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의 더 페이보릿] 욕망하라, 다르게 - 한가람 감독
영화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화이자, 지금/여기 ‘헬조선’에 대한 낯선 묘사다. <아워 바디>의 세계는 ‘따뜻한 색 블루’인 만큼이나 ‘비정성시(city of sadness)’인 셈이다.
글ㆍ사진 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2020.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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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 감독

<아워 바디>의 위험한 배반

서른 한 살의 자영(최희서 분). 희망고문에 시달리며 8년째 행정고시를 준비 중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공부와 더욱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지쳐 시험을 포기해 버린 어느 날, 탄탄한 몸으로 가볍게 달리는 현주(안지혜 분)와 마주친다. 그리고 현주를 따라 자영은 달리기를 시작한다.

2019년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던 <아워 바디>의 초반부다. 처음 예고편이 공개되자 특히 여성 관객들이 반겼다. 최근 여성의 몸 단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아워 바디>가 그런 ‘건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예고편 역시 그런 관객을 타게팅한 듯했다.

하지만 영화는 기대를 배반하면서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자영과 현주는 함께 달리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자영은 현주의 깊은 우울과 만나게 된다. 곧이어 현주는 아마도 자의였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등단을 하기 위해 썼던 원고들을 남긴 채. 자영은 리서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지만 현주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중년의 남자 부장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섹스를 한다.

한 포털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예고편을 보고 기대한 만큼 실망스럽다.” 영화는 관객들의 예상과 달리 건강한 정답이 아닌 은밀한 질문을 던졌다. 이건 위험한 배반이었다.


영화 <아워 바디>의 최희서 배우

욕망과 우울, 그 무엇도 설명되지 않는

“시나리오를 썼던 30대 초반, 사회에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시도한 모든 것이 실패한 것 같았고, 절망한 상태였다. 운동도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가람 감독(이하 한가람)이 말했다. 그러니 주인공이 외적인 변신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이뤄내고, 그렇게 행복에 한 걸음 다가서는 ‘메이크 오버 필름’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겐 당연히 실망스러운 영화였을 터다. 한가람의 말처럼 <아워 바디>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영화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아워 바디>가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를 유혹하는’ 그렇고 그런 이성애 각본의 영화라고 할 수도 없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현주를 본 순간부터 매혹되어 그의 몸을 쫓는 자영의 시선 속엔 퀴어한 욕망과 긴장이 스며들어 있다. 그걸 지워버리면, 자영의 섹스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자영이 인턴에 채용되기 위해 부장에게 성상납을 했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진다. 이런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영은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해?”라고 반문한다. 그는 그저 “나이 많은 남자와 자보고 싶다”던 현주의 성적 판타지를 연기해본 것뿐이었다. 도대체 왜? 선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현주처럼 되고 싶었을 수도 있고, 현주를 안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 그의 성적 판타지를 끌어안은 것일 수도 있다. 


영화 <아워 바디>의 최희서 배우(왼쪽)와 안지혜 배우

<아워 바디>가 퀴어 영화로 읽히는 것에 대해 한가람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고 말했다. 

“현주와 자영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진 않았다.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넣었을 거다. 그보다 현주는 자영에게 유토피아란 없다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퀴어 영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이 실망하기도 했다. 퀴어 서사가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자영이 자꾸 남자들하고 자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모호함이 <아워 바디>의 퀴어함이다. 자영은 이성애 규범성은 물론 동성애 규범성에 따라서도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상을 욕망하고, 그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데 거침이 없다. 자영의 시선이 가닿는 신체를 다양한 사이즈의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장면들은 정제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온한 감정을 증폭시킨다. 한가람은 “자영은 이 세계가 규정한 ‘정상성’에서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끝내 이룰 수 없었던 꿈의 잔여가 스크린을 부유한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굳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구할 수 없었던 욕망이 ‘현주를 만지는 꿈’이나 ‘부장과의 섹스’ 같이 기이한 형태로 스크린 밖으로 새어나온다. 이건 사회가 레즈비언의 욕망을 부정하고 금지했기 때문에 경험하는 상실은 아니다. 그보다는,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할 수 없는 목표와 익숙한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욕망이 서로 연동되면서, 가져본 적도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우울의 정조를 자아내는 것에 가깝다.

한가람은 “한국인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일 거라 생각했다. “평범한 삶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너무 빡센” 한국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자영이 누구와 자는지”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한가람은 복잡하게 얽힌 욕망의 타래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던 인물들의 시선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

“한국인은 나만 생각하고 살 수 없다.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 친구와의 관계 등 타인의 시선에 구애되어 산다. 내 인생이지만, 그렇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일부러 강조해서 찍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화이자, 지금/여기 ‘헬조선’에 대한 낯선 묘사다. <아워 바디>의 세계는 ‘따뜻한 색 블루’인 만큼이나 ‘비정성시(city of sadness)’인 셈이다.


영화 <아워 바디>의 최희서 배우

우주와도 같은, 자영의 몸

한가람은 여성의 신체를 카메라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지나치게 성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어떻게 찍을 것인가 촬영감독과 오래 토론하고 논의하면서 두 사람은 결론에 다다랐다. 

“클로즈업은 클로즈업이고, 미디움은 미디움일 뿐이다. 중요한 건 찍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 놓인 맥락이다. 물론 불필요한 노출은 피했다. 그리고 몸을 아주 디테일하게 찍으려 했다. 자영이가 옷을 벗고 달라진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는 모습을 찍을 때도, 어디에 있는 어떤 근육을 찍을지 사전에 정확하게 조율했다. 여성의 몸을 대충 훑는 것과는 다르게 보였을 터다.”

덕분에 <아워 바디>의 카메라는 여성을 포획해서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신체의 에너지가 화면을 통해 살아난다. 상실의 정조가 가득하지만, 동시에 활기가 느껴지는 건 이 덕분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은 아무런 희망을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화사하다. 회사를 그만 둔 자영은 이제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고급 호텔의 펜트하우스로 올라간다. 룸서비스로 속이 꽉 찬 햄버거를 시켜먹고, 자신을 옥죄던 브래지어를 벗는다. 그리고 자위를 시작한다.

“초고를 쓸 때 두 가지 엔딩이 있었다. 하나는 자영이 택배 배달을 하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마라톤에 나가는 거였다. 둘 다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오디션에 참여했던 한 배우가 이메일을 보냈다. ‘몸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 자기 몸을 콘트롤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게 엔딩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한가람 감독(왼쪽)과 최희서 배우

마지막 장면은 더 신경을 썼다. 자영의 몸이 “우주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위는 달리기보다 훨씬 작은 움직임이지만, 그런 미세한 움직임이 거대한 움직임으로 다가오길 바랬다.”

범죄의 언어가 여성의 성(性)을 포박해버린 2020년의 대한민국.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은 쉽게 온당하지 않은 것, 여성을 위험으로 내모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성의 섹스를 폐기하는 엄숙주의가 아니라, 규범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욕망의 회로를 벗어나 여성의 욕망을 다르게 잡아내는 언어다. <아워 바디>는 맥락과 서사 안에 들어가 있는, 활기를 잃지 않은 여성의 몸을 그리는 새로운 영화언어를 제시했다. 그렇게 <아워 바디>의 ‘위험한 배반’은 다른 길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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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