문에 붙이잖아요. 되게 뭉클했어요.
수업을 하러 신촌에 자주 갔는데, 거대한 광고판이 눈에 많이 띄었어요. 좋아하는 연예인의 전광판에 빼곡하게 남긴 메모들을 보면서 ‘상대가 볼지 안 볼지 모르는 데도 내 마음을 전한다는 건 뭘까?’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넣고 싶었어요.
부모가 된 후, 글의 소재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나요?
저라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달라진 건 아니지만 아이로 인해 관심 분야에 변화가 생겼고 그 변화가 소설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예전에 제 소설의 주인공들은 '지금, 여기의 나' 에 깊이 천착했다면, 엄마가 된 뒤로는 좀 더 주위를 둘러보고 이후를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소설가들이 왜 역사소설을 쓰는지,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2007년에 『판타스틱 개미지옥』으로 등단하시고 벌써 14년이 흘렀어요. 한국문학의 변화를 느끼시나요?
2000년대에는 어떻게 하면 소설이 대중에게 다가가고 독자의 마음을 소설로 끌어올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목소리가 주변에 많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다른 서사 장르와 경쟁한다거나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다거나.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소설이 그저 소설의 일을 할 때 좋아해주시는 독자 분들이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된 것 같아요. 종이책이나 소설이 위기라거나 사라질 거라는 의심 속에서 문학과 소설은 굉장히 클래식한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소설과 에세이 창작을 가르치고 계세요. 작가지망생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나요?
소설에 관해 말할 때는 이야기를 피어 올리라는 말을 자주 해요. 이 이야기가 가능하게 된 지점을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소설은 서사와 정서가 만나야 쓸 수 있는 글이잖아요. 이야기를 쓰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감정만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안 되죠. 에세이를 쓸 때는 내 이야기라도 거리감을 두라고 말해요. 내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대면 독자들이 들어갈 구멍이 없으니까요. 거리를 둬야 독자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어요.
요즘 주로 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요?
새로 시작하려는 소설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년과 나이듦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인간의 예상하지 못한 변화나 변하지 않음도 흥미롭게 들여다보는 부분이에요. 코로나 바이러스를 지나면서는 이 세계의 지속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요. 우리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추상이 아니라 구체로 실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어떤 독자에게 가닿으면 좋을까요?
일단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노경주처럼 혼란스러워하는 분들, 그리고 어떤 시기를 지나면서 궤도를 이탈한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분들이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좌표와 관계 안에서 “나한테 문제가 있나?” 라고 질문하는 분들에게 당신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육아와 경단녀의 얘기로 읽어도 되지만, 노경주를 통해 내가 삶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지? 그것을 잃은 뒤에 나는 무엇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라는 질문이 생겨나면 좋겠어요.
*서유미(소설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단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녀는 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화려한 올가미에 얽혀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을 이야기한 『판타스틱 개미지옥』으로 2007년 제5회 문학수첩작가상을, 서른 살을 지나서도 여전히 철들지 못하고 무엇 하나 정해진 바 없이 방황해야만 하는 서른셋 여자의 일상을 그린 『쿨하게 한걸음』으로 2007년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하였다. 소설집 『당분간 인간』,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 『끝의 시작』, 『틈』, 『홀딩, 턴』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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