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레나』,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를 써 낸 한지혜의 세 번째 소설집 『물 그림 엄마』가 출간되었다. 다정한 글 안에 한곳을 오래 응시해 온 이 특유의 묵직하고 예리한 시선을 감춰 둔 소설가 한지혜는 『물 그림 엄마』에서도 진득하고 정직한 시선으로 ‘엄마와 딸’이라는 복잡한 관계를 들여다본다. 오랜만에 소설로 찾아온 한지혜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어 보았다.
오랜만에 출간한 소설집이지요. 지난해 산문집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내기는 했지만, 소설로는 오랜만에 찾아 주셨어요. 책 출간까지의 이야기와 작가의 근황이 궁금해요.
지난해에 산문집을 내기는 했지만, 소설집으로는 9년 만입니다. 그 후로 묶은 소설들이니 오랜만에 출간한 소설이면서 오랫동안 써 온 소설이기도 합니다. 한 해에 한 편 정도 더디게 써 왔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요. 발표할 기회가 적기도 했고, 제 스스로 움츠러들면서 일상의 삶에 숨기도 했고요. 작가에게 있어 소설집은 하나의 분기점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각각의 소설집마다 관통하는 주제와 맞닿은 서사가 있기 때문에 한 권을 묶고 나면 이제 나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할까, 찾아야 하고, 또 어떤 이야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도 해야 하고요. 그렇게 찾고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 그림 엄마』는 “엄마를 마음 편히 사랑하지 못했던, 엄마가 아픔이었던 이들”을 위한 소설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엄마로부터 출발한 소설들이라고도 하셨고요. 작품 속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요?
“모성이, 본성이 아니라 하나의 신화이고 환상이라는 데 이제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나는 엄마에게 그 사실을 배웠다.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고, 여성이었고, 지극히 개별인적인 동시에 복합적인 존재였다. 그 존재가 내 안에 이야기를 심고, 키우고 확장시켰다.”
『물 그림 엄마』에 실린 ‘작가의 말’에 쓴 문장인데요, 이 문장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규정한, 강제한 ‘엄마’를 모두 벗어던지고 홀로 존재하는 고유한 인간, 그게 바로 제가 작품 속에 놓아 둔 ‘엄마’입니다.
‘엄마’와 더불어 소설의 키워드로 꼽을 만한 건 ‘죽음’이에요. 7편 중 무려 4편의 소설에 죽음의 순간이 등장하고, 나머지 작품들에서도 죽음은 중요한 테마인데요. 소설들이 죽음을 말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번 소설집뿐 아니라 그 이전의 소설에서도 죽음은 제게 주요한 주제이자 어떤 사건인데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던 시기에 제가 차례로 겪은 죽음의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시작은 아마도 아버지의 죽음일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셔서 식물인간으로 2년 정도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는데요. 그 시간을 아주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함께 겪으면서 ‘죽음’이라는 사건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인 소멸은 물론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어떤 본성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물 그림 엄마』는 죽음을 다루는 동시에 가난하고 비참한 삶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어쩌면 소설이 죽음의 순간까지 쫓아오는 삶의 비루함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징글징글하고 너덜너덜한 현실을 사는 소설 속 인물들은 우울하고 비참해서 정신이 나가 버리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니 악착같고 모진 면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이런 인물들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이 고스란히 제 소설의 주제인 것 같아서 질문을 읽는 마음이 뭉클합니다. 제가 앞서 죽음의 시간을 겪으면서 그 앞에서 드러나는 어떤 본성을 자각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게 바로 지금 질문에서 말씀하신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비루한 시간, 바닥에 처박힌 너덜너덜함 속에 가장 마지막까지 붙잡게 되는 삶의 의연함이요. 그런 모습을 봤고, 가장 낮은 자의 실존에 대해, 그 무연함과 애씀에 대해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정혜를 죽였나」는 ‘글 쓰는 정혜’와 ‘영화 찍는 정혜’의 이야기예요. 화자인 ‘글 쓰는 정혜’를 보면서 자연스레 ‘소설가 한지혜’를 떠올리게 되었는데요. 소설에 녹아든 작가로서의 경험이 있을까요?
사건은 제 것이 아니지만 감정은 오롯이 제 것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누가 정혜를 죽였나」는 글 쓰는 동료들에게 상반된 평가를 받은 글이기도 해요.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욕망과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 그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심적 동요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 글이라서 공감한다는 분들도 있었고, 작가로서의 자존감을 폄하했다고 불쾌하다는 분들도 있었어요. 저 역시 글을 쓰는 동안 그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요, 대체로 정혜의 경험과 감정에 많이 공감합니다.
몇 개의 경험은 실제로 제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모티프가 되는 ‘협업’ 아이디어는 실제로 있던 일이에요. 제가 소설에 인용한 시나리오에 달린 주를 보신 분들은 눈치 채셨겠지만 실제로 저와 같은 이름의 영화감독이 계시고 그분이 저에게 제안했던 아이디어였어요. 같은 제목으로 영화와 소설을 만들어 보자고 하셨는데, 그때 제시한 제목이 「누가 한지혜를 죽였나」였어요. 듣자마자 가슴에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뭔가 화두 같은 질문이라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계속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고요. 그런데 둘 다 이름을 바꾼 걸 보면 그 분도 저도 죽고는 싶지 않았던 것 같고요.^^ 그 밖의 몇 가지 소소한 에피소드도 경험이죠. 가령 아이나 잘 키우지 뭣 하러 힘들게 소설을 쓰느냐고 하는 말은 저뿐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기혼 여성 작가들이 지금도 쉽게 듣는 말이지요.
7편의 소설 중에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소설을 꼽아 주신다면요?
「으라차차 할머니」를 꼽고 싶은데, 그 전에 「환생」도 꼭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환생」은 제가 엄마와 헤어지고 힘들었던 시간에 쓴 소설입니다. 어떤 애도의 시기였기 때문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과 꼭 나누고 싶고요. 「으라차차 할머니」는 제게 주술 같은 소설이에요. 그 소설은 저에게 있어 내게 닥친, 한 번도 호의적이지 않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묻는 소설이고, 동시에 나는 이렇게 살아가겠다, 어떤 태도를 선언하는 그런 소설이에요. 슬프고 비루한 주인공들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으라차차‘라는 제목을 쓴 건 그 소설이 그런 태도에 관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독자 분들께 『물 그림 엄마』가 어떻게 읽혔으면 하는지 알려 주세요.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하고요.
책을 낼 때마다 늘 갖는 바람이지만 되도록 멀리 멀리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소설은 아프게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기억이 있는 분들에게 애도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자기 안의 슬픔과 비참을 날것 그대로 볼 수 있는 그런 순간이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현재 몇 개의 장편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강연을 할 때 독자들에게 작가란 세상이 누구도 보지 못하는, 그리하여 힘없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기록을 하는 이라는 말씀을 종종 드렸는데요. 단편 역시 그런 생각으로 썼습니다만,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세계를 좀 더 길고 분명하게 기록할 수 있는 장편을 준비 중입니다.
*한지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집으로 『안녕, 레나』와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가 있으며, 각각 문예진흥원이 뽑은 우수문학도서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뽑은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다. 일간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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