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지난 사랑을 더듬는 시간 - 백남룡 장편소설 『벗』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코리아의 소설이란다. 게다가 미국 라이브러리 저널에서 선정한 2020년 세계 최고의 문학이라니.
글ㆍ사진 김서령(소설가)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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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조물조물 쓰던 일기장을 걷어치우고 대신 페이스북을 일기장 삼은 지 이제 꼭 십 년이다. 그 사이 세월이 변해 “페이스북? 이제 좀 촌스럽지 않아? 다들 인스타로 건너가지 않았어?”라는 소리를 많이 듣긴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페이스북에는 우아한 아재들이 포진해 있다. 아재는 꼰대만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럴 리가. 페이스북에서 오래 지낸 중년 남성들은 나름대로 제 갈 길을 찾아 걷고 있다. 꼰대 아재들이 처절하게 버려지는 것을 숱하게 지켜본 몇몇은 반듯하게 매무새를 고치고 우아하고 세련된 아재로 거듭났다. 그들은 성인지감수성을 단단히 몸에 익히고 책과 음악을 고를 줄 알며 아무에게나 반말을 지껄이지 않는다. 요리를 하는 것에 우쭐하지 않고 제가 아는 것을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배려심 가득한 태도로 지식을 전해줄 뿐 더 나서지 않는 것에 노련하다. 그래서 그들은 몹시 우아하다. 물론 그들의 아내는, 남편의 페이스북을 몰래 훔쳐본 뒤 “놀고 있네. 누가 보면 어지간히 우아한 줄 알겠어?”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지. 다 까발려 여전히 우아한 사람이 세상에 있으려고.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면, 바로 소설 한 권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코리아의 소설이란다. 게다가 미국 라이브러리 저널에서 선정한 2020년 세계 최고의 문학이라니. 으응? 그런데 작가의 이름이 퍽 낯설다. 제목도 그렇다. 『벗』. 당연하다. 이건 북한 소설이다. 어쩌면 태어나 북한의 소설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 역시 ‘공부’를 위해 ‘굳이’ 찾아본 단편소설 몇 편 외에는 전무하니까. 북한에서는 엄청난 베스트셀러였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단다. 자꾸 <사랑의 불시착>이 떠오르긴 하지만 현빈은 잠시 잊고 이 소설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앞에서 페이스북 이야기를 꺼낸 건 이 소설의 주인공 진우 때문이다. 40대 중후반으로 짐작되는 이 남자는 판사다. 이혼소송 판사. 북한인데, 이혼소송 이야기라니 벌써 설렌다. 베스트셀러 소설이었고 드라마화까지 되었다니 어쩌면 막장이려나. 물론 그렇진 않다. 이 소설, 우아한데 그건 모조리 주인공 진우 때문이다. 마치 페이스북 속 우아한 아재 같다. 그는 권위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다정하다. 

첫 장면에서 진우를 찾아온 채순희는 이혼을 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자신과 같은 선반공 출신 남편 석춘과 결혼했지만 순희는 이후 예술단의 성악배우가 되었다. 잘나가는 자신과 달리 매일이 그러그러한 선반공 자리에 만족하며 대충 사는 남편이 못마땅하고, 대학이라도 가보라 조언하면 겉멋 들어 정신 못 차리는 여자 취급을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다. 그래서 이혼소송을 하러 진우를 찾아왔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혼을 시켜달라 애원하는데,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이 석춘 역시 이 결혼은 끝장난 일이라며 이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진우는 그냥 서류만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허나 그럴 리가. 그랬다면 이 소설은 별거 아니었겠지. 

진우는 뼛속까지 신중함이 밴 사람이어서 그들의 집을 찾아가고 그들의 지인까지 하나하나 만나며 속사정을 살핀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길, 문제는 순희의 허영끼라는 것이다. 선반공 남편을 무시하는, 화려한 옷차림의 아내. 그 누구의 눈에도 곱게 보일 리 없는 모습. 사람들의 선입견에 진우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시대청년다운 열정과 진취성도 없이, 그저 영감 티를 줄줄 내며 사는 삼십대 초반의 남편을 어떤 여자가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석춘을 몰아세우는 것이다. 아내의 공연을 관람하는 일을 겉치레로 여기는 건 수치라고, 당장 그런 보수성과 결별하라고 말이다. 내가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렸는데, 이 소설은 80년대 소설이다. 자그마치 80년대에, 북한에서, 최고위급 엘리트 판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를 꼰대 티 내지 않으며 하기 위해 진심으로 석춘과 벗이 되기 위한 노력을 했다! 당연히 진우는 무조건적으로 순희의 편만에 선 것은 아니어서 그녀에게 옛사랑의 의리를 지킬 것도 종용했지만. 



물론 진우는 페이스북 속에서만 우아한 아재여서, 그의 아내에게까지 크게 신뢰를 주지는 못했다. 식물학자 아내 은옥과의 연애 시절, 고향의 풍성한 식물 재배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그녀의 꿈을 적극 지지하며 결혼을 했지만, 막상 이제 와 그는 걸핏하면 고향으로 출장을 가는 아내 때문에 혼잣밥을 해먹으면서 온갖 짜증을 내며 바들바들거리는 평범한 남자였던 거다. 내가 주부냐? 이럴 거면 내가 도대체 왜 결혼을 했냐? 이 나이에 내가 밥해 먹으며 홀아비처럼 이러고 살아야 하냐? 출장 가면서 미안하단 말은 왜 하냐? 성질이 더 나잖아! 은옥이 진우의 페이스북을 보았다면 “놀고 있네, 어디서 우아한 척이야?” 했을 텐데, 80년대 북한에 페이스북이 있었을 리 없으니. 

그래서 이 소설 『벗』은 진우의 자기고백서이기도 하다. 석춘에게 하는 말은 모조리 자신을 향한 것이었고, 순희에게 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잘하는 순희에게 반했지만 예술단 성악배우가 된 순희까지는 사랑하지 못한 석춘, 건실한 선반공이어서 좋았지만 더 나아지지 않으려는 석춘이 미운 순희, 그리고 고향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는 식물학자 아내는 좋았지만 자신을 굶기는 아내는 짜증스러운 진우까지 이 세 사람이 각자의 사랑을 더듬고 더듬어 끝내 ‘복귀’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담았다. 그 결말에 닿기까지의 시간은 꽤 로맨틱하다. 냉철할 것만 같은 북한의 판사가 종종 허당기를 보이는 장면은 사랑스럽기까지 하고. 

이 소설을 집어 들기까지에는 두 가지 난관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난관은 표지에 실린 작가 사진이다. 딱 보아도 북한 작가 같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작가 사진을 보자면 이 책을 과연 내가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하염없이 지루하지는 않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난관은 단어들이다. 북한 말을 되도록 그대로 옮긴 탓에 ‘아내’가 아닌 ‘안해’, ‘윤리’가 아닌 ‘륜리’ 등 독서를 방해하는 껄끄러운 것들이 자꾸 튀어나올 것이다. 하지만 15분만 참으면 된다. 표지의 작가 사진은 금방 잊을 것이고, 우리말과 다른 북한의 단어들은 놀랍게도 금방 적응된다. 오히려 <사랑의 불시착> 속 현빈의 말투가 떠올라 더 친근하기까지 했다! 자고로 베스트셀러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쑥쑥 읽히는 즐거움이 있다. 북한에 이런 소설이 있다니,라는 놀라움은 어느새 뒷전으로 사라지고 “그래서? 얘들 이혼을 하긴 하는 거야?” 그 궁금증으로 손가락은 이미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시 인민재판소의 정진우 판사가 2021년에 살았더라면 페이스북 셀럽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거두며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한다. 꽤 상쾌한 독서가 될 것이다.



벗
백남룡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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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