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 냉장고가 들썩인다. 주인공 송이가 엄마를 기다리다 잠든 사이, 냉장고 속 재료들이 피자를 만든다. 모차렐라 치즈가 노래를 부르고 케첩이 랩을 하는 신나는 무대! 바로 윤정주 작가의 그림책 『꽁꽁꽁 피자』 속 세계다. 그는 20년 이상 어린이 책을 작업해온 베테랑. 어떤 주제든 뛰어난 분석력과 상상력으로 그려내 ‘갓정주’로 통한다고. 그림책 『꽁꽁꽁』, 『냠냠빙수』에 이어, 훨씬 풍성해진 냉장고 이야기. 이번에도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깊은 내공이 녹아있다.
냉장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꽁꽁꽁’ 시리즈가 4년만에 『꽁꽁꽁 피자』로 돌아왔어요. 이번에는 냉장고 속 재료들이 피자를 만들어요.
아이스크림은 1편에서 만들었으니 뭘 만들어 볼까 고민했어요. 요즘 번쩍번쩍한 냉장고가 많잖아요.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문 열면 완성된 피자가 짠 하고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정한 거예요. 참 단순하죠?
달걀 친구들이나 모차렐라 치즈처럼 어린이 독자들이 좋아할 캐릭터들이 와글와글 해요.
다 피자에 들어가는 재료니까 길게 생각할 필요 없었죠. 인터넷에서 피자 만드는 법을 검색해보고 하나씩 캐릭터를 잡아 나갔어요.
실제 레시피를 참고하셨군요.
네. 그런데 막상 요리 사진을 찾아보니 재미없는 거예요. 너무 깔끔해서 생동감이 안 느껴져요. 아이들은 여기저기 묻히기도 하고 초콜릿 같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료도 넣어보면서 자유롭게 만드는 걸 좋아할 텐데. 그림책을 볼 때만큼은 ‘우와 엄마, 우리도 해먹자’하는 마음이 들었으면 했어요.
냉장고의 스케일이 커졌더라고요. 층과 동이 나뉜 것이 아파트 같아요.
피자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으니까 등장인물도 다양한 거예요. 모차렐라 치즈, 식빵, 케첩, 달걀... 너희들 좀 정리해야겠다 하고 아파트처럼 칸을 나눴어요. 위칸은 고추장, 된장, 아래칸은 채소 가족들. 냉장고 정리하는 것처럼요.
재료들이 서로 어울려 춤추는 장면을 보니까 뮤지컬이 떠올랐어요.
다들 한 번쯤은 재료들이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나요? 그릴 때는 머릿속에 영상이 재생돼요. 양파가 훅훅 날아가고 케첩이 튀기도 하고. 저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단지, 맞아 나도 저렇게 생각했는데 할 뿐이죠.
피자에 안 들어가는 엑스트라 재료들도 많아요. 개성이 뚜렷하고 저마다 이야기가 있어요.
정말 하나하나 다 고민했죠. 심지어 정하지 못해서 통만 그려 놓은 것도 있어요. 무엇이 있는지 너의 상상에 맡기겠다 하면서.(웃음) 환경 문제도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냉장고를 친환경으로 만들어볼까 해서, 플라스틱 하나 없이 재생 용기로만 그려봤어요. 그런데 색깔을 못 넣으니 너무 단조로운 거예요. 일단 재밌게 보여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죠.
실제로 피자를 만들어 보셨어요?
네! 밑그림을 다 그리고 책 그대로 한번 만들어봤어요. 맛있더라고요.(웃음) 사실 제가 소화가 안돼서 피자를 잘 못 먹거든요. 평소에 하지 못하는 걸 그리면서 대리 만족하는 거죠.
원고를 보면 상상력이 펼쳐져요
1편 『꽁꽁꽁』에서 늦는 건 아빠였는데, 이번엔 일하는 엄마가 늦게 돌아와요.
의도했어요. 그땐 아빠였으니 이번에는 엄마로 해보자! 1편에서 아빠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 엄마들이 억장이 무너진다고 하더라고요. 현실이랑 너무 똑같아서. 2편에서는 일하는 엄마가 나오면 공감하겠지 하면서 바꿨어요. 사실 저는 남편이 술을 안 좋아해서 이런 장면을 볼 일이 없어요. 어쩜 그렇게 리얼하게 그렸나고요? 사실 술 마신 날 제 모습이 저래요.(웃음)
고양이가 냉장고 문을 짠 하고 열자 재료들이 꽁꽁꽁 얼어붙어요. 냉장고 문을 여는 고양이라니 신기해요.
냉장고 여는 장면도 판타지니까 가능하죠. 동물 중 뭐할까 하다가 고양이로 정했어요. 실제로 냉장고 문을 여는 고양이도 있어요. 사람처럼 행동하는 독특한 애들 있잖아요.
그림책이 마치 만화를 보는 것 같아요. 말풍선이 있고 한 장면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이런 구성을 선호하시나요?
만화를 워낙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화적인 요소가 들어간 게 아닐까요?
데뷔는 만화로 하셨지요.
5살 때부터 만화가가 꿈이었어요. 옛날에는 만화방에 가면 엄청 혼났는데, 오빠가 만화광이어서 다행히 만화를 많이 볼 수 있었죠. 『베르사이유의 장미』, 『유리가면』도 그때 다 봤어요. 노트 한 가득 열심히 따라 그리면 친구들이 돌려 보다가 선생님한테 압수당하고 선생님은 또 교무실에서 몰래 보고 그랬죠.
그 후, 만화를 그만두고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셨어요.
만화는 좋아했지만, 돈을 버는 건 너무 힘들었어요. 열심히 그려도 보수가 너무 적고요. 또, 저는 전형적인 소심 A형이라 마감을 꼭 지켜야 하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새벽에 돌아와 마감을 했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만화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생업으로 삼으니 너무 지친 거죠.
어린이 책은 어떤 점이 잘 맞으셨어요?
너무 힘들지 않아서 좋았어요. 책 한 권을 완성하면 되니 호흡이 길지 않은 거예요. 즐겁더라고요.
그렇게 20년 동안 작업하다가, 그림책을 내셨죠.
작업의 성격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원래 제가 글, 그림을 모두 작업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다른 작가의 원고를 보고 감정이입해서 이미지를 그려내는 게 잘 맞았거든요. 다양한 주제를 의뢰 받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좋은 원고들이 예전만큼 나오지 않고, 원고를 받아도 상상력이 펼쳐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글도 쓰기 시작했죠.
인상 깊었던 독자 후기가 있나요?
제가 처음 받았던 팬레터가 뭔 줄 아세요? 어린이 독자의 그림 지적!(웃음) 한 초등학생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저는 선생님의 팬입니다. 근데 몇 페이지에 있는 그림 잘못 그리셨어요. 다음 페이지에 짝꿍이 바뀌어 있어요.’ 잘못 그린 거 아니야, 시험 시간이라 바꾼 건데! 답장을 쓸까 말까 고민했어요. 근데 그 친구는 발견한 게 너무 기뻐서 우표까지 붙여서 보냈을 거 아니에요. 얼마나 황당하고 귀엽던지. 그냥 남겨두자 하고 답장을 안 썼어요.
그림책은 누군가와 함께 읽는 것
언제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세요?
작업을 시작하면 밤낮이 바뀌는데, 조용한 밤 머리 식히러 베란다에 나가요. 건너편 아파트 불빛도 보고 산도 보고. 그럴 때 새로운 생각이 많이 떠올라요. 처음 ‘꽁꽁꽁’의 아이디어를 낸 것도 베란다로 나가는 도중이었어요. 당시에 큰맘 먹고 커다란 외국 냉장고를 샀는데, 소음이 너무 심한 거예요. 그날도 너무 크게 들려서 냉장고한테 ‘조용히 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니까요. 그런데 막상 냉장고를 열면 또 조용해지고. 그렇게 냉장고 속 세계를 상상하게 된 거예요.
책이 나오면 다시 읽어보지 않으신다고요.
절대 안 봐요. 완성본이 오면 인쇄가 잘 됐나 확인하고 그걸로 끝. 그러다 4~5년 뒤에 문득 보면서 야, 이때 내가 이렇게 잘 그렸구나 하죠.(웃음)
출간 직후에 안 보는 이유가 있나요?
다시 내 그림을 보는 게 창피하잖아요.
이미 엄청 많이 그리셨잖아요. 수많은 어린이가 작가님 그림을 보며 자랐는걸요.(웃음)
아마도 부끄러워서 안 들여다보니까 지금까지 작업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일일이 다 신경 썼으면 못 냈을 거예요.
어린이 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내가 즐거운 것! 그리는 사람이 즐거워야 독자가 봐도 재밌죠. 이심전심이니까요.
어린이들이 즐길 게 많은 세상이잖아요. 그림책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함께 읽는 경험! 그림책은 누군가와 같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목소리가 주는 편안함이 있으니까요. 또, 종이책만이 주는 추억도 있죠. 좋아하는 책은 너무 많이 봐서 종이가 찢어지기도 하고, 슬퍼하다가 다시 사기도 하고. 그런 따뜻한 기억이 오래 남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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