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매체들은 앞 다투어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여성의 강점이 발휘될 것이고, 여성 인력을 필요로 할 것이며, 공학 분야 여성 인재를 양성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린 여학생들도 이런 사회적 흐름을 체감하고 있을까?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통계서비스자료에 의하면 2019년 기준 공학 계열의 대학에 입학한 여성은 대학에 입학한 전체 여성의 14.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아직까지는 공학 분야로 여학생들의 진출이 부족하다. 그러나 낙담은 이르다. 사회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달라지고 있다. 현재 공대에 진학하는 여학생의 수는 10만 명이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20배나 늘어난 숫자다. 여성 공학인들의 활약도 곳곳에서 눈부시게 부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학과 친해지고 싶고, 미래의 공학을 이끌어 나갈 생각이 가득한 현재 여중·여고생들은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이 소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모든 질문에 대한 선배 여성 공학인들의 대답을 담아낸 책 『지금은 공학소녀시대』가 출간됐다. 여성 공학자가 드물었던 시대, 일찍이 공학 분야에 뛰어든 저자 오명숙 교수에게 여성과 공학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들어보자.
『지금은 공학소녀시대』라는 책을 출간하셨는데요. ‘공학소녀시대’라는 단어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 ‘공학소녀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좀 더 많은 여성들이 공학 분야로 진출할 때’라는 의미입니다. 공학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있었다면 이 책을 통해 공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공학 분야의 여성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사회에 공헌하고 여성 공학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지를 배우고 공학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공학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여성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여성들이 공학 분야에 많지 않았던 시기, 이미 미국 MIT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셨고, 최초의 홍익대 공학전공 교수가 되셨는데요. 교수님이 공학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공부 잘하는 대부분의 여학생이 생각하던 진로는 의사, 약사 그리고 교사였습니다. 특히 저에게는 일찍이 의사가 되신 이모가 계서서 의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고, 저희 부모님의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두어 달 남기고 전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미국의 대학을 다니면서 전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입시를 피해 미국에 왔는데 또다시 의대 입시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어요. 영어가 버거웠던 시절이라 생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뼈 이름, 근육 이름을 외워야 하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저에게 수학, 화학, 물리를 다 잘하니 공학을 전공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여러 공학 분야를 살펴보다가 화학공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하기 전 몇 달 동안 조그마한 인형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아르바이트하던 동갑내기 미국 여자애가 있었어요. 대학 신입생이었는데, 자기는 화학공학을 전공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에 감탄했었죠. 그래서 화학공학이 다른 전공보다 더 친근감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화학공학 전공을 위해 1, 2학년에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도 무난해 보였고, 취직이 잘 된다는 것도, 공학 전공 중 월급도 제일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엇을 잘 알고 선택한 전공은 아니었지만, 공부는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에 전공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가르치면서 내 전공에 대한 매력과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공학이라는 학문은 단어조차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이미 어렵다고 생각되는 학문이라 진로를 결정하기 쉽지 않은데요. 공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또 교수님이 느끼시는 공학의 매력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대학에서 전공하는 어떤 학문도 쉬운 것은 없다고 봅니다. 쉽다면 4년의 시간을 투자하여 집중적으로 배우고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을 거예요. 책에도 썼는데, 공학은 국가의 부를 구축하는 학문이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학문이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학문입니다. 책에 쓴 것과 다른 예로 제 전공인 화학공학에서 찾아 설명하면 정유공정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석유는 20세기 수송기관의 발전에 기본이 된 에너지 자원이고, 석유화학에 의한 합성섬유와 플라스틱의 발전은 인류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정유공정은 물리적, 화학적 원리를 응용합니다. 원유를 끓는점에 따라 분리하여 우리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와 화학물질 합성에 필요한 기초 화합물을 제공합니다. 분리된 물질 중 가장 중요한 물질은 나프타인데 휘발유 생산에도 쓰이고 기초화합물을 생산하는데 사용됩니다. 휘발유 생산을 위해서는 나프타를 촉매로 반응시켜 옥탄가를 올리고 물성을 최적화하기 위해 다른 경로로 생산되는 휘발유와 혼합한 후 첨가제를 넣어 주유소에서 판매됩니다.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무거운 물질(끓는점이 370oC이상의 물질)은 감압에서 재분류한 후 촉매나 열을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물질로 분해되고 활용됩니다. 가장 무거운 물질은 부분산화에 의해 수소를 만드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불순물인 황도 분리하여 촉매반응에 의해 고체 황으로 전환되어 상품화됩니다. 이와 같이 물리적, 화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변화하는 사회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또 친환경적으로 맞추어 가는 공학기술에 매력을 느낍니다.
왜 소녀들이 공학으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지, 또 공학을 진로로 결정했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이 질문도 책의 두 군데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두 질문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호주에서 2007년을 ‘여성공학인의 해’로 정하고 사용한 구호를 책에 인용하였는데, ‘공학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 공학은 여성에게 좋은 분야이다. 더 많은 여성이 공학 분야로 진출해야 한다.’ 2020년에도 이 구호는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문구입니다. 공학은 창의성과 도전을 통해 성취를 느끼는 분야이며 성취에 대한 보상도 높은 분야입니다. 공학에서 여성은 아직도 소수 그룹으로 좀 더 많은 여성을 필요로 하고 공학의 발전을 위해서 여성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공학으로 진로를 결정했다면, 먼저 공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쌓아야 합니다. 공학에 대해 꾸준히 조사하고, 관련 활동에도 참여하고 주위의 공학인이 무엇을 하는지 직접 만나 대화도 하면서 세부 관심 분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추천합니다. 그다음 필요한 것은 공학을 전공하는데 필요한 수학과 과학의 기초를 쌓는 것입니다. 탄탄한 기초가 없으면 공학전공에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공대에서 문이과 교차지원을 통해 공대에 입학한 학생들이 공학을 전공하면서 겪는 좌절을 많이 봐 왔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못 배웠어도 대학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수학, 과학의 탄탄한 기초를 갖고 대학에서 열심히 공학전공 공부를 해야 공학을 좋아하면서 전공 분야에서의 성공을 꿈꾸면서 사회로 진출할 수 있습니다.
여성 공학인으로서 국내 최초로 여학생 공학교육프로그램을 도입하셨는데요. 어떤 내용으로 이 프로그램이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도입하실 때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여학생 공학교육 프로그램의 목적은 여학생들을 공학을 전공하도록 이끌고 공학전공에 대한 자신감을 높이고 공학 분야에서의 성공의지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성공을 지지해 주는 환경도 중요하지요. 여학생들을 위해서 공학 분야의 소수 그룹으로서의 남성들과의 차이와 아직도 존재하는 미세한 차별에 대한 인식을 키워주고, 공학 실무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며 리더십을 함양하는 프로그램 등을 시도하였고, 다양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또 환경 개선을 위해 남·여 학생 간담회와 교수 워크숍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습니다.
처음 프로그램을 도입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고, 학생들 눈높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고 지지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지금은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고 있지 않은 입장에서 개발된 프로그램의 확산 속도가 느리고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습니다.
현재 한국여성과학인지원센터(WISET)의 이사장을 맡고 계시고,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하고 계시는데요. 여성공학자 양성에 힘을 쓰고 계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소수 그룹이 주요 구성원으로의 특성을 인정받는 소위 최소 임계 비율은 30%라고 합니다. 공과대학의 여학생 비율은 25%까지 올라왔지만, 산업체의 여성 공학인의 비율은 아직 10%가 안 됩니다. 더 많은 여성이 공학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많은 우수한 여성들이 학업을 마치고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입니다. 공학 분야는 다른 분야보다 취업률이 높은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활용률은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나의 세대에 희귀한 여성 공학인으로서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공학인으로 쌓아 온 경험을 공유하고, 그동안 얻은 지혜를 나누고, 사회를 좀 더 포용적으로 바꾸어 더 많은 여성과학기술인이 역량을 발휘하여 개인적인 성취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앞서간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작은 변화라도 만들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여중·여고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공학에 대해 막연한 오해나 편견 그리고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 책 『지금은 공학소녀시대』를 계기로 공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다양한 공학 분야 중 흥미로운 분야를 찾아 도전하기를 바랍니다.
* 오명숙 미국 UC Berkeley를 졸업하고 미국 MIT 대학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 공학인. 1994년부터 홍익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화공시스템공학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전문 분야인 화학공학, 에너지, 여학생 교육, 공학 교육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내 최초 여성 공학 교육 프로그램 도입 등 남다른 발자취로 공학계 여성 진출에 새 길을 열었으며,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스승이자 멘토이기도 하다. 현재 위셋의 이사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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